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3) 과도기(1976-1979) | Transitional Period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르고
1976년 새날이 밝았다. 그해 1월 4일 (주일) 정기 제직회에서 작년도 결산과 신년도 예산안을 상정해 놓고 심의하면서, 목회자 사례를 금년부터는 1년 12개월에다가 두 달치를 더해 14개월 사례비를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이 예산안에는 또 교육비, 선교비 등이 신설됐다.
1월 17일 (토요일) 저녁시간에는 제직들이 모여 교회 운영 전반에 관한 좌담회를 가졌다. 교회가 생동하는 듯 했다. 1976년도 새 제직회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서 기 : 김정권 집사 부서기 : 이한봉 집사
서무회계 : 양호식 집사 재무회계 : 이성희 집사
임근하 목사 돌연 사임
임근하 목사의 자택 이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교인들 중 더러는 전년도 11월초부터 임 목사가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교회를 섬겨주기 바라던 터였다. 당시에도 임 목사는 “가정 형편상 그럴 수 없다”고 피력했었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위원들을 뽑아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결사’들이기엔 역부족이었다.
1976년 2월 22일(주일) 오후 2시, 임 목사는 임시 제직회를 소집했다. 개회를 선언한 그는 봉투 한 장을 내놓고 냉큼 나가버렸다. 제직들은 닭 쫓던 개처럼 멀끔해졌다. 하릴없이 제직회 서기 김정구 집사가 임시 제직회장이 되어 사회를 맡아 문제의 봉투를 열어봤다. 사직서였다. 갑론을박 2시간 여 토론 끝에 사표가 수리됐다. 임 목사는 1975년 7월 27일 부임하여 1976년 2월 22일 사임한 것이다.
당회는 여태 형성되지 못했다지만 제직회만은 존속해 있었으니, 역대 제직회 ‘임시회장’들을 추스려봄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회자들이 들고 날고 했던 것이다. 또 다시 졸지에 목자를 잃은 ‘고아’들. 어느 한 구석 제대로 돌아가는 부서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목사 청빙위원회
때를 가리지 않고 무책임하게 들썩이는 지도자.
양떼를 돌본다더니 후딱 하면 지팡이를 던지듯 사표를 내던져버리는 ‘목자’들.
그들 때문에 교회가 이다지도 빈번히 상처받고 방황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교우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자괴감 마저 들기도 했다. “이번만은…”, “이번 목사님만은…”하며 기대 속에 모시고 또 모시고 했지만, 안타까움과 어처구니없음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이 우리 교회를 연단시키겠거니’ 하는 생각이 제직들 간에 스멀스멀 일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이제는 심사숙고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는 차기 담임목회자를 모시기까지 설교강사 초청에 따른 제반사와 후임목사 청빙을 위해 ‘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정권·차종철·이성희·이성남·김정구, 다섯 집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였다.
되풀이되는 회의, 조급함
목자 잃은 양들은 후임목사 청빙위원들을 뽑아놓고 그들의 활동만 눈여겨보고 있는 상태였다. 제직회는 계속 임시의장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으나 별다른 안건이 없었다. 그저 청빙위원회의 간단한 경과보고만 들을 뿐이었다. 후임목사 사례비 월 800불 이내에서 청빙하도록 하자는 결의가 고작 안건이라면 안건이었다.
그러던 4월, 정기 제직회가 역시 임시의장에 의하여 열렸다. 청빙위는 잠정적으로 본 교회 제 5대 담임목사로 이희철 목사를 청빙키로 하고 기도 중이며 구체적인 것은 결과에 따라 임시 제직회를 열어 다시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1976년 4월 18일 회의실에서 임시 제직회가 열렸다. 안건은 이희철 목사 청빙에 대한 가부를 묻기 위한 공동의회 개최의 건이었고, 결정된 사항은 그 다음 주일(4월 25일) 임시 공동의회를 열어 청빙투표를 하기로 했다. 이 공동의회의 임시의장은 곽영철 집사가 맡기로 했다.
