선한 사마리아인의 선물 3
video
눅 10 : 25 - 37
1.1.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라.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세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이 마지막 펀치를 날리시는 시간입니다. 첫 번째 펀치는 진리를 알기만 할 뿐 행하지 않는 율법교사에게 행해야만 산다는 고발이었습니다. 두 번째 펀치는 옳게 보이려고 할 뿐 옳게 행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그에게 옳게 보이는 것과 실제 옳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옳게 행하려고 노력하라는 꾸지람의 펀치였습니다. 오늘 마지막 펀치는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그 답을 알기 위해 29절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내 이웃’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비유 끝에 던지신 질문을 들어보십시오. 36절입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접근이 어떻게 다릅니까? 율법교사는 도움을 주는 ‘내’가 중심이 되어 있고 예수님은 도움을 받는 ‘강도 만난 자’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교사의 자기중심적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고발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사랑을 심하게 말하면 자기만족입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사랑이야말로 참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 배타주의를 버리라.
자기 중심주의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고 예수님으로부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열이면 열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무엇이라고 답하였습니까?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왜 직접적인 ‘사마리아인입니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 답을 얻기 위해 먼저 율법교사가 왜 이웃의 정의에 대해 물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이웃의 범위에 대한 논쟁은 토론의 단골소재였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자신들이 1등시민이니 다른 이들은 2등, 3등 시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동일하게 이웃으로 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베풀어도 되는 이웃과 사랑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이웃 아닌 자들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용서를 몇 번까지 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의 리스트에는 첫째로 유대인, 다음으로 유대교 입교하려는 이방인, 셋째로 이방인, 마지막으로 개보다 못 한 사마리아인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바리새인 학파는 유대인 외에 어떠한 이도 이웃이 아니라고 했고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학파는 입교자들까지 이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이방인을 이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었고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냐고 묻는 바리새인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바리새인들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놀라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은 다음 미팅 때부터 초대전화를 받지 못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 지난 번 모임 때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말을 꺼냈던 친구 말이야, 그 친구... 도대체 누구 밑에서 공부한 건가? 학교에 잔디 깔아주고 입학한 것 아니야?’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을 향한 경멸이 어느 정도였냐면,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고 그들과 영생에 함께 들어가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거지조차도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적선을 받지 못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제 율법교사가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지요? 사마리아인은 백만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자기 중심주의가 낳은 또 하나의 몬스터 배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