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창립기(1972-1979)
(3) 과도기(1976-1979)

#2-01 창립기(1972-1979)
(3) 과도기(1976-1979)


#2-01 창립기 (2) 격동기(1974-1975)

목차

#2-02 중흥기(1980-1984)

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3) 과도기(1976-1979) | Transitional Period

1976년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르고

1976년 새날이 밝았다. 그해 1월 4일 (주일) 정기 제직회에서 작년도 결산과 신년도 예산안을 상정해 놓고 심의하면서, 목회자 사례를 금년부터는 1년 12개월에다가 두 달치를 더해 14개월 사례비를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이 예산안에는 또 교육비, 선교비 등이 신설됐다.
1월 17일 (토요일) 저녁시간에는 제직들이 모여 교회 운영 전반에 관한 좌담회를 가졌다. 교회가 생동하는 듯 했다. 1976년도 새 제직회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서 기 : 김정권 집사 부서기 : 이한봉 집사
서무회계 : 양호식 집사 재무회계 : 이성희 집사

임근하 목사 돌연 사임

임근하 목사의 자택 이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교인들 중 더러는 전년도 11월초부터 임 목사가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교회를 섬겨주기 바라던 터였다. 당시에도 임 목사는 “가정 형편상 그럴 수 없다”고 피력했었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위원들을 뽑아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결사’들이기엔 역부족이었다.
1976년 2월 22일(주일) 오후 2시, 임 목사는 임시 제직회를 소집했다. 개회를 선언한 그는 봉투 한 장을 내놓고 냉큼 나가버렸다. 제직들은 닭 쫓던 개처럼 멀끔해졌다. 하릴없이 제직회 서기 김정구 집사가 임시 제직회장이 되어 사회를 맡아 문제의 봉투를 열어봤다. 사직서였다. 갑론을박 2시간 여 토론 끝에 사표가 수리됐다. 임 목사는 1975년 7월 27일 부임하여 1976년 2월 22일 사임한 것이다.
당회는 여태 형성되지 못했다지만 제직회만은 존속해 있었으니, 역대 제직회 ‘임시회장’들을 추스려봄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회자들이 들고 날고 했던 것이다. 또 다시 졸지에 목자를 잃은 ‘고아’들. 어느 한 구석 제대로 돌아가는 부서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목사 청빙위원회

때를 가리지 않고 무책임하게 들썩이는 지도자.
양떼를 돌본다더니 후딱 하면 지팡이를 던지듯 사표를 내던져버리는 ‘목자’들.
그들 때문에 교회가 이다지도 빈번히 상처받고 방황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교우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자괴감 마저 들기도 했다. “이번만은…”, “이번 목사님만은…”하며 기대 속에 모시고 또 모시고 했지만, 안타까움과 어처구니없음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이 우리 교회를 연단시키겠거니’ 하는 생각이 제직들 간에 스멀스멀 일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이제는 심사숙고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는 차기 담임목회자를 모시기까지 설교강사 초청에 따른 제반사와 후임목사 청빙을 위해 ‘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정권·차종철·이성희·이성남·김정구, 다섯 집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였다.

되풀이되는 회의, 조급함

목자 잃은 양들은 후임목사 청빙위원들을 뽑아놓고 그들의 활동만 눈여겨보고 있는 상태였다. 제직회는 계속 임시의장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으나 별다른 안건이 없었다. 그저 청빙위원회의 간단한 경과보고만 들을 뿐이었다. 후임목사 사례비 월 800불 이내에서 청빙하도록 하자는 결의가 고작 안건이라면 안건이었다.
그러던 4월, 정기 제직회가 역시 임시의장에 의하여 열렸다. 청빙위는 잠정적으로 본 교회 제 5대 담임목사로 이희철 목사를 청빙키로 하고 기도 중이며 구체적인 것은 결과에 따라 임시 제직회를 열어 다시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1976년 4월 18일 회의실에서 임시 제직회가 열렸다. 안건은 이희철 목사 청빙에 대한 가부를 묻기 위한 공동의회 개최의 건이었고, 결정된 사항은 그 다음 주일(4월 25일) 임시 공동의회를 열어 청빙투표를 하기로 했다. 이 공동의회의 임시의장은 곽영철 집사가 맡기로 했다.

사진 10. 제 5대 이희철 목사
The 5 senior pastor of the church, Rev. Heechul Lee

창립 3년 8개월만에 5번째 목사

1976년 4월 25일(주일) 오후 2시 본교회당에서 임시공동의회가 열렸다. 출석인원도 이제는 줄고 줄어 25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희철 목사 청빙 가부 결정을 위한 공동의회였다. 사회자의 제안설명이 있은 후 가부를 표결에 부쳐,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에서 성서지리학을 연구하고 있던 이희철 목사를 본 교회 제 5대 담임 목사로 맞게 되었다.(사진 10)
그러나 투표방식에 있어 미묘한 점이 있었다. 전임 목회자 임근하 목사 청빙 건은 거수로 표결하더니 이번에는 찬성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기립투표’였다. 어쩔 수 없었던 교인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기사 이 목사는 이미 지난 주중에 이사(333 Fairmount Ave., Jersey City)하여 많은 교인들이 이삿짐을 나르고 했기에  가부 투표는 어쩌면 한갖 형식일 뿐이었다.
사실,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는 없었지만 항간에 성결교회에서 온 일부 교인들이 성결교단에 속한 목회자를 모시고 명칭도 성결교회로 바꾸자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런 연유로 기립투표가 실시됐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역으로, 만장일치의 은혜로운 표결을 위한 유도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교회는 목사들이 못 배기는 교회”라는 오명까지 쓰고 있을 즈음에 이희철 목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연이은 ‘목회자갈이’에 지치고 질린 성도들은 이번 목사님은 또 얼마나 계실까, 혹은 어떡하면 오래오래 계실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조바심과 갈망 속에 조심스럽게 이 목사를 맞아들였다. 교회설립 3년 8개월만에 다섯 번째 목회자라면 어떤 설명도, 부연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음에랴.

교회 등록과 이사회 구성

이희철 목사 부임 후 첫 사업이 교회의 등록과 이사회의 구성이다.
어쩌면 전철을 밟지 않고 법적 보호를 받으려는 생각이 깊이 내재해 있은 모양이다. 또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기도 했다.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내용은 무엇인가? 이희철 목사는 입에 입을 통하여 본 교회의 분위기와 몇 년 안 되는 역사지만 과거얘기를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교회가 부분적으로 갈라져 라더포드 쪽으로 바람이 일기도 했다는 둥, 교회의 재정잔고를 송두리째 거머쥐고 가버려 고발하기도 했고, 이를 나눠 갖기로 했다는 둥 헌물은 기증자가 이쪽이면 이쪽 것으로 하고 저쪽이면 저쪽 것으로 하자는 둥 믿기 어려운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음이 분명하다.
새로 부임한 이 목사는 두 번 다시 교회에 흠집을 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온 제직들도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기에 교회를 정부에 등록하여 위치를 공고히 하고, 이사회를 구성해 재산을 잘 관리하기 위한 방책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2
그런 관점에서 이사회(Board of Trustees) 구성을 구체화했다. 이사 임기는 1년으로 했다. 이사장(President)은 1976년 4월 27일(화) 목사관에서 있은 임시 제직회에서 차종철 집사로 선임했다. 이사회 Secretary는 제직회 서기가, Treasurer는 재정회계가 겸임하기로 했다.
이사회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정기 제직회 때마다 이사장이 제반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그후 차종철 이사장이 1976년 7월 8일부로 사임하고, 약 5개월 공석 중이었다가 12월 5일 원윤팔 집사를 제 2대 이사장으로 선출하여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도 개인 사정에 의하여 곧 사임하고, 77년 1월 9일자로 이성희 집사를 신임이사장으로 선임하여 명목을 잇게 된다.

4월 재정보고서

이희철 목사가 부임한 그 해 그 달의 재정을 뒤적이는 것도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살펴본다.(표 8)
표 8
수입면

주일 주일헌금 작정헌금 감사헌금 주일학교
4 36.95 74.00 60.00 170.95
11 45.10 114.00 25 5.21 189.31
18 22.35 45.00 420.00 487.35
25 21.65 155.00 155.00 6.50 338.15
126.05 388.00 660.00 11.71 1,185.76

* 부활절 감사헌금 400.00불은 포함되었음.

지출면

내용 금액
목사님 사례 600.00
목사님 초청비 50.00
교회사용료 100.00
성가지휘자 50.00
반주자 40.00
침대 250.00
Apt Deposit 205.00
Tel Deposit 50.00
Apt Rent & Key 112.50
다과비 55.18
미입금(약정) 80.00
1,592.68

3월 이월액 1,932.93
4월 입금액 1,185.76
4월 지출 1,592.68
4월 현잔액 1,526.01

재정보고는 이런 양식에 의하여 매월 제직회때 마다 서면 보고되었다.