창립 3년 8개월만에 5번째 목사
교회 등록과 이사회 구성
4월 재정보고서
주일 | 주일헌금 | 작정헌금 | 감사헌금 | 주일학교 | 계 |
4 | 36.95 | 74.00 | – | 60.00 | 170.95 |
11 | 45.10 | 114.00 | 25 | 5.21 | 189.31 |
18 | 22.35 | 45.00 | 420.00 | – | 487.35 |
25 | 21.65 | 155.00 | 155.00 | 6.50 | 338.15 |
계 | 126.05 | 388.00 | 660.00 | 11.71 | 1,185.76 |
내용 | 금액 |
목사님 사례 | 600.00 |
목사님 초청비 | 50.00 |
교회사용료 | 100.00 |
성가지휘자 | 50.00 |
반주자 | 40.00 |
침대 | 250.00 |
Apt Deposit | 205.00 |
Tel Deposit | 50.00 |
Apt Rent & Key | 112.50 |
다과비 | 55.18 |
미입금(약정) | 80.00 |
계 | 1,592.68 |
3월 이월액 | 1,932.93 |
4월 입금액 | 1,185.76 |
4월 지출 | 1,592.68 |
4월 현잔액 | 1,526.01 |
재정보고는 이런 양식에 의하여 매월 제직회때 마다 서면 보고되었다.
베델 성서연구
이희철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시작된 것은 퍽 고무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당시 많은 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다면 번졌다고 여길 수도 있을 베델 성서연구이다. 그림이 포함된 별도 교재를 가지고 신구약으로 나뉘어 성경을 체계있게 배우는 시스템이다.
제직과 일반 교인은 물론 이웃들도 임의로 참여하도록 문을 열어 놓고 연구생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청년회 발기 총회
1974년도에도 청년회의 발족을 위하여 위원을 선정하고 준비하였었다. 이것은 여전도회와 동시 발단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전도회는 발기 총회가 당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임원도 선출하여 정식으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청년회는 나이 구분에 퍽 애로가 많았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고 발족된 근거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기존했던 것은 사실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청년회의 창립’이라는 용어를 써서 청년회도 현실화하기에 이른다. 나이 많은 이들은 빼기로 했다. ‘헤쳐 모여’식으로 일단 기존 청년회를 해체하고 재편성하되, 대상자를 고등학교 졸업생 이상 25세 이하의 미혼 남녀로 범위를 좁혔다. 그렇게 해서 효과의 극대화를 꾀했다.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이 모여(어느 잡기에 의하면 8명이 모였다고 되어 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신임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김면오 부회장 김혜옥 서기 조명순 회계 원혜숙 부회계 권희종
1976년 6월 27일부터 청년회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10명이 출석하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마치고 나서 점심 식사 후 헤어졌다.
재기와 중흥을 향한 발돋움
이희철 목사 부임을 계기로, 교회 주보 제작부터 종전 방식에서 일신했다.
표지에 성화가 든 주보용지를 시중에서 구입해 본문을 타이핑하고 복사해서 만들었다. 따로 예산이 없었으나 예비비에서 서무비로 전용하여 쓰도록 허락됐다. 예배순서만 덜렁 들어가 있던 이전 주보보다 내용도 충실해졌다. 예배순서, 교회소식, 지난주 통계 등이 게재되어 제법 주보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예배시간도 재조정 됐다. 미국교회당을 빌려쓰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쓰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7월 셋째주일부터 8월말까지는 오전 10시30분부터 예배를 드리는 등 수시로 형편에 맞추어야 했다.
그 즈음은 창립 네 돌을 앞둔 때였다. 그렇긴 해도 그다지 기쁜 마음들이 아니었다. 수난과 격동의 나날 속에 찢길 대로 찢긴 심령들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아 뻑적지근한 잔칫상을 차릴 손가.
다음해 5주년 때는 그래도 보암직한 행사를 가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고 이번만은 대내적으로 조촐하게 지내기로 했다. 8월 29일 주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온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식사 경비는 제직들이 부담하였다.
당시 한인교회들의 특징이라 할만한 것이 잦은 야외예배였다. 식구가 단출하기도 하려니와, 한국에서 찌든 가난의 때를 여기서 벗겨본다든지 자연을 맘껏 만끽한다는, 보이지 않는 자긍심과 우리만의 시간으로 가꿔보고 느껴보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본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주 야외예배를 가졌다.
이웃 교회와의 유대 또한 굳어져 갔다. 몇 안 되는 한인교회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그해 10월 17일에는 새로 부임한 이희철 목사의 집례로 성찬·성례식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집례를 도울 장로가 한 사람도 없어, 이웃 뉴저지 연합장로교회의 이현호 장로를 초빙하여 도움을 받았다(이 일을 계기로 이 장로가 본 교회로 옮겨오기에 이른다).
