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 와서 보라 / 요 1:35~42

20201129 와서 보라 / 요 1:35~42

요 1:35-51/와서 보라

201129 대강절 첫주
전도의 경로
오늘 설교는 질문 하나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교회를 방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인도하였던가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면서 당신께서 저의 손을 잡고 교회로 인도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양한 계기가 있겠으나 가장 많은 이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첫 제자들을 소개하는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37절부터 보십시오.
(요 1:37)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첫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에는 그들이 이전에 신뢰하고 따르던 스승 세례 요한의 권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었죠.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안드레는 그의 형제에게 전도를 시작합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다음은 이들이 동네 사람 빌립을 전도합니다. 44절입니다.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 또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합니다. 45절입니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전도의 경로를 보면 예수님의 친척인 세례 요한이 제자 안드레를, 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시몬이 동네사람 빌립을,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즉 스승에서 제자로, 형제로, 동네이웃으로 그리고 친구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베드로와 안드레 뿐 아니라 다른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입니다. 이렇게 신뢰하는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것을 관계전도라고 부릅니다.
관계전도
지난 2014년 미국기독교전문리서치기관 바나그룹에서 42,8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는 이들 가운데 가정방문이나 전화전도를 받는다면 교회를 방문할 것 같다고 답한 이들은 27%, TV, 라디오, 신문 등 광고를 보고 방문할 것 같다는 이들은 18%에 그친 반면 가장 많은 응답자인 47%가 가족이나 친구들의 초대를 받는다면 교회에 나가볼 의향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바나그룹은 이 통계를 근거로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가족, 친구처럼 신뢰하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전도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성장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미 교회를 출석하는 이들에게 계기를 묻는 질문에 90%가 가족, 친구, 이웃 등의 관계전도라고 답했습니다. 목사를 보고 출석했다가 5%, 주일학교를 보고 4%, 교회 프로그램 3%, 자발적으로 2%, 가정심방 1%, 특별한 필요 1%, 전도집회가 0.5%였습니다. 중복응답이었기에 더하면 100%가 넘습니다. 돈과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드는 전도집회의 성과가 가장 낮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나머지를 다 더해도 10% 내외지만 열 명 중 9명이 관계전도를 통해 교회 출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계는 교회가 어디에 힘을 쏟아야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전도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이의 전유물이 아니라 가족, 친구, 이웃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는 말주변도 없고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줄 용기도 없으니 전도는 어렵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이들, 주변에 있는 이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를 시작하면 누구나 전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사명, 전도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신앙의 동기
37절에서 세례 요한의 권유로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른 또 한 제자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으나 교회의 전승은 이 복음서의 저자 사도 요한일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가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38절입니다.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은 시종일관 당신을 따르겠다고 오는 이들을 좋다구나 환영하지 않으시고 그 동기를 물어보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즉 무엇에 목마르냐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배 후 교우들과 인사를 하는데 처음 보는 분이 참석했더랍니다. 인사를 했더니 명함을 주는데 사회적으로 꽤 대접받는 지위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경력을 죽 소개하더니 목사님께 자신을 맘껏 쓰라고 하는 겁니다. 뭘 쓰냐니까 목사님 목회를 도울테니 무슨 일이든 자신을 사용하라며 언제든 전화를 달라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써야할 지를 몰라 전화를 안 했더니 두어 주 출석하다가 안 나오더랍니다. 몇 년 후 이 분이 다시 나타나서 자신을 기억하냐기에 한다고 했더니 오늘 설교 중에 선교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자신이 아이디어가 많다며 전화를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안 나오더랍니다. 목사님 생각에, 이 분이 교회에 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더라는 것이지요.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러 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과 재력으로 도와줄테니 장로직분이라도 달라는 것은 아니었는지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궁금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동기를 확인하셨습니다. 3장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거듭나느냐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의 생명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4장에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나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우물의 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니 내가 주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몰려든 무리들에게 육의 떡을 구하지 말고 하늘의 떡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이 세상의 복과 영화를 구하느냐, 하늘의 복과 생명을 구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전자라면 번지수를 잘 못 찾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6장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교인이냐 제자냐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는 오늘 현대교회의 메시지와 태도를 돌아보게 해줍니다. 