베델 성서연구

이희철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시작된 것은 퍽 고무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당시 많은 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다면 번졌다고 여길 수도 있을 베델 성서연구이다. 그림이 포함된 별도 교재를 가지고 신구약으로 나뉘어 성경을 체계있게 배우는 시스템이다.
제직과 일반 교인은 물론 이웃들도 임의로 참여하도록 문을 열어 놓고 연구생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청년회 발기 총회

1974년도에도 청년회의 발족을 위하여 위원을 선정하고 준비하였었다. 이것은 여전도회와 동시 발단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전도회는 발기 총회가 당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임원도 선출하여 정식으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청년회는 나이 구분에 퍽 애로가 많았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고 발족된 근거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기존했던 것은 사실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청년회의 창립’이라는 용어를 써서 청년회도 현실화하기에 이른다. 나이 많은 이들은 빼기로 했다. ‘헤쳐 모여’식으로 일단 기존 청년회를 해체하고 재편성하되, 대상자를 고등학교 졸업생 이상 25세 이하의 미혼 남녀로 범위를 좁혔다. 그렇게 해서 효과의 극대화를 꾀했다.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이 모여(어느 잡기에 의하면 8명이 모였다고 되어 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신임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김면오 부회장 김혜옥 서기 조명순 회계 원혜숙 부회계 권희종

1976년 6월 27일부터 청년회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10명이 출석하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마치고 나서 점심 식사 후 헤어졌다.

재기와 중흥을 향한 발돋움

이희철 목사 부임을 계기로, 교회 주보 제작부터 종전 방식에서 일신했다.
표지에 성화가 든 주보용지를 시중에서 구입해 본문을 타이핑하고 복사해서 만들었다. 따로 예산이 없었으나 예비비에서 서무비로 전용하여 쓰도록 허락됐다. 예배순서만 덜렁 들어가 있던 이전 주보보다 내용도 충실해졌다. 예배순서, 교회소식, 지난주 통계 등이 게재되어 제법 주보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예배시간도 재조정 됐다. 미국교회당을 빌려쓰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쓰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7월 셋째주일부터 8월말까지는 오전 10시30분부터 예배를 드리는 등 수시로 형편에 맞추어야 했다.
그 즈음은 창립 네 돌을 앞둔 때였다. 그렇긴 해도 그다지 기쁜 마음들이 아니었다. 수난과 격동의 나날 속에 찢길 대로 찢긴 심령들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아 뻑적지근한 잔칫상을 차릴 손가.

다음해 5주년 때는 그래도 보암직한 행사를 가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고 이번만은 대내적으로 조촐하게 지내기로 했다. 8월 29일 주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온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식사 경비는 제직들이 부담하였다.
당시 한인교회들의 특징이라 할만한 것이 잦은 야외예배였다. 식구가 단출하기도 하려니와, 한국에서 찌든 가난의 때를 여기서 벗겨본다든지 자연을 맘껏 만끽한다는, 보이지 않는 자긍심과 우리만의 시간으로 가꿔보고 느껴보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본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주 야외예배를 가졌다.
이웃 교회와의 유대 또한 굳어져 갔다. 몇 안 되는 한인교회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그해 10월 17일에는 새로 부임한 이희철 목사의 집례로 성찬·성례식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집례를 도울 장로가 한 사람도 없어, 이웃 뉴저지 연합장로교회의 이현호 장로를 초빙하여 도움을 받았다(이 일을 계기로 이 장로가 본 교회로 옮겨오기에 이른다).
또 이웃 제일교회의 성전 헌당식에 20달러 상당의 화환을 보내고, 많은 성도들이 헌당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축하해줄 것을 광고하기도 했다. 이희철 목사가 목회자로 부임하고 나서는 서서히 중흥(中興·쇠하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의 물결을 타는 것이 역력했다.
교회 재정에서 50불을 지원해 치러진 성가대 주최 교회 내 탁구대회는 성가대원들을 결속시킨 것은 물론 온 교우들의 화합의 장이 되고도 남았다. 청년회도 여러 행사를 통해 활성화되어갔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제 위치를 지키고 교회에서 생활하며 교회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해 연말은

추수감사절에는 감사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 학생들의 찬양순서 등 축하행사를 가졌다. 그리고는 저녁식사를 전 교우들이 한 자리에서 나눈 뒤, 전례 없이 “성지순례” 슬라이드를 관람하였다.
연말에는 성가대를 위하여 200불, 주일학교에 150불을 지급하여 자축하게 했다. 이런 작은 일들이 촉매가 되어 교회 부서 부서마다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해 연말에는 이성희 집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예산위원회(위원: 회계2인·서광진·김기태·곽영철 집사)를 조직하여 차고 넘치는 예산을 짜도록 했고, 이듬해 3월에는 인천 숭의 감리교회를 시무하는 이호문 목사를 초청하여 대 부흥회를 갖기로 구상해 놓았다.

성탄절에는 선물교환 등 축하행사 일체를 청년회에 일임했다. 왜 진작 그런 기회를 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것일까 의구심이 갈 정도로 그들은 은혜롭게 해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기로, 그해 겨울은 다른 해 겨울 보다 덜 추웠던 것 같았다. 특히 더 훈훈하고 인상적인 모임으로 성탄축하 연합예배를 손꼽을 수 있다. 뉴저지 한인기독교평신도연합회 주최로 12월 25일 7시 30분 뉴져지제일교회에서 드려졌다. 이 행사에서 본 교회 담임 이희철 목사가 설교를 맡아 ‘마리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했다.(표 9)

표 9 성탄축하연합예배

1977년

제직 활성화

1977년도 첫 정기 제직회가 1월 9일 본 교회당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희철 목사는 새해 목회방침 및 교회 운영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어서, 종전에 제직회 임원을 제직회에서 선출했던 것과 달리 담임목사가 임명하였다.
<서리집사>
남 : 원윤팔 서광진 차종철 곽영철 이성희 김사현 김기태 이준무 강정구 양호식 이성남 공유성 조광기 홍무승 이정호 유병국(16명)
여 : 오안순 전인호 박경수 김어금 유민자 윤정자 김명순
   (7명)
제직회장 : 이희철 목사
서       기 : 김기태 집사
회       계 : 양호식 집사
부 회  계 : 김정구 집사
전도부장 : 이준무 집사
봉사부장 : 김명순 집사
동원부장 : 조광기 집사
친교부장 : 박경수 집사
재정부장 : 원윤팔 집사
* 차후 체육회장 이재실 씨를 임명하고 체육회를 담임목사 직속으로 두었다.
<구역 편성과 구역장>
   제 1구역장  : 이애순
   제 2구역장  : 오안순
   제 3구역장 : 김어금
   제 4구역장 : 이혜숙
   제 5구역장 : 유충자
이렇게 제직, 제직회 임원, 부서장, 구역장을 임명하고 첫 달이 가기 전 1월 18일(화), 19일(수) 양일간 저녁 8시 30분에 모여 약 두 시간씩 제직수련회를 가졌다. 처음 있는 일이다. 강사는 이희철 목사, 박재영 목사(뉴져지제일한인교회), 이현호 장로(뉴져지연합장로교회)가 맡았다.(표 10)

표 10
’77년도 제1회 제직수련회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특히 ‘미국 연합 장로교회 헌법 해설’을 맡아 강의한 이현호 장로는 18쪽에 달하는 교재를 준비하여 제직들에게 나눠주고 열강을 했다. 그 교재 내용 중 ‘교회’라는 부분을 여기에 싣는다.

교 회

미국 연합장로교 헌법이나 우리 한국 교단의 헌법을 보면 원래 “교회”란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자기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한한 은혜와 지혜를 내심을 알 수 있으며 이 “무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한다. 즉, 이 “무리”가 하나님의 “교회”요,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로서 이를 가르켜 “거룩한 교회”라고 한다.

교회의 종류

그러나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라 한다. “무형교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요, “유형교회”는 전세계에 산재한 교회이다.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로서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교제하기 어려우므로 여러 곳에 “지 교회”를 설립하여 갈라디아서 1장 22절에 있는 말씀과 계시록 4장 20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 무리와 그 자녀들이 저희들의 바라는 대로 일정한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결하게 생활하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키 위하여 성경의 교훈과 교회 정치에 의하여 공동예배로 모이며 이것을 “지 교회”라고도 하고 “지 교회의 집회”라고 한다.

지 교회의 설립

이상과 같이 공동예배로 모이는 “기도소”에 입교인 15인 이상이 있어 지교회를 설립코자 하면 그 지역의 “노회”에 청원하여 승인을 받아 설립을 한다. 그것을 “지 교회”라 하며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를 “미 조직 교회”라고 한다.
(후략)

아울러 여전도회도 심기일전

신년을 맞이하여 여전도회도 새로운 각오로 새 일꾼을 고르고 이 중흥의 물결에 올랐다.
회 장 오안순
부 회 장 김어금
서 기 이애순
회 계 김동희
봉사부장 양광자 ((양호식 집사(현재 장로)의 부인. 현 시무권사. 이하 ‘박광자’로 표기.))