또 이웃 제일교회의 성전 헌당식에 20달러 상당의 화환을 보내고, 많은 성도들이 헌당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축하해줄 것을 광고하기도 했다. 이희철 목사가 목회자로 부임하고 나서는 서서히 중흥(中興·쇠하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의 물결을 타는 것이 역력했다.
교회 재정에서 50불을 지원해 치러진 성가대 주최 교회 내 탁구대회는 성가대원들을 결속시킨 것은 물론 온 교우들의 화합의 장이 되고도 남았다. 청년회도 여러 행사를 통해 활성화되어갔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제 위치를 지키고 교회에서 생활하며 교회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해 연말은
추수감사절에는 감사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 학생들의 찬양순서 등 축하행사를 가졌다. 그리고는 저녁식사를 전 교우들이 한 자리에서 나눈 뒤, 전례 없이 “성지순례” 슬라이드를 관람하였다.
연말에는 성가대를 위하여 200불, 주일학교에 150불을 지급하여 자축하게 했다. 이런 작은 일들이 촉매가 되어 교회 부서 부서마다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해 연말에는 이성희 집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예산위원회(위원: 회계2인·서광진·김기태·곽영철 집사)를 조직하여 차고 넘치는 예산을 짜도록 했고, 이듬해 3월에는 인천 숭의 감리교회를 시무하는 이호문 목사를 초청하여 대 부흥회를 갖기로 구상해 놓았다.
성탄절에는 선물교환 등 축하행사 일체를 청년회에 일임했다. 왜 진작 그런 기회를 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것일까 의구심이 갈 정도로 그들은 은혜롭게 해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기로, 그해 겨울은 다른 해 겨울 보다 덜 추웠던 것 같았다. 특히 더 훈훈하고 인상적인 모임으로 성탄축하 연합예배를 손꼽을 수 있다. 뉴저지 한인기독교평신도연합회 주최로 12월 25일 7시 30분 뉴져지제일교회에서 드려졌다. 이 행사에서 본 교회 담임 이희철 목사가 설교를 맡아 ‘마리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했다.(표 9)

표 9 성탄축하연합예배
제직 활성화
특히 ‘미국 연합 장로교회 헌법 해설’을 맡아 강의한 이현호 장로는 18쪽에 달하는 교재를 준비하여 제직들에게 나눠주고 열강을 했다. 그 교재 내용 중 ‘교회’라는 부분을 여기에 싣는다.
교 회
미국 연합장로교 헌법이나 우리 한국 교단의 헌법을 보면 원래 “교회”란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자기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한한 은혜와 지혜를 내심을 알 수 있으며 이 “무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한다. 즉, 이 “무리”가 하나님의 “교회”요,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로서 이를 가르켜 “거룩한 교회”라고 한다.
교회의 종류
그러나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라 한다. “무형교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요, “유형교회”는 전세계에 산재한 교회이다.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로서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교제하기 어려우므로 여러 곳에 “지 교회”를 설립하여 갈라디아서 1장 22절에 있는 말씀과 계시록 4장 20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 무리와 그 자녀들이 저희들의 바라는 대로 일정한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결하게 생활하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키 위하여 성경의 교훈과 교회 정치에 의하여 공동예배로 모이며 이것을 “지 교회”라고도 하고 “지 교회의 집회”라고 한다.
지 교회의 설립
이상과 같이 공동예배로 모이는 “기도소”에 입교인 15인 이상이 있어 지교회를 설립코자 하면 그 지역의 “노회”에 청원하여 승인을 받아 설립을 한다. 그것을 “지 교회”라 하며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를 “미 조직 교회”라고 한다.
(후략)
아울러 여전도회도 심기일전
신년을 맞이하여 여전도회도 새로운 각오로 새 일꾼을 고르고 이 중흥의 물결에 올랐다.
회 장 오안순
부 회 장 김어금
서 기 이애순
회 계 김동희
봉사부장 양광자 ((양호식 집사(현재 장로)의 부인. 현 시무권사. 이하 ‘박광자’로 표기.))
미 동부 전도대회, 강사 한경직 목사
당시에는 미 동부 쪽 한인교회들 전체가 영적으로 불붙는 양상을 보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 동부노회가 주최하고 뉴욕교협이 후원하는 대규모 전도대회가 1977년 3월 4일〜6일에 한경직 목사를 강사로 성대하게 열렸다. 장소는 플러싱에 있는 뉴욕연합장로교회였다. 표어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로 내걸었다.