현대교회는 예수님과 달리 몰려드는 군중을 환영하고 그들을 더 끌어모을 방법을 고민합니다. 이를 위해 대중들이 싫어하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걸러내고 그들이 좋아할 자기긍정과 면류관의 메시지를 첨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자기를 긍정하고 된다, 할 수 있다, 부자 된다고 믿어서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하셨는데 교회는 복음을 누더기로 만듭니다. 대학 시절 UBF의 한 목자가 저를 전도할 때 한 말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교인을 만들지만 우리는 제자를 만듭니다.” 오늘날 흔히 파라처지라고 부르는 교회 밖 선교단체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중세교회 수도원이 늘어난 이유처럼 교회가 제 역할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예수님처럼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이 땅에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기를 구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긍정하고 왕이 되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까? 자신이 왕 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동거하는가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38절 후반부입니다.
(요 1:38) … (두 제자가)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거주지를 물었을까요? 당시 지혜로운 스승 랍비를 좇는 제자들의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벼운 방식으로 낮 동안 랍비를 만나 그 지혜를 배우고 집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Part Time 제자입니다. 둘째는 좀 더 헌신된 방식으로 랍비와 24시간 함께 지내며 그의 가르침과 삶을 모두 배우는 것입니다. Full Time 제자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과 동거하는 Full Time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그의 가르침을 좇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제 십시는 오후 4시 경입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의 거주지로 향했다는 것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밤을 지내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동거를 시작합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주님께 걸쳐놓지 않고 삶을 모두 주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온전히 당신과 함께 거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래야만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거하는 것은 마치 말라죽어가던 나무가 시냇가에 옮겨 심기는 것과 같아서 살아나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또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곳에 세운 태양열 발전기 같아서 전기를 끝도없이 생산합니다. 그것은 또 바람이 그치지 않는 들판에 세운 풍력 발전기 같아서 끝도없이 전기를 생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불 싸들고 와서 오늘부터 교회에서 자면 됩니까?’ 그러면 쉽겠지만 그리스도와의 동거는 육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듯이 성령님의 인도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 때 경험합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성경 읽고 기도생활을 시작하면 되나요? 네, 맞습니다. 그런 삶을 살 때 두 가지 열매가 맺힙니다. 이 열매를 보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동거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 변화
첫째 열매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38절을 보면 안드레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요 1:38) …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그런데 주님과 동거를 시작한 후 형제 베드로를 전도할 때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습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선생이 구원자로 바뀌었습니다.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 곁에 심겨져 죄와 악으로부터 건짐받고 멈추지 않는 은혜와 기쁨의 생수를 마시다 보면 이 분이 이 세상의 지혜로운 선생 정도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구원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일 뿐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아직 주님과 동거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과 동거하고 그 분이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이심을 깨달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거듭한 피조물로의 변화
둘째 열매는 자신의 본질의 변화입니다. 42절입니다.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마태복음을 보면 시몬이 아람어 게바 헬라어로는 베드로 즉 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시점은 3년간 주님과 동거한 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한 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동거하며 주님을 모르던 시몬에서 주님으로 인해 거듭난 사명자 베드로로 바뀌었습니다. 주님과 동거하는 삶은 제자의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고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동거한 사람은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됩니다. 나뭇가지를 기어다니던 애벌레가 탈바꿈을 하여 나비가 되면 더 이상 이파리를 갉아먹으며 기어다니지 못 하고 달콤한 꿀을 찾아 날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되면 더 이상 욕망의 이파리를 갉아먹으며 기어다닐 수 없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찾아 날아다니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질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거함으로 여러분의 본질이 바뀌는 열매를 맺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주님, 어디 계십니까? 주님과 동거하기를 원합니다.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와서 보라. 나와 함께 거하라. 내가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 이 음성을 듣고 새 피조물로 거듭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