미 동부 전도대회, 강사 한경직 목사

당시에는 미 동부 쪽 한인교회들 전체가 영적으로 불붙는 양상을 보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 동부노회가 주최하고 뉴욕교협이 후원하는 대규모 전도대회가 1977년 3월 4일〜6일에 한경직 목사를 강사로 성대하게 열렸다. 장소는 플러싱에 있는 뉴욕연합장로교회였다. 표어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로 내걸었다.
미 동부지역 교회들이 총망라해 참석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서를 맡아 참여한 지교회만 봐도 집회규모와 출석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그 시절에는 어떤 교회들이 있었으며 목회자들은 누구였는지 한번 되새겨 보는 의미에서 당시 순서를 맡은 교회(목회자)들을 열거해 본다.

3월 4일 (금) 저녁 7시 30분
장석진 목사 뉴저지 한인 성결교회
김규환 장로 라더포드 한인 장로교회
정달빈 목사 스탠튼 아일랜드 한인교회
홍대윤 장로 뉴욕 동부교회
선윤경 목사 대 뉴욕 한인 교역자회 회장
최원범 집사 전도대회 독창자

3월 5일 (토) 저녁 7시 30분
김용주 목사 라더포드 한인 장로교회
이은수 목사 부롱스 동산 교회
장영춘 목사 Queens 장로교회
박재영 목사 뉴저지 제일 한인 교회
유태영 목사 대 뉴욕 한인 교회 협의회장

3월 6일 (주일) 오후 3시 30분
김권석 목사 미주 동부 노회장
안창의 목사 Queens 중앙교회
정영규 목사 뉴욕 제일 장로교회
장승칠 목사 뉴욕 선교교회
염석규 장로 한민교회
한진관 목사 Queens 한인교회

3월 6일 (주일) 오후 8시
박희소 목사 뉴욕 동부교회
이희철 목사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김병서 목사 후라싱 한인 제일 교회
김해종 목사 뉴저지 연합교회
서상복 장로 Queens 한인교회
지관순·백예원 목사 뉴욕 연합 장로교회

초기 세 번째 장로

1977년 1월 18, 19일 이틀간 본 교회에서 있은 제1회 제직수련회 때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해설’을 맡아 강의하였던 강사 이현호 장로 ((이현호: ‘초기 제3번 장로’. 1979년 5월23일 백주에 본인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괴한에게 피격, 소천했다.))는 우리 교회 ‘초기 제 3번 장로’였다. 그는 1977년 3월 6일 정기 제직회에 ‘이명증서’를 내놓았다. 그 당시 이명증서를 챙겨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기야 헌법을 해설하고 강의까지 할 수 있었음에랴.
그날 제직회는 일사천리로 이렇게 결의하였다.
<다음 주일인 3월 13일에는 공동의회 소집을 광고하고, 그 다음주 3월 20일에는 공동의회를 열어 시무장로 투표를 하고, 4월 3일 주일에는 시무장로 취임식을 행한다.>

아무튼, 일단은 제직회에서 정한 바대로 3월 20일 오후 2시 본당 예배실에서 공동의회가 열렸다. 세례교인 32명이 출석했다. 무기명 투표를 실시한 결과 가(可) 31표, 부(否) 1표로 투표수의 3분의2이상 득표로, 이현호 장로가 본 교회 시무장로로 당선되었음을 제직회장 이희철 목사가 선언했다.
여기까지는 순항이라면 순항이었다. 그러나 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나 할까. 정작 법을 익히 알만도 하련만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시무장로를 세우려면 사전에 노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본 교회는 아직 노회에 가입되어 있지 아니한 실정인지라 노회의 사전 허락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를 모르고 이현호 장로를 본 교회 시무장로로 허락해 줄 것을 품신하였으니, 노회에서 승인해 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었다. 이현호 장로는 본 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다른 장로가 없는 터라 그가 주일 대 예배 대표기도를 줄곧 맡아했다.

창립 5주년 기념성회

전기한 바와 같이 4주년 되던 해에는 별 기념행사가 없었으나, 5년째에는 좀더 각성하고 은혜가 충만한 행사들을 대대적으로 준비해 보자고 입을 모아왔었다. 그리하여 연초부터 매주 주보 상단에 “창립 5주년을 영광스럽게”라는 표어를 네모 속에 담아 올렸을 정도였다. 전년도 말 계획했던 대부흥회도 ‘창립 5주년 기념성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성회기간은 1977년 3월 24〜27일 나흘간이었다. 표어는 “지금은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고후 6:2)”, 강사는 이호문 목사(인천숭의감리교회)였다.(사진 11)

사진 11. (좌)창립 5주년 기념성회 (우)기념성회 강사 이호문 목사
The picture of congregation members (left) and the guest speaker, Rev.Homoon Lee(right), after having the revival worship in commemorating the 5th anniversary of the church.

당시는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 하면 교역자들은 순서 맡기에 바빴고, 주변지역 교인들은 새떼처럼 몰려다녔다. 성가대들도 교대로 찾아가서 찬양을 했다. 이 성회에서는 라더포드 장로교회 성가대와 뉴욕 퀸즈 장로교회 성가대가 수고해 주었다.
이 성회에 순서를 맡았던 이들을 여기 열거한다.
김용주 목사  라더포드 장로교회 시무
김해종 목사  뉴저지 연합 감리교회 시무
장석진 목사  뉴저지 한인 성결교회 시무
김대업 목사  뉴저지 중앙교회 협동목사
김권석 목사  한민교회 시무( 미주 동부노회 노회장)
박희소 목사  동부교회 시무
장영춘 목사  퀸즈장로교회 시무
박재영 목사  뉴저지 제일 장로교회시무
김규환 장로  라더포드 장로교회
이동필 장로  뉴저지 제일 장로교회
임수식 장로  한민교회
이현호 장로  뉴저지 한인장로교회

“여기서 당장 나가주오!”

그 즈음 건물임대주인 미국 개혁교회로부터 뜻밖의 서면 한 통을 받았다.
교회를 옮겨 나가달라는 것이다. 까닭인 즉 교회당 주변을 너저분하게 쓰고 있고 아이들이 교회당에서 뛰놀며, (한식)냄새가 난다는 것 등이었다. 서자의 설움이랄까 남의 집 셋방살이의 서글픔이었다. 하는 수 없이 1977년 4월 17일 임시 제직회를 열고 다른 예배처를 얻기 위한 위원으로 이희철 목사, 이현호 장로, 김기태 집사, 양호식 집사, 김정구 집사 등을 뽑아 교회당 물색을 일임했다.
세를 살기에, 맘껏 활동을 할 수 없고 성탄절기 같은 때에는 우선 순위가 임차인이 아닌 임대주에게 있는 터여서 마음놓고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안 그래도 계절마다 시간을 조절해야 하고 스케줄을 수시로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 가운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기도 밖에는 별 도리가 없어 이희철 목사는 간단없는 기도를 회중에게 요청했다.
위원회에 일임된 새 장소로는 저지 시티의 성공회 성당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 조급히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끝내 버틴다는 것은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나, 서둘지 말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숙제로 남겨둔 것이다. 그러나 ‘숙제’에는 유효기간이 따랐다. 위원들이 장소, 건물을 물색한 결과를 갖고 공동의회를 모였다. 그해는 임시공동의회를 자주 모인 진기록을 낳기도 했다. 34명이 출석한 공동의회에서 이현호 장로가 그간의 배경 및 교회의 위치, 건물의 모양 등을 설명하고 저지시티 성공회 건물로 이전할 의사를 물으니 34명 전원이 손을 들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그렇다고 바로 교회가 이전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1. 해맑은 5월의 어린이들

Van Cortland Park, Bronx, NY The Children’s Day in May

5월의 체육행사

4월의 봄 대 심방도 끝이 났다. 은혜를 안겨주고 복을 맘껏 빌어준 대 심방이었다.
5월 1일을 어린이 주일(사진 11)로 지키며, 이 목사는 자녀 교육에 대한 설교를 한다. 성경 본문은 눅 2 : 41 – 51절, 제목은 ‘성전에 있는 소년 예수’이었다. 그날 주보에는 교회소식 1항에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를 믿음과 말씀으로 양육하여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합시다.’라고 타이핑 되어 있다.
5월은 자연이 푸르름을 더해가며 각종 체육행사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매주 종목별로 행사가 다채롭다. 체력도 증진시키고 이웃과의 유대를 다지며 성도의 참된 교제를 갖는, 퍽 유익한 기회다.
 1) Little 야구 (5월7일·토요일)
     홍무승 집사가 야구팀을 조직, 출전
 2) N. J. 한인회 배구대회(5월14일·토요일)에서 1등.
     Warinanco Park, Elizabeth
 3). 뉴저지 제일교회 탁구대회(5월21일·토요일) 1등
     State College 강당
 4) 한국일보사 주최 축구대회(5월 28일·토요일)
그 외에 족구 대회도 있었다.  교회간 체육활동이 활발하고 성과도 좋아 이를 진흥키 위한 체육위원회를 신설하여 관련 활동 전체를 맡게 했다.
곽영철 양호식 이기석 이주남 차종철 김정구 공유성 김면오
아울러 체육진흥을 위한 후원회도 만들었다.
       위원장 : 홍무승
       위  원  : 이현호 장기호 서광진 서태호 한원열 김명순 이정호 고흥열
후원의 물결을 타고 성도들의 희사품도 답지했다.
  선수 유니폼(팬티·스타킹) 원윤팔
  선수 유니폼(상의 26벌) 장기호 김경렬
  축구공 6개 이성희