미 동부지역 교회들이 총망라해 참석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서를 맡아 참여한 지교회만 봐도 집회규모와 출석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그 시절에는 어떤 교회들이 있었으며 목회자들은 누구였는지 한번 되새겨 보는 의미에서 당시 순서를 맡은 교회(목회자)들을 열거해 본다.
3월 4일 (금) 저녁 7시 30분
장석진 목사 뉴저지 한인 성결교회
김규환 장로 라더포드 한인 장로교회
정달빈 목사 스탠튼 아일랜드 한인교회
홍대윤 장로 뉴욕 동부교회
선윤경 목사 대 뉴욕 한인 교역자회 회장
최원범 집사 전도대회 독창자
3월 5일 (토) 저녁 7시 30분
김용주 목사 라더포드 한인 장로교회
이은수 목사 부롱스 동산 교회
장영춘 목사 Queens 장로교회
박재영 목사 뉴저지 제일 한인 교회
유태영 목사 대 뉴욕 한인 교회 협의회장
3월 6일 (주일) 오후 3시 30분
김권석 목사 미주 동부 노회장
안창의 목사 Queens 중앙교회
정영규 목사 뉴욕 제일 장로교회
장승칠 목사 뉴욕 선교교회
염석규 장로 한민교회
한진관 목사 Queens 한인교회
3월 6일 (주일) 오후 8시
박희소 목사 뉴욕 동부교회
이희철 목사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김병서 목사 후라싱 한인 제일 교회
김해종 목사 뉴저지 연합교회
서상복 장로 Queens 한인교회
지관순·백예원 목사 뉴욕 연합 장로교회
초기 세 번째 장로
1977년 1월 18, 19일 이틀간 본 교회에서 있은 제1회 제직수련회 때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해설’을 맡아 강의하였던 강사 이현호 장로 ((이현호: ‘초기 제3번 장로’. 1979년 5월23일 백주에 본인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괴한에게 피격, 소천했다.))는 우리 교회 ‘초기 제 3번 장로’였다. 그는 1977년 3월 6일 정기 제직회에 ‘이명증서’를 내놓았다. 그 당시 이명증서를 챙겨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기야 헌법을 해설하고 강의까지 할 수 있었음에랴.
그날 제직회는 일사천리로 이렇게 결의하였다.
<다음 주일인 3월 13일에는 공동의회 소집을 광고하고, 그 다음주 3월 20일에는 공동의회를 열어 시무장로 투표를 하고, 4월 3일 주일에는 시무장로 취임식을 행한다.>
아무튼, 일단은 제직회에서 정한 바대로 3월 20일 오후 2시 본당 예배실에서 공동의회가 열렸다. 세례교인 32명이 출석했다. 무기명 투표를 실시한 결과 가(可) 31표, 부(否) 1표로 투표수의 3분의2이상 득표로, 이현호 장로가 본 교회 시무장로로 당선되었음을 제직회장 이희철 목사가 선언했다.
여기까지는 순항이라면 순항이었다. 그러나 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나 할까. 정작 법을 익히 알만도 하련만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시무장로를 세우려면 사전에 노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본 교회는 아직 노회에 가입되어 있지 아니한 실정인지라 노회의 사전 허락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를 모르고 이현호 장로를 본 교회 시무장로로 허락해 줄 것을 품신하였으니, 노회에서 승인해 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었다. 이현호 장로는 본 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다른 장로가 없는 터라 그가 주일 대 예배 대표기도를 줄곧 맡아했다.
창립 5주년 기념성회
전기한 바와 같이 4주년 되던 해에는 별 기념행사가 없었으나, 5년째에는 좀더 각성하고 은혜가 충만한 행사들을 대대적으로 준비해 보자고 입을 모아왔었다. 그리하여 연초부터 매주 주보 상단에 “창립 5주년을 영광스럽게”라는 표어를 네모 속에 담아 올렸을 정도였다. 전년도 말 계획했던 대부흥회도 ‘창립 5주년 기념성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성회기간은 1977년 3월 24〜27일 나흘간이었다. 표어는 “지금은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고후 6:2)”, 강사는 이호문 목사(인천숭의감리교회)였다.(사진 11)
사진 11. (좌)창립 5주년 기념성회 (우)기념성회 강사 이호문 목사
The picture of congregation members (left) and the guest speaker, Rev.Homoon Lee(right), after having the revival worship in commemorating the 5th anniversary of the church.
“여기서 당장 나가주오!”
