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0 위로부터 오는 것 / 요 3:1~12

20201220 위로부터 오는 것 / 요 3:1~12

요 3:1-12/위로부터 오는 것

201220 요한복음7/대강절4주/거듭남1
즉문즉설의 메시지
두어 해 전에 늘 제 설교를 듣고 다양한 피드백을 주시는 교우께서 카톡으로 연락을 주시기를, 요즘 한국에서 법륜스님이란 분의 즉문즉설이라는 코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겁니다. 법당이나 방송국 등에서 청중들이 즉석에서 하는 질문을 스님이 즉석에서 답을 주는 방식의 상담코너인데 들어보니까 속이 시원해서 좋더라, 기독교계에도 이런 코너가 있으면 좋겠는데 김목사가 이런 코너를 좀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온라인에 들어가 저도 몇 가지 상담을 들어보니 과연 재미도 있고 속시원한 지혜를 주기도 했습니다. 외도하는 남편을 어떻게 하느냐는 주부의 질문에 속상해봐야 당신만 손해 아니냐, 그 사람은 신경도 안 쓴다, 그 사람도 좀 행복해 보겠다는데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차라리 남편이 없는 게 좋겠다고 괴로워말고 진짜 남편 없다고 마음먹어 봐라, 집착에서 벗어나 지금보다 행복해진다는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저의 짧은 이해로는 불교의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도록 도와주어서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에 위로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마음을 고쳐먹기가 어려워 그렇지, 정말 고쳐먹으면 많은 집착, 고민, 스트레스에서 자유를 얻는 것은 실제 경험으로 어렵잖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깊이 도를 닦는 분들이 세상사 고민과 괴로움을 초월한 듯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교회에서도 이런 소재를 적극적으로 다루어 재미있는 설교를 하는 목사로 이름난 이도 없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대부분의 설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소 지루하기도 하고 알아듣기 어렵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 마음을 고쳐먹도록 가르치면 많은 문제가 풀릴 것 같은데 왜 관심이 없어 보일까요? 이런 문제를 제쳐좋고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들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 본문 1절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그가 당시 로마제국 식민지 유대사회의 종교, 사회 전반의 문제를 판결하는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란 뜻입니다. 당시 성전 모퉁이의 대리석방에서 열렸던 이 회의는 대개는 바리새인 대표 35명, 사두개인 대표 35명과 의장인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1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로마총독만이 내릴 수 있는 사형언도를 제외한 모든 형벌을 내릴 수 있었던 이 회의의 절반을 차지하는 바리새인들은 구약 율법을 해석하여 대중들의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의 지침을 가르치는 랍비, 서기관, 율법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의 기준이 되는 형법, 민법, 상법 등 거의 모든 규칙, 규정이 이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에 들어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답해주는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유대사회 전역의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도자 35인이 산헤드린 공회에 들어갔으니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그런 대표지성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질문합니까? 바로 영생의 길이었습니다. 백성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이 답해 줄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이었지만 영생의 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요 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가장 뛰어난 지성이라도 영생의 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에 속한 지혜는 아무리 뛰어나도 육의 것 밖에는 알지 못 하니 영에 속한 것은 성령님의 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영의 지혜는 서로 다른 차원입니다. 마치 더하기, 빼기와 미분, 적분의 차원이 다르고 자전거와 우주선의 복잡함이 차원이 다르듯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교회가 전하고 있는 것은 영의 지혜, 영생의 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마음을 고쳐먹어서 고민에서 해방되는 것은 괴로운 삶의 무게를 더는데 일견 유용한 태도이긴 하지만 영생의 길을 가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힘겨운 인생길을 가는 우리가 교회에서 이런저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많은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해도 영생의 길에 대해 배우지 못 한다면 우리는 메인메뉴는 내다버리고 디저트만 먹고나오는 꼴입니다.
영생의 길 거듭남
그렇다면 교회가 가르치는 영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생에 이르는 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며 그 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거듭남, 중생입니다. 세상지혜는 힘겨운 삶을 고치는 법을 가르치지만 영의 지혜는 새로 태어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마음을 고쳐먹으면, 이런저런 노하우를 배우면, 이렇게저렇게 돌이켜서 살면 힘든 세상짐을 좀 덜고 죄도 좀 덜 지을 수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은 거듭나야만 즉 중생해야만 그제서야 고쳐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새세상에서 영생이라는 새삶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럼, 거듭남, 다시 태어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거듭난 것일까요? ‘거듭 나다, 다시 태어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ἄνωθεν(아노덴:다시) γεννάω(겐나오:태어나다)에서 아노덴에는 ‘위로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ἄνωθεν(아노덴) γεννάω(겐나오)
다시/위로부터    태어나다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위해 한 일이 있습니까? 전적으로 부모님의 사랑의 열매로 여러분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던가요? 마찬가지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외부의 은총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 외부가 어디입니까? 바로 하늘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의 결과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생명
요한일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생명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것입니다. 다른 기원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아닙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라야만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인이 아닌 타종교인도 혹은 비종교인도 도덕적으로 살거나 과거의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지 않습니까? 기독교인보다 더 도덕적인 이들도 많은데요? 그런 삶도 도덕적이고 새로운 삶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은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무리 과거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아도 거기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긴 때문입니다.
여기 살인을 완벽하게 숨긴 범죄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어떤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타인을 돕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삶임에 틀림없으나 두 가지 해결되지 못 한 문제때문에 완전한 새 삶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고통과 법적인 책임입니다. 첫째 양심의 고통입니다. 그의 피해자는 목숨을 잃었고 그 가족은 아직도 고통 속에 삽니다. 그들로부터 용서받지 못 한 그는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죄책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 법적 책임입니다.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사형을 받아야 마땅한데 단지 잡히지만 않았을 뿐입니다. 그는 체포와 사형의 두려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가 진짜 새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그의 죄에 대해 용서를 받아 양심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둘째 그의 죄값을 치러 형벌의 두려움을 벗어나야 합니다. 문제는 죄인이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첫째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선행도 죄를 지울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죄값을 치르는 길은 죽음 뿐입니다. 새 삶을 시작도 못 해보고 생이 끝이 나버립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끝이없는 자비와 긍휼로 죄인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죄값은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다 치르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죄값이 다 치러졌지만 그는 죽지않고 살아서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새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진리를 16절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거듭남의 생명, 영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로부터 나온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성이나 뉘우침이나 선행은 아무리 커보여도 결국 물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려는 것과 같이 참 생명을 얻기에 부질없는 짓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새생명을 얻는데 무지하고 무기력할 뿐입니다. 인간세계의 지혜로는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니고데모가 이 영생에 관해 무지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도 거듭나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 생명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건가요? 그냥 감나무 아래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겁니까? 더 나아가 내가 거듭났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의 답을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자비가 끝이 없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로지 위로부터 오는 이 거듭남의 은혜를 한 분도 빠짐없이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