중·고등부 조직

교회 교육은 유아·유치·유년의 시기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소년, 소녀들이 겪는 사춘기 시절의 교육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 왔다”고들 말은 쉽게 하지만 생활이 그렇게만 놔두지를 않는 것이 현실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중·고등부를 신설하여 그들의 적성에 맞는 신성교육과 더불어 인성교육이 이루어지어야 되겠다는 생각들이 이때 대두됐다. 여태 고등학생 수는 그리 많지를 않았다. 그러기에 고교 졸업시즌에는 주보에다 소식을 올리고 축하해주곤 했다. 이를테면 ‘원길현 군(원윤팔 집사 장남)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합니다/이충국 군(이현호 장로님 장남)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합니다’—이런 식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은 청년부에 흡수되었지만 수가 점차 늘면서 분할 조직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마침내 1977년 9월 25일 중고교생들만 따로 불러모아 중·고등부를 조직 창설했다.

전교인 전도요원화

교회설립 5주년을 맞던 그 무렵 성령의 불길이 강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교회는 무엇보다 전도열로 후끈후끈 달아올라야 교회답다. 그해 표어도 ‘금년은 전도하는 해, 성장하는 교회’로 했었다. 제직훈련, 연합 전도대회(강사: 한경직 목사), 5주년 기념 부흥성회 등 일련의 굵직굵직한 집회를 통하여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된 성싶었다. 그러나 정작 교우들 자신이 자진 동참해 바로 내 이웃을 구원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온 교우들의 전도요원화가 선행돼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사실 그런 준비는 상당기간 전부터 해왔고, 이제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전도훈련 신청서를 받았다. 신청명단만 보더라도, ‘3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라는 연초계획을 곧 이루리란 인상이 들었다. 전도훈련강습회 기간은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간, 강사는 CBS에 근무하는 강용원 선생(훗날 KCCC 전국총무)이었다.
준비위원장에 김기태, 위원은 계정숙, 박광자, 김어금, 임영자, 홍혜실 등 제씨였다. 훈련비(1인 $5)와 함께 신청서를 내고 참가한 교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주남   전   영 조광기 천갑엽 이성남 김면갑 김면오 계정숙 오안순
  김어금 양호식 박광자 김정구 이현호 홍혜실 김기태 고흥열 임영자
  조인기 이혜숙 이종국 남궁진 이성희 김경열  김명순 이기석 김동희
이애순 유병국미스사 조영수 곽영철 하희도 윤남인민묘기공유성
  이준무 (37명)

미주 동노회 가입

그해 9월 19일 임시 제직회는 이희철 목사의 위임 추대를 결의했고, 10월 30일 공동의회가 열려 투표에 부쳐졌다. 위임국장으로는 김용주 목사(라더포드장로교회)가 와서 주일 대 예배 때 말씀을 증거한 뒤, 임시당회장으로서 공동의회를 소집한 대로 의장이 되어 의사진행을 했다.
표결에 들어가서는 총 투표자 36명 중 찬성 35, 반대 1로 가결됐다. 유감스럽게도 그때까지 우리 교회는 아직 노회 청원을 받아 임시 당회장이 온 것도 아니고, 노회에 가입도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한번의 시행착오였다.
그나마, 10월 2일 임시 공동의회를 열어 뒤늦게 노회에 가입키로 결정하여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제6회 미주 동노회가 1977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양일간 필라 한인 연합 교회에서 개회됐다. 본 교회는 노회가입 신청과 목사위임, 장로 청원을 했다. 노회가입은 만장일치로 가결됐으나 목사위임과 장로청원 문제는 왠지 석연치 않았다.
연초부터 금년 5주년 기념예배에는 목사 위임, 장로 취임, 권사 임직을 누누이 강조해 왔건만 돌연 변경됐다. 1977년 11월 27일자 임시 제직회의록에 의하면, ‘3. 안건’이란 제하에 이렇게 기록됐을 뿐이다.
• 목사님의 위임식과 장로님의 취임식에 관하여 목사님의 설명이 있은 뒤 (노회에서의 문제) 내주의 창립 5주년 기념 행사를 창립 5주년 행사 및 오안순 집사 권사취임식으로 하기로 하다.
• (하략)

우리 손으로 처음 뽑은 오안순 권사

당초 오안순 집사를 권사로 천거하기로 했던 것은 1977년 5월 29일 임시 제직회에서였다. 7월 31일(주일)부터는 주보에 권사투표를 실시한다는 광고가 나가기 시작했고, ‘제직회에서는 오안순 집사를 공천했습니다’ 라는 귀띔도 곁들여졌다. 온 성도들이 기도 중 은혜로운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첫 시무 권사를 우리 손으로 뽑게 된 것이다. 장로 투표를 한 적도 있으나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무산되었었다.
8월 14일(주일) 공동의회가 열렸다. 세례교인 39명이 출석했다. 권사를 1명 선출키로 하고 투표한 결과 총 39표 중, 오안순 32, 홍혜실 2, 무효 4, 기권 1표였다. 오 집사가 총 투표자의 3분의2선(26표)을 넘어 권사로 피택된 것이다. 본 교회 창립멤버의 한 사람인 오안순 집사는 지금껏 궂은 일을 죄다 도맡다시피 해왔다. 부인회(여전도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역임하여 왔고 대내외적으로 활동이 지대했다. 보이는 곳에서보다는 감추인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조용한 평신도 사역자다. 오안순 집사의 권사 취임예배는 교회창립 5주년 기념예배와 더불어 77년 12월 4일(주일) 에 드려졌다.(사진 12)(표 11) 본 교회 초대목회자 장영춘 목사가 설교를, 직 전임자였던 임근하 목사가 기도 순서를 맡았다. 창립기념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어 모든 준비를 그 위원들이 나섰다.
 위  원  장   이성희 집사       접대위원   원윤팔 집사
 재정위원   김사현 집사       예배위원   이준무 집사
 안내위원   김정구 집사       봉사위원   김명순 집사
 섭외위원   김기태 집사

표 11
창립 5주년 기념예배 및 오안순 집사 권사취임식 예배순서

사진 12. 본 교회 초대 시무권사로 임직한 오안순 권사
The inauguration of the church’s first Kwonsa[Senior deaconess], Ahnsoon Oh.

임직받은 오안순 권사는 두상 투영기(頭上投影機:OHP)한 대를 봉헌했다.
Overhead Projector donated by the Kwonsa, Ahnsoon Oh

이렇게 하여 모든 행사가 잘 끝난 듯 보이나 내용은 문제가 많이 있었다. 사실 창립 제 5주년 기념예배가 8월에서 10월로, 10월에서 다시 12월 4일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게 된 것은 이희철 목사 위임, 이현호 장로 취임, 오안순 집사의 권사 임직 – 이 모두를 창립예배와 겸하여 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는데 여의치 못하자 권사의 임직만 함께 행하게 된 것이다. 창립예배 행사 주일로 잡은 D-day 12월 4일 바로 전 주만 하더라도 (1977.11. 27. 주보) “12월 4일에 오후 5시 창립5주년 기념 및 목사 위임식, 장로 권사 취임식을 거행하오니 위하여 기도하시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라며 광고가 나갔는데 그리되지 못하였다.
목사의 위임이나 장로 취임의 문제는 본 교회로서는 공동의회에서 이미 가부투표를 실시해 표결된 상태였다. 당시를 말하는 증인들은 사전 노회의 허락을 득하지 못하여 그리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두 분 이희철 목사와 이현호 장로는 종래 우리 교회와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쓰겠지만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일찍 소천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보(敎會報) ‘샤롬’지 창간

‘샤롬’. 우리 교회가 처음 발행한 교회보(敎會報) 제호이다.
샤롬(shalom)의 뜻은 평화 또는 평안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육체·정신적으로 무사하고 안전한 상태’를 일컫는다. 공동체가 경험하는 평안은 경제적 번영 (시 147:14, 38:11, 학 2:9 참조), 정치적 번영(왕하 20:19, 역대상 22:9, 사 32:18)을 포함한다. ((아가페성경사전((주)아가페출판사 편) 794쪽.)) 그런 의미에서 이 제호는 이민교회에 걸맞은 단어일 성싶다.
비 정기 간행물인 ‘샤롬’의 편집인은 청년회, 발행인은 담임 이희철 목사로 되어있었다. 창간호가 1977년 12월 4일 교회 창립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되었다. 이 샤롬지는 교회의 소식지일 뿐 아니라 문서 선교지요, 문예지인 것이다(표 12).