5월의 체육행사
중·고등부 조직
전교인 전도요원화
미주 동노회 가입
우리 손으로 처음 뽑은 오안순 권사
이렇게 하여 모든 행사가 잘 끝난 듯 보이나 내용은 문제가 많이 있었다. 사실 창립 제 5주년 기념예배가 8월에서 10월로, 10월에서 다시 12월 4일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게 된 것은 이희철 목사 위임, 이현호 장로 취임, 오안순 집사의 권사 임직 – 이 모두를 창립예배와 겸하여 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는데 여의치 못하자 권사의 임직만 함께 행하게 된 것이다. 창립예배 행사 주일로 잡은 D-day 12월 4일 바로 전 주만 하더라도 (1977.11. 27. 주보) “12월 4일에 오후 5시 창립5주년 기념 및 목사 위임식, 장로 권사 취임식을 거행하오니 위하여 기도하시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라며 광고가 나갔는데 그리되지 못하였다.
목사의 위임이나 장로 취임의 문제는 본 교회로서는 공동의회에서 이미 가부투표를 실시해 표결된 상태였다. 당시를 말하는 증인들은 사전 노회의 허락을 득하지 못하여 그리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두 분 이희철 목사와 이현호 장로는 종래 우리 교회와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쓰겠지만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일찍 소천하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보(敎會報) ‘샤롬’지 창간
‘샤롬’. 우리 교회가 처음 발행한 교회보(敎會報) 제호이다.
샤롬(shalom)의 뜻은 평화 또는 평안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육체·정신적으로 무사하고 안전한 상태’를 일컫는다. 공동체가 경험하는 평안은 경제적 번영 (시 147:14, 38:11, 학 2:9 참조), 정치적 번영(왕하 20:19, 역대상 22:9, 사 32:18)을 포함한다. ((아가페성경사전((주)아가페출판사 편) 794쪽.)) 그런 의미에서 이 제호는 이민교회에 걸맞은 단어일 성싶다.
비 정기 간행물인 ‘샤롬’의 편집인은 청년회, 발행인은 담임 이희철 목사로 되어있었다. 창간호가 1977년 12월 4일 교회 창립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되었다. 이 샤롬지는 교회의 소식지일 뿐 아니라 문서 선교지요, 문예지인 것이다(표 12).
‘77 이웃과의 유대 일지
교육의 해
학습·세례
봄 대심방 시작
정용자 전도사 부임
전교인 성경읽기 운동 전개
성서지리연구회
알뜰 살림꾼 여전도회
첫 여름 성경학교-하기수련회
한글학교의 태동
수요 예배는 각 가정을 순회하며
새벽예배를 1주 1회만이라도 드려야 되겠다 결정하고 그해 10월 28일부터 매주 주일 6시에 드려졌다. 때를 같이하여 수요예배도 드리기로 하였으나 임대주인 미국교회의 허락을 못 얻어 수요예배를 화요일에 드리기도 하였다. 수요예배를 화요일에 모이었으니 “지금부터 화요예배를 드리겠습니다.”했을까, “수요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했을까. 아니면 “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했을까? 당시 주보에는 아래와 같이 광고가 나갔다. 퍽 오랜 기간동안 이렇게 하였다. 80년대에도 이렇게 했던 기록이 있다.
새벽 기도회 : 주일 오전 6시
삼일 기도회 : 화요일 오후 8시
자체 예배처소가 없어 미국인 교회에 세를 들어 있다는 것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갓 이민을 와서는 ‘서머 타임’ 실시와 해제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이 있는데다가 세를 들어 살림한다는 것은 미국인이 자기네들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하고 나머지 여유시간을 우리가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조정을 수시로 해야했다. 어부들이 물때를 맞추듯 퍽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런데다가 수요예배는 도무지 드릴 여건이 안되었다.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각 가정으로 순회하면서 수요 기도회를 갖는 것으로 했다. 이는 78년 11월 15일(수)부터 시작했다. 먼저 이희철 목사 사택에서부터 테이프를 끊었다. 구역예배와도 흡사했다.
매주 주보에 금주 수요예배 장소를 알리는 광고를 실었다.
교회 내 각종 대회
체육대회 말고도 교회 내에 여러 대회가 있어 화합과 질적 향상을 꾀했다.
8월 20일(주일)에는 각 구역대항 성경퀴즈대회가 열렸다. 범위는 창세기, 출애굽기였다. 구역별로 성경을 읽고 예행 연습을 하고 이러는 사이에 구역이 귀합되고 은혜스러운 교제의 장이 되었다. 추수감사절에는 성가대 주최 ‘가족창 대회’가 있었다. 지정곡은 찬송가 573, 324, 411, 480장 중 1곡 1절을 부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유곡 1곡을 불러 자웅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 행사야말로 ‘대회’라는 감각 없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주님 앞에 나아가 찬양을 드린다는 데 그 의미를 더했다.
미국생활에서 가족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각종 악기가 동원되고 이 구석 저 구석에 삼삼오오 가족들이 모이어 연습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어느 가정은 참석치 아니할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숱한 연습을 하고 만반의 준비가 끝난 가정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전 교인의 축제, 바로 그것이었다. 박수와 웃음이 절로 나는 즐거움이었다.
기도하는 해
1979년도 부서 조직
제 4회 제직 수련회
부흥성회, 다시 이호문 목사를 강사로
‘샤롬’지 제 2호 발간
젊은이들의 기도
부활절 성례,성찬식
계속되는 성지순례
이현호 장로, 괴한의 총격에 숨지다
창립 7주년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이희철 목사의 사임
다시 후임 목사 청빙을 위하여
다시 후임 목사 청빙을 위하여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목사님 청빙’이라는 제하의 신문 광고도 냈다.
이토록 목사 청빙을 신문에 내기도 하였지만 일각에서는 현재 전도사로 있는 김종혁 전도사가 계속 담임목사 대행을 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때 정식으로 임직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서광진 증인 2002. 4. 11 녹취)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교회에 대하여 평판이 좋을 리 만무하거니와 더더욱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도 남음이 있는 터다. 그러니 자체에서 해결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하겠다.
매주 주보에는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교우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를 바랍니다’라고 ‘교회 소식’ 난에 자주 오른다. ‘훌륭한 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기도하자 할 법도 한데 그게 아니라 ‘새로운 목사님’이라고만 한 것에서도 어떤 느낌이 와 닫는다.
전임 목사님이 지난달에 떠나셨는데 청빙위원회는 아직 이렇다할 진전이 없었나 보 다. 제직회가 열려도 몇몇 이력서 접수상황 외에는 별다른 보고가 없다. “박희소 목사 가 추천하는 목사가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담임목사가 공석인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1979년 10월 28일 주일에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순각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듣게 되었다. 11월 정기 제직회에서 제직 만장일치, 이순각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것을 결의하였다. 제직은 물론, 많은 교인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 뜻이 곧바로 이순각 목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이순각 목사가 김기태 집사에게 부임할 의사가 없음을 전화로 알려왔다. (* 편찬자 주 : 실명(實名)을 써서 송구스럽다. 본지 후미 ‘생생한 기록들’ 편에 실명이 나오기에 그대로 썼다. 넓은 해량을 바란다.)
훌륭한 목자를 모신다는 것은 생업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생업을 전폐하고 서광진 집사는 자기가 자동차를 낼 터이니 같이 시카고에 가서 직접 만나 종용해 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김기태, 이성남, 서광진 세 집사가 서광진 집사의 자동차에 동승하고 시카고로 향하였다. 만났다. 그러나 실패였다. 어쩌면 이 목사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 교회가면 힘들어, 가지마’하는 소릴 들었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지금 내가 맡아 먹이는 주님의 어린양들이 있는데 이를 어찌 버리고 갈 수 있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선뜻 “노(No) !”라고 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런 일을 여러 차례 겪고 보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판단이 서기도 했다.
이러구러 감사절과 성탄절 그리고 연말이 다가온다. 목회자 공석이 3 개월 째인데 교인들의 결집력은 약해가고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도 새 성전으로
하지만 “이 교회에서 떠나거라”는 말이 불거진 지 퍽 오래였는데 그간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새 성전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미국 이민교회가 겪는 전철이려니 하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일들이었다. 잦은 목사의 이동, 교회를 빌려쓰는 서러움 – 이런 시련들이 정녕 우리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겠지 하며 믿고 싶은 마음이 너나 없이 앞설 뿐이다.
1979년 11월 4일부터 새로 빌린 Jersey City에 1907년도에 세워진 Evangelical Free Church 성전을 빌려 그곳으로 이사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 교회로서 네 번째 예배 처소의 주소는 아래와 같다.(사진 14)
155 Vroom St., Jersey City, N J 07306
그해 추수감사절(1979년 11월 25일)예배는 새로 마련된 예배처소에서 드려졌으니 더욱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