표 12
샤롬 창간호

 ‘77 이웃과의 유대 일지

1977. 2. 13     연세대학교 이대운 박사 본 교회 방문
1977. 3. 4.-6   미 동부 연합 전도대회(강사: 한경직 목사) 참가
1977. 3. 24-27 창립 5주년 기념성회(강사: 이호문 목사). 라더포드장로교회와  뉴욕 퀸즈장로교회 성가대를 초청, 지원받다
1977. 3. 27   청년회 주최로 조국강산을 아름답고 푸르게 가꾸기 위한 포플러 식수  모금운동 전개
1977. 4. 10     평신도연합회 주최  부활절 연합예배 참가(새벽 5시 30분 링컨 Park)
1977. 4. 17     뉴저지중앙장로교회(강세대 목사) 장로장립식 참가
1977. 5. 7     Little 야구 출전
1977. 5. 14     N. J. 한인회 배구대회  출전
1977. 5. 21     제일교회 탁구대회 출전
1977. 5. 22     총회 맹인 선교회 (총무 김선태 목사) 지원
1977. 5. 28     한국일보사 주최 축구대회 출전
1977. 6. 25     퀸즈장로교회 (장영춘 목사 시무) 건축기금 바자회
1977. 8. 2     성아 어린이 합창단  음악회  참석(장소 : 라더포드장로교회)
1977. 9. 24   뉴저지중앙교회 주최 청장년축구대회  출전(Brookdale Park, Brookfield)
1977. 10. 23   퀸즈장로교회 찬송가 부르기 대회 참가
1977. 10.28-30 뉴저지중앙장로교회(강세대 목사) 부흥회(강사: 이상근 목사) 참가
1977. 11. 4-6   라더포드한인장로교회 창립 3주년 기념성회(강사: 임영재 목사) 참가
그때 본국에서는
그해 5월부터 한-미 양국이 주한 미지상군 철수 문제를 공식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한국 교계에서 일기 시작했다. 5월 25일 영락교회당에서 긴급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미군 철수반대 대회에서 ‘주한 미 지상군 철수 반대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미국 연합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그리고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C)에 보냈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일동도 지미 카터 대통령과 연방 상원의장, 하원의장에게 결의문을 보냈다.
현정(現政)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본국 교단이 구국 일념으로 나선 것이다. 국내에서 이런 시국과 몸짓이 보이자, 우리 교회도 열심을 다하여 기도했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를 하나님의 장중에 두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였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결의문을 받아 여기 동조하는 미국 남장로회 총회와 미국 연합장로회 총회도 덩달아 결의문을 냈다. 여기에 남장로회 총회 결의문을 소개한다.
<미국 남장로교회 총회 결의문>
1977년 제 117차 미국 남장로회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우리는 선교 동역 교회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미군 지상군의 철수로 인해 올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가능한 결과들에 관한 관심의 표현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접수하며,
(2)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더불어 평화를 위해 일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며 우리의 공통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실한 삼상결속을 재확인하는 바이며,
(3) 미합중국의 대통령과 국회에 대한민국의 인권 사태에 대한 영향과 군사 충돌의 위협성을 상승시킬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특별한 고려를 하면서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 결정을 재고할 것을 요구키로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80주년 기념집(1912 – 1992/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편), 257쪽.))

1978년

교육의 해

1978년은 교육의 해로 정했다.
슬로건을 ‘잘 가르치는 교회, 잘 배우는 교인’, 표어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딤후 3 : 14)’로 정했다. 교육을 통해 교회부흥을 기하자는 뜻에서였다.
우선 제직의 교육부터 실시됐다. 1월 둘째 주 (1월 15일) 유태영 목사를 강사로 제직수련회가 열렸다. 주일 대예배 후에 갖는 수련회에서 제직 모두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갖게 됐다. 본 교회로는 두 번째 제직수련회였다. 교육의 진일보를 내딛은 그해에 제직수련회도 두 차례 열렸다. 3회 째는 ‘교회의 성장’이란 주제 아래 김병서 박사를 초청해 가졌다.
참된 교회교육을 위해, 우선 교사와 학부모의 연석회의부터 가졌다.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에 참여하여 일선 교사들이 자기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자녀 문제를 대화로 서로 풀어나간 것이다. 퍽 진지했으며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응도 고무적이었다. 우리 교회로서는 처음 갖는 ‘학부모 간담회’였다.
교육의 해였던 만큼 담임목사 자신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델 성서연구를 위하여 스토니포인트 수양관에 들기도 하였다. 자치기관들도 열성을 냈고, 여전도회는 이 목사를 강사로 수련회를 가졌다. 기관장 회의를 열어 별도 교육을 시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정한 교육을 위하여 교육위원회도 구성됐다. 수요기도회에서도 성경공부를 했다. 말씀과 기도 생활은 믿는 이들에게는 기본이 아니던가. 주일학교에서는 매주일 성경요절을 암송시키면서 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준비시키도록 주보에 알려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학습·세례

교회가 중흥의 물결을 타면서 학습자와 세례교인이 배출됐다. 귀한 열매를 맺게되자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온 교우들이 환호하며 축하를 아끼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우리 교회를 시무한 전 목회자들은 하나 같이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마다 성찬, 성례를 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외에도 적당한 시기를 택하여 그 성스러운 예(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흥의 물결을 탄 지금에는 더욱 그 뜻이 다르다하겠다.
이희철 목사의 집례로 1978년 2월 26일(주일) 학습을 받은 이는 인경실 씨, 수세자(受洗者)는 안재복, 하금순, 한원일, 권경자 4명이었다.

봄 대심방 시작

한국에서도 유행처럼 번졌던 것이 춘계 대심방이다. 하지만 이곳 이민생활에서는 유행이라고 부르기엔 언어도단에 가까운 절실한 문제였다. 1년에 한번 있는 봄철 대심방은 매일 밤 9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감안한 조치였다. 매주 주보에 주중 심방 대상 가정을 알려 미리 준비케 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대심방이다.
4월 11일(화)부터 시행된 봄철 대 심방 계획은 이러했다.
           11일(화) 이성남   오안순 양호식
           12일(수) 이재홍   홍무승 서태호   남궁 진
           13일(목) 양원길   한원일 장기호   김명순
           18일(화) 김송월   김사현   이기석   서광진
           19일(수) 원윤팔   이사원   민묘기   차종철
           20일(목) 김광조   이재실   윤정자
           25일(화) 하희도   인재복   조영수   고흥열
           26일(수) 박용길   유병국   곽영철
           27일(목) 김기태   강학자   김정구

정용자 전도사 부임

이처럼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차제에 교육전도사는 필수적이었다. 우리 교회로서는 처음 맞는 유급 전도사였고, 그나마 보직이 교육을 전담하는 전도사였다. 그해 5월 7일 정기 제직회에서 가결하여 한 주 만인 14일에 정식 부임했다. 정용자 전도사는 본 교회에서 약 1년 8개월 근무했다. 당시 교회학교 조직은 아래와 같았다. ((‘샤롬’(본교회 비정기 간행물) 제2호(1979년 4월 부활절특집) 11쪽서 인용.))
         지    도 정용자  전도사
         음악부장 이기석  집사 ((이기석: 현 새순교회(720 Summit Ave., Hackensack, NJ 07601) 담임목사. 2002년 대뉴욕지구한인교회주소록(뉴욕교협) 111쪽 참조.))
         반주 및 유치부 박병연  선생
         유년부 조용성  선생
         중등부 김면오  선생
         회  계 인경실  선생

전교인 성경읽기 운동 전개

전교인 성경 읽기를 전개했다. 분기별로 2, 3, 4월 제 1기, 5〜6월 제2기식으로, 성경 한 권을 분기별로 통독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1기 성경읽기반 중 신구약 완독자는 김명순(7주), 양영군(9주), 서태호, 김어금, 홍혜실(12주)이었다. 제2기 때는 김동희(14주), 이애순(18주) 제씨가 신구약을 독파했다.
1회 이상 완독한 이들도 있었다. 김명순(4회), 서태호(2회), 김어금(2회), 김혜숙(1회)등이다. 성경읽기 운동의 공식 기별 지도는 7월로 마쳤으나, 개인별로 계속 잘 마무리한 이들은 상을 받았다. 진 영, 안순익, 천갑엽, 계정숙, 이혜숙 교우들이었다.

성서지리연구회

우리 교회는 일찍이 70년대 말부터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이희철 목사는 이스라엘 성지에 관한 한, 당대 추종불허의 베테랑이었다. 워낙 그곳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지리연구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연구원생들을 인솔하여 성지순례를 다녀오곤 했다.
4월 정기 제직회에서 이 목사의 이스라엘 방문 허락을 받아 제1기 연구생들과 78년 5월 22일부터 29일까지 8일간 성지순례의 장도에 오른 것이 시초였다.

알뜰 살림꾼 여전도회

여기저기서 생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예가 여전도회 회원들의 활동이다. 제1회 여전도회 수련회와 바자회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바자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부흥회 때면 으레 여전도회의 조직적 활동이 돋보였다. 특히 강사에 대한 뒷바라지는 이들의 몫이었다. 당시의 여전도회 회의록을 들춰보자. ((당시 여전도회 회장이던 김어금 집사가 지금껏 간직했다가 본 교회 창립30주년을 맞아 본 역사편찬위원회에 내놓은 소중한 자료이다. 현재 교회 역사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1. 강사 목사님의 양복 손질 및 내의 세탁 – 홍혜실, 김어금
2. 물수건 및 음료준비 – 전인호, 박광자
3. 선물은 강사 목사님의 사모님 한복감 한 벌 – 홍혜실
뿐만 아니라, 성가대 가운을 여전도회 회원들이 모여 직접 만들기도 했다. 더위가 다가오자 겨울용 대신 여름 가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때 교회가 북새통을 이루며 편이 갈릴 때, 성가대 가운을 몽땅 갖고 나가버린 믿기 어려운 역사도 있었다.
기억에 담기조차 싫은 일들을 되새기며 회원들이 매일 김명순 집사 집으로 모였다.
오안순 권사가 재단과 주름장식(smocking)을 맡아하고, 전인호 집사와 정용자 전도사가 재봉틀을 내놓고 박았다. 점심때는 가끔 이희철 목사 사모가 냉면을 말아냈다. 저녁식사는 ‘가운공장’ 제공자인 김명순 집사의 몫이었다. 그밖에 이혜숙, 이애순, 이은자 집사 등이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그러기를 3주. 마침내 보기만 해도 시원한 성의를 성가대를 위해 주님께 바쳤다.

첫 여름 성경학교-하기수련회

그해에 교회학교(당시는 ‘주일학교’로 불렸다)가 여름성경학교를 개교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학부모들의 관심이 고조됐음은 물론이다. 중·고등부(부장 이주남) 하기수련회에는 학생과 부모가 연서로 서명 신청하여 동참할 수 있게 했다. 8월 11일(금)부터 14일(월)까지의 기간 중 교회탄생 여섯 돌이 되는 13일이 한가운데 끼어있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기에 온 교우들이 중·고등부 하기수련회에 찾아가 합석키로 했다. 야외예배를 겸한 창립 6주년 기념예배를 그곳 스톡스 주립공원에서 드렸다.
첫 하기수련회는 예정대로 잘 진행되어 자녀들에게 좋은 체험과 추억으로 남았다. 이희철 목사는 청소년 신앙훈련에 큰 도움을 준 교우들에게 “지정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와주신 학부모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그렇게 표현했다.
첫번 행사였기에 사후 학부모 연석 평가회도 가졌다. 대단히 좋았다고들 입을 모은 교우들의 좋은 의견들은 수렴해 두었다.

한글학교의 태동

한인들에게는 영어 외에 모국어인 한국어가 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알려면 그 말글부터 배워야 한다. 영어는 미국 공사립학교에서도 충분히 배우지만, 한국어는 따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고유한 우리네 전통과 역사와 문화를 자녀들에게 바로 알리려면, 아니 그러기에 앞서 자녀들과 올바른 의사전달을 하려면, 한국어부터 가르쳐야 함이 자명하다. 아울러 부모는 자녀의 심중을 알기 위해 영어를 한치라도 더 배우기에 힘써야 마땅하다.
그런데, 바쁘게 부대끼며 살아가기도 힘든 이민생활의 와중에 자녀들에게 일일이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무지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볼 시간조차 없는 데다 혹여 있다해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마 한글을 가르쳐야한다는 성화가 일기 시작했고, 교회학교에서 일 주일에 단 한시간이라도 가르쳐보자는 중의를 모았다. 1978년 9월 3일(주일)부터 한글교육이 실시됐다. 교회학교 각반 담임교사(당시는 ‘주일학교 반사’라고 칭했다)가 성경지도와 함께 이 일을 맡아 수고했다. 학부모들은 틈나는 대로 과제물을 지도했고 교사들을 격려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한글학교’라는 표현보다 ‘한국어학교’라 함이 옳을 것이다. 개념상으로, 전자는 한글 글자를 가르치는 학교, 후자는 한국의 말과 글을 통틀어 가르치는 학교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학교’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설픈 단계였다. 그저 “한국어교육을 시켰다”고 해 두자.
첫 번째 안수집사를 세우다
지난해에 우리 손으로 오안순 집사를 권사로 선임한 데 이어, 이 해에 안수집사를 뽑아 세우게 됐다. 원래 1978년 2월 26일 공동의회에서 3인의 안수집사를 선출하기로 하였으나 2인이 피택 되었으니 김기태, 이성남 두 집사이다. 그날의 주보를 보면,
 선출기준 : 1. 교회를 주일마다 잘 출석한 사람
            2. 십일조 헌금을 하는 사람
            3. 성경을 잘 읽는 사람
            4. 교회에 충성스럽게 봉사한 사람
            5. 행위가 복음에 합당하고 교우의 본이 된 사람
            6. 술과 담배에 인박히지 않은 사람
            7. 무흠교인 5년 이상 및 27세 이상인 사람
이라고 적혀 있다.  피택 안수집사의 약력을 소개한다.(표 13)
그들의 안수식은 78년 10월 22일 거행되었다(표 14)

표 13
집사 약력

표 14
집사 안수식 예배순서

수요 예배는 각 가정을 순회하며

새벽예배를 1주 1회만이라도 드려야 되겠다 결정하고 그해 10월 28일부터 매주 주일 6시에 드려졌다. 때를 같이하여 수요예배도 드리기로 하였으나 임대주인 미국교회의 허락을 못 얻어 수요예배를 화요일에 드리기도 하였다. 수요예배를 화요일에 모이었으니 “지금부터 화요예배를 드리겠습니다.”했을까, “수요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했을까. 아니면 “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했을까? 당시 주보에는 아래와 같이 광고가 나갔다. 퍽 오랜 기간동안 이렇게 하였다. 80년대에도 이렇게 했던 기록이 있다.

새벽 기도회 : 주일 오전 6시
삼일 기도회 : 화요일 오후 8시

자체 예배처소가 없어 미국인 교회에 세를 들어 있다는 것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갓 이민을 와서는 ‘서머 타임’ 실시와 해제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이 있는데다가 세를 들어 살림한다는 것은 미국인이 자기네들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하고 나머지 여유시간을 우리가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조정을 수시로 해야했다. 어부들이 물때를 맞추듯 퍽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런데다가 수요예배는 도무지 드릴 여건이 안되었다.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각 가정으로 순회하면서 수요 기도회를 갖는 것으로 했다. 이는 78년 11월 15일(수)부터 시작했다. 먼저 이희철 목사 사택에서부터 테이프를 끊었다. 구역예배와도 흡사했다.
매주 주보에 금주 수요예배 장소를 알리는 광고를 실었다.

교회 내 각종 대회

체육대회 말고도 교회 내에 여러 대회가 있어 화합과 질적 향상을 꾀했다.
8월 20일(주일)에는 각 구역대항 성경퀴즈대회가 열렸다. 범위는 창세기, 출애굽기였다. 구역별로 성경을 읽고 예행 연습을 하고 이러는 사이에 구역이 귀합되고 은혜스러운 교제의 장이 되었다. 추수감사절에는 성가대 주최 ‘가족창 대회’가 있었다. 지정곡은 찬송가 573, 324, 411, 480장 중 1곡 1절을 부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유곡 1곡을 불러 자웅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 행사야말로 ‘대회’라는 감각 없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주님 앞에 나아가 찬양을 드린다는 데 그 의미를 더했다.
미국생활에서 가족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각종 악기가 동원되고 이 구석 저 구석에 삼삼오오 가족들이 모이어 연습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어느 가정은 참석치 아니할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숱한 연습을 하고 만반의 준비가 끝난 가정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전 교인의 축제, 바로 그것이었다. 박수와 웃음이 절로 나는 즐거움이었다.

1979년

기도하는 해

전년도는 ‘교육의 해’였다. 이 해는 ‘기도하는 해’로 정했다. 그렇다고 어느 해는 교육만 하고, 어느 해는 기도만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해당연도의 주제에 역점을 두고 강조하여 환기시키자는 의도인 것이다.
‘기도하는 해’의 표어는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 : 24)’였다. 구체적인 기도 계획표가 만들어져 교우들에게 배포하고 기도를 꼭 실천하여 생활화하도록 독려했다.
기도 목표 : 기도로 능력 받자
             기도로 변화 받자
             기도로 축복 받자
기도생활 실천 방안
1) 교회 – 교역자 위하여
  각 기관 위하여
  교회 성장 위하여
  2) 이웃 – 전도 대상자 위하여
  고난 당한 형제 위하여
  교민 교회와 사회 위하여
  3) 가정 – 가족의 신앙 위하여
  직업과 사업 위하여
  가정의 성화 위하여
4) 자기 -믿음과 충성 위하여
  말씀과 능력 위하여
  헌금과 축복 위하여

1979년도 부서 조직

제 직: 이희철 목사
    이현호 장로
    오안순 권사  오순덕 권사(협동)
    김기태 집사  이성남 집사
   (서리집사)
    남자: 원윤팔  서광진  양호식  조광기  이기석  이재실 이주남  홍도열
     서태호  고흥열  이대영
    여자: 전인호  김명순  김어금  홍혜실  안순익  김순임
         * 위 서리집사 중 홍도열, 서태호, 고흥열, 이대영, 김수임은 신임.
         * 정주섭 집사 가정이 1978년 12월 24일(주일) 새교인으로 등록하였으나 이미 제직 구성이 끝난 상태여서 제직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제직회 부서 조직 :
전도부: 이성남  서태호  김어금  홍도열
봉사부: 오순덕  김수임  김명순  이재실  고흥열
친교부: 서광진  전인호  홍혜실  오안순
서무부: 이현호  이대영  안순익  조광기
재정부: 김기태  양호식  이주남  원윤팔  이기석
* 교통부는 폐지했다.
* 양호식 집사는 이사장을 겸임했다.
* 이재실 집사는 감사를 겸임했다.
* 3월 11일 부회계로 이기석 집사가 보선됐다.
* 이 제직회 부서는 전반기 부서이고, 7월1일부로 하반기 부서를 새로 짰다.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사:  박병연  김면오  조용성  인경실  이기석(음악전담)
기관장
  성가대장:     양호식 집사
유년부장 :    이성남 집사
중고등부장 :  이주남 집사
청년회지도 :  이재실 집사
구역장 : 제 1구역장  신봉춘  제 2구역장 계정숙 제 3구역장  정우경
         제 4구역장  조순절  제 5구역장  박광자

제 4회 제직 수련회

1979년 1월 14일(주일) 네번 째 제직 수련회를 가졌다.
단순한 연례행사로 그치지 않고 보다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제직, 기도하는 제직이 되자고 이희철 목사는 강조했다. 강사는 김남수 목사(순복음 뉴욕교회)였다.
다수의 제직들이 적극 참여하여 새로운 다짐을 갖는 기회가 되었다.

부흥성회, 다시 이호문 목사를 강사로

지난 해는 폭설로 인하여 부흥성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기필코 부흥회를 열자는 각오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김기태 집사, 준비위원으로는 이성남 집사(예배), 양호식 집사(서무), 서광진 집사(회계)등이 선임됐다. 3월 22일부터 3월 25일까지 부흥회를 개최키로 정하고, 2월12일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온 교우가 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수요기도회와 각 구역예배 때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준비위원의 요구사항을 마다하는 이가 없었다. 성가대도 나름대로 열성껏 준비했다. 믿지 않거나 은혜를 사모하는 이웃들을 꼭 데려오도록 거듭 강조했고 초청장, 봉투, 우표까지 비치해 놓고 있었다. 한 교인이 초청장을 3장 이상씩 의무적으로 발송하도록 권했다.
3년 전 창립 5주년 기념성회가 기억에 새로웠다. 당시도 강사는 이호문 목사였는데 퍽 많은 은혜를 받았다. 아마도 성이 덜 찼는지, 이번에도 같은 강사를 부르게 된 것이다. 아무려나 모두 하나되어 받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철저히 준비하였으니 그 천국잔치가 배부르지 아니할 턱이 있겠는가. 전 교인이 흡족한 은혜의 용광로에 빠져들었다. 쉬 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같은 시간에 4세〜14살 또래들을 위한 ‘어린이 부흥회’도 아래층에서 겸하여 열렸다. 미국 어린이전도협회에서 맡아주었다.

‘샤롬’지 제 2호 발간

1977년 창립 5주년 기념호로 창간된 ‘샤롬’지가 금년 부활절 기념호로 제 2호가 4월 15일에 발행 되었다.
‘샤롬’지 제 2호 표지에는 그해가 ‘기도하는 해’이었음을 주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부활을 상징하는 듯 아침햇살이 강하게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사진을 곁들였다. 편집인이 직접 펜으로 쓰고 삽화를 그려 넣고 사진도 넣었다. 인쇄는 아마도 복사기로 복사한 듯 하다. 화보에는 이전 해 5월에 다녀온 성지순례 사진과 8월에 있은 중·고등부 하기 수련회 사진을 게재하였다.
여기에 샤롬 제 2호 5쪽에 실린, 젊은이의 애환을 그린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젊은이들의 기도

                           유정임 ((유정임: 현재 본 교회 집사. 장기순 권사의 큰딸. 유정환 집사는 오빠, 유정순 집사가 동생이다. ))
오늘도 창밖에,
별빛은 빛나고 있습니다
두손들 모으고
하루의 무사함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외로운 이때에
우리맘에
친구가 되신 주여
슬픈 이때에
위로를 주신 주여!
이국땅에
남모를 고통의 멍에를 짊어진
젊은이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이 고통은 한순간.
지금은 캄캄한 밤이 오나
우리주 오시는 날
고통의 멍에는 사라질 것이요
일출의 광명은 빛날 것이라
우리 모두 나가
찬송하며
신랑되실 주님
반기리 옵니다

부활절 성례,성찬식

그해 사순절 기간을 거룩하고 의미 있게 보냈고, 부활절도 오래 전부터 기도로 준비했다. 부활절을 기하여 신앙지도 발간됐다.
4월 22일 부활의 아침이 밝았다. 부활주일에는 특히 유아세례가 처음으로 거행됐다. 성찬식도 거행돼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했다. 부활절 학습 세례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학 습 : 김귀남  유정임  김영옥  김은숙
세 례 : 진상권  조용성  강윤정  윤순형  이운봉
아 기 : 이신호  이태진  이요한  조에리사

계속되는 성지순례

이 해에도 전년도에 이어 성서지리연구회 연구생들을 대동하고 이희철 목사가 이스라엘을 순방했다. 79년 5월 13일 정기 제직회에 이 안건을 내놓아 통과됐다. 성지순례 기간은 5월 21〜31일 10박 11일간이었다. 전 해보다 2일 늘린 것이었다. 참석자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담임목사가 공석중인 때에, 마침 이성남 집사의 부친 이관영 목사(서울 남서울교회시무) ((이 목사는 실로 목회자 가족을 이루었다. 장남이 이용남 목사(서울 월계동 소재 장석교회), 2남이 이충남 목사(뉴욕그레이스장로교회/201-03 29 Ave., Bayside, NY 11360)이며, 삼남 이성남 장로(부인 안순익 권사)는 현재 뉴욕그레이스교회에 출석하고 있다(2002년 4월19일 안권사에게 전화 확인).))가 방문을 와, 몇 주간 설교를 담당해주었다.

이현호 장로, 괴한의 총격에 숨지다

1979년 5월 23일.
청천벽력(靑天霹靂)이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정말이지 맑게 갠 날, 날벼락이었다. 아니 그날은 비가 내렸다. 브루클린에 있는 이현호 장로의 상점에 웬 괴한이 들었다(안순익 증인에 따르면 그 가게는 이 장로가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가게였다).
그날 낮 2시경. 괴한의 총탄을 맞은 이 장로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내 하늘나라로 오르고 말았다. ((서광진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현호 장로는 사고 즉시 인근 브루클린 병원으로 후송된뒤 사망했고, 시체확인을 내가 했다(2002년 4월 11일 녹취).)) 우리 교회의 큰 별 하나가 진 것이다. 설립 후 지금껏 우리로서는 오직 한 사람 간직해온 장로가 우리 곁을 총총히 떠나간 것이다.
대예배 때마다 늘 은혜로운 기도로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교회행정과 치리 면에서 늘 귀감이 되어왔다. 우리 교회와는 제1회 제직 수련회 강사로 와서 ‘미국 연합장로교의 헌법’ 해설을 강의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 그후 우리 교회뿐 아니라 온 교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바로 한해 전 4월에는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국제기드온대회 초청강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직도 한참 앞장서서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그가 앞서 떠나다니 정녕 우리 사람으로서는 모를 일이다. 교우들은 이 장로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때마침 이희철 목사는 성지순례로 부재중인데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제직회 서기 김기태 집사가 고인의 자택에서 긴급 임시 제직회를 소집했다. 한결같은 애도의 심정으로 교회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장례위원(김기태·이성남·서광진·양호식·홍도열)을 정했다. 담임목회자가 출타 중이었기에 모든 집례와 절차는 길웅남 목사(뉴저지연합교회)에게 의뢰키로 했다.
그러나 ‘장례 위원’들이 정작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많은 교인들이 자기 가게문을 닫고 달려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제반 일을 도왔다. 5월 27일(주일) 온 교우가 묘소를 찾아가 하나님께 예배 드렸다. 하나 고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끝내 시무장로로 취임하지 못한 채 별세한 그였다. ((본서 후미 부록 중 제직회의록 1978년 7월9일자 7항, 1978년 10월1일자 5항 A 참조.))
서광진 증인은 고인을 이렇게 추억한다(2002년 4월 11일 녹취),
“이 장로님 그분 참 실력이 있던 분입니다. 그 양반이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동노회에 상신했더니 장로고시를 치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분은 인천제일교회에서(곽선희 목사, 이희철 목사가 부목사로 있을 당시) 이미 장로로 장립, 시무하다가 도미하였기에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시험을 치른다해도 능히 합격할 분이었고요. 문제는 그분 말대로 ‘시험을 치르라면 치르겠는데 왜 나만 유독 시험을 치르라는 게냐? 그렇다면 이민 온 다른 장로나 새로 부임하는 목사들도 다 시험을 패스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응시를 거부했기에 그리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 이현호 장로는 퍽 박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창립 7주년

8월 둘째 주에 교회창립 7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해 창립 7돌을 기념하여 밴(van)을 한 대 구입하기로 하고 특별헌금을 했다. 그밖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었다면, 창립7주년 기념예배 주보의 ‘교회소식’난이었다.
오늘은 본교회 창립 7주년 기념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여 주심을 감사하고 7년 전 사일러스 콘틱트 파크에서 창립예배를 드린 선배교우들의 노고를 감사합니다.
창립 당시에 계신 교우 중에 오안순 권사님, 이성남(안순익)집사님, 양호식 집사님 그리고 이성희 집사님이 지금 남아 계십니다.
7주년 기념예배의 집례는 양호식 집사가, 대중기도를 오안순 권사가 맡아했다. 그후 23년이 지나 창립30돌을 맞는 지금, 공교롭게 당시 그 순서를 맡았던 양호식 집사(현재 시무장로)와 오안순 권사(현재 은퇴권사) 두 사람만 역사의 산 증인—‘지킴이’로 남아있다.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1978년 8월 6일에는 전 한인회장을 지낸 김상진 교우가 자동등사기(Gestetner)를 교회에 기증했다. 79년 4월에는 이기석 집사가 탁구대 1점을 헌납했다.
그런가하면 원윤팔 집사네가 화재를 당해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전달하였더니, 79년 9월 16일, 그 돈을 죄다 도로 싸들고 교회로 와서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원 집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보다 빨리 복구되었다”고 했다.

이희철 목사의 사임

우리 교회는 역대 담임목사를 도대체 몇 대까지 세어나가야 하는 걸까? 폐 일언하고 이 목사가 제직회 서기인 조광기 집사에게 1979년 8월 30일자로 띄운 서한부터 살펴보자.(표 15)

표 15
사직 서한

제직회 서기인 조광기 집사는 위의 편지를 들고 9월 정기 제직회에 들어가 편지를 내놓았다. 임시 사회를 김기태 집사가 맡았다. 편지 내용과 같이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작정했다는 사표의 수리 여부를 무기명 비밀투표에 부쳤다. 결과는 총투표 14표, 가 6표, 부 7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사표를 반려키로 하였다. 당시 제직회의록에 의하면 사표반려위원을 뽑아 파송키로 하고 위원에 이대영, 김수임, 오순덕, 조광기 등 제씨가 선임되었다. 사실 제직회에 14명이 참가하여 이 목사의 사표를 받자고 하는 제직 6명이 있었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일 만은 아닐 것 같다. 하기사 이 목사의 잦은 출타도 그 이유중 하나일 수 있었다. 그해 이 목사의 출판일지를 보면,
5월 21 – 31일   목회자들 성지순례인솔 (기간중 이현호 장로 별세)
6월 12일   교회협의회 (뉴욕 감리교회)
6월 22일 – 27일   제 9회 동노회(카나다 토론토)
7월 16일 – 21일   이스라엘
7월 31일 – 8월 2일   한미교육지도자회의 (미 장로교 수양관)
8월 20일   기도차 입산
위의 그해 출타일지 중 공적(公的)이고 부득이한 출타야 어쩔 수 없지만 특이할 것은 성지순례요, 특히 일부 교인은 그 일을 원치 않아 만류하였으나 그는 이스라엘로 떠났고 기간 중 이현호 장로의 급사로 인한 충격이 또한 적지 않았다. 여하튼 이 목사를 찾아 만난 사표반려위원들도 이 목사의 ‘한국행’ 결심을 읽고, 다음 주일인 1979년 9월 9일 임시 제직회를 열어 사표 수리를 가결했다.
때를 같이하여 1979년 3월 11일 제직회 부회계로 보선된 이기석 집사가 그 직을 사직하였으나 차기 담임목사에게 위임키로 하는 일도 있었다. (그후 이기석 집사는 양호식, 이성남 두 집사가 방문하여 권면하였으나 이미 뉴욕 순복음교회에 등록하여 성가대원으로 있어 사표를 수리하였다.)
1979년9월 9일 (주일) 이희철 목사 송별예배에 미주 동노회 노회장 최이열 목사, 서기 김용주 목사 등이 본 교회를 방문하였다. 예배를 마친 후 임시 제직회를 소집하였다. 최이열 목사는 본인이 우리 교회 임시 제직회장이라며 인사를 하였다. (표 16. ‘미주 동노회 공문서’ 참조)
이희철 목사는 1979년 9월 16일 송별예배를 끝으로 본 교회 3년 4개월간 제5대 담임목사로서의 시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떠났다. ((이 목사는 그 후 한국에서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에 재 입국해 체류하던 중 뉴저지 북부 Route 17 도로선상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다고 전해진다(2002년 4월 11일 서광진 장로 증언 녹취).))

표 15
미주 동노회 공문

다시 후임 목사 청빙을 위하여

다시 후임 목사 청빙을 위하여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목사님 청빙’이라는 제하의 신문 광고도 냈다.
이토록 목사 청빙을 신문에 내기도 하였지만 일각에서는 현재 전도사로 있는 김종혁 전도사가 계속 담임목사 대행을 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때 정식으로 임직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서광진 증인 2002. 4. 11 녹취)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교회에 대하여 평판이 좋을 리 만무하거니와 더더욱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도 남음이 있는 터다. 그러니 자체에서 해결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하겠다.
매주 주보에는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교우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를 바랍니다’라고 ‘교회 소식’ 난에 자주 오른다. ‘훌륭한 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기도하자 할 법도 한데 그게 아니라 ‘새로운 목사님’이라고만 한 것에서도 어떤 느낌이 와 닫는다.
전임 목사님이 지난달에 떠나셨는데 청빙위원회는 아직 이렇다할 진전이 없었나 보 다. 제직회가 열려도 몇몇 이력서 접수상황 외에는 별다른 보고가 없다. “박희소 목사 가 추천하는 목사가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담임목사가 공석인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1979년 10월 28일 주일에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순각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듣게 되었다. 11월 정기 제직회에서 제직 만장일치, 이순각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것을 결의하였다. 제직은 물론, 많은 교인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 뜻이 곧바로 이순각 목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이순각 목사가 김기태 집사에게 부임할 의사가 없음을 전화로 알려왔다. (* 편찬자 주 : 실명(實名)을 써서 송구스럽다. 본지 후미 ‘생생한 기록들’ 편에 실명이 나오기에 그대로 썼다. 넓은 해량을 바란다.)
훌륭한 목자를 모신다는 것은 생업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생업을 전폐하고 서광진 집사는 자기가 자동차를 낼 터이니 같이 시카고에 가서 직접 만나 종용해 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김기태, 이성남, 서광진 세 집사가 서광진 집사의 자동차에 동승하고 시카고로 향하였다. 만났다. 그러나 실패였다. 어쩌면 이 목사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 교회가면 힘들어, 가지마’하는 소릴 들었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지금 내가 맡아 먹이는 주님의 어린양들이 있는데 이를 어찌 버리고 갈 수 있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선뜻 “노(No) !”라고 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런 일을 여러 차례 겪고 보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판단이 서기도 했다.
이러구러 감사절과 성탄절 그리고 연말이 다가온다. 목회자 공석이 3 개월 째인데 교인들의 결집력은 약해가고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도 새 성전으로

하지만 “이 교회에서 떠나거라”는 말이 불거진 지 퍽 오래였는데 그간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새 성전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미국 이민교회가 겪는 전철이려니 하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일들이었다. 잦은 목사의 이동, 교회를 빌려쓰는 서러움 – 이런 시련들이 정녕 우리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겠지 하며 믿고 싶은 마음이 너나 없이 앞설 뿐이다.
1979년 11월 4일부터 새로 빌린 Jersey City에 1907년도에 세워진 Evangelical Free Church 성전을 빌려 그곳으로 이사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 교회로서 네 번째 예배 처소의 주소는 아래와 같다.(사진 14)
155 Vroom St., Jersey City, N J 07306

그해 추수감사절(1979년 11월 25일)예배는 새로 마련된 예배처소에서 드려졌으니 더욱 감사한 일이다.

사진 14. 본 교회 제 4 예배처소이다. 복음자유교회(Evan-gelical Free Church)를 임대하여 79. 11. 4.부터 지금의 팰리세이즈 파크 본당으로 이전하여 오기 바로 전까지 그곳에서 예배드렸다. 

 The fourth past location of the church at the Evangelical Free Church from November 4, 1979 until the church was relocated to the present location in Palisades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