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17-27/믿으면 보리라 지금
201018 주일예배
UBF에 빠진 형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의 한 청년부 형제와 가족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형이 한 명 있다고 하더니 갑자기 흥분하면서 그 인간을 형이라고 부르기도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남인 그의 형은 대학에서 흔히 UBF라 줄여부르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 가입했는데 갑자기 사람이 변해서 오직 전도만 하고 다니느라 장남이 부모님도 안 돌본다며 이 형제가 볼 때 형이 빠진 그 UBF는 이단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대학시절 UBF에 잠시 몸담은 적이 있습니다만 UBF는 학생선교단체 중 가장 헌신적인 곳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국내외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지성인선교를 목표로 하기에 대부분 석사,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교직 혹은 일반직을 갖고 얻어 국내선교를 하거나 제 3세계 대학에 교수로 자원하여 가서 캠퍼스 선교를 합니다. 기성교회에서 나와 지역마다 있는 센터를 중심으로 예배와 신앙생활을 하고 수입의 대부분을 헌금하여 여러 가정이 한 집을 빌리거나 구입하여 방 하나에 한 가족씩 생활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공부와 전도에 씁니다. 반면 가족을 돌보거나 다른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힘을 잘 쓰지 않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 여러 학생선교단체가 있었는데 유독 UBF 자매들은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기로 유명했습니다. 거의 모든 자매들은 하얀 블라우스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치마를 입고 있어서 마치 TV에서 막 걸어나온 북한여성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세지향적 믿음
사실 교리적으로 큰 문제가 없고 어느 선교단체보다 더 헌신적인 전도와 성경공부, 국내외 선교활동을 하는 이들인데 UBF는 여러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왜일까요? 여러 문제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는 UBF의 신학이 가진 내세지향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UBF가 가르치는 구원의 핵심은 죄로부터 구원받아 잃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하다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여기에는 일상의 가치가 빠져있습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살아가야 방식은 전도, 헌신, 선교 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신학에서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은 모두 전도, 헌신, 선교를 하기 위한 부수적 도구에 불과해집니다. 그러면 부모님 돌보고 가정을 꾸리고 돌보는 것도 소홀해지고 직장생활은 그저 선교활동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학교친구, 직장동료는 전도의 대상일 뿐이고 세상의 정치, 사회, 경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빨리 떠나야 하는 멸망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점점 인간미가 사라집니다. 만약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전도의 대상, 교화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와 함께 커피 한 잔이라도 편하게 마시고 싶겠습니까?
아니 그럼, 우리 기독교가 이런 내세지향적 종교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네, 아닙니다. 확실히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언제요? 오늘 본문이 그런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마르다의 믿음
지난 주에 이어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 봅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나사로의 집을 예수님이 방문하신 직후 그 누이 마르다와 대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첫 마디가 모두 원망이었던 것을 지난 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리아와 달리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22절입니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리아와 달리 예수님을 원망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마르다는 마리아는 듣지 못 했던 약속의 말씀을 예수님께러부터 듣습니다. 23절입니다.
(요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부활의 약속입니다. 마르다는 그녀가 가진 믿음을 다시 고백합니다. 24절입니다.
(요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사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부활약속에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의인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것은 당시 바리새파 유대교가 가르쳐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그녀가 가진 이 믿음 이상의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25-26절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미 부활의 믿음을 가진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또 다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미 부활을 믿는데 무엇을 더 믿으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
마르다의 믿음은 생명을 잃고 주검이 되어 있는 오빠 나사로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키며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사로를 부활시킬 이, 그에게 생명을 줄 이가 누구라고 믿느냐? 바로 나다, 나사로가 누릴 부활, 나사로가 얻을 생명이 다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는 것이고 그런 내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그런데 왜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믿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두 가지 믿는 자가 나오지요. 그냥 믿는 자와 살아서 믿는 자. 후자가 살아있는데 믿는 자라면 전자는 누구일까요? 죽어 있는데 믿는 자가 아닐까요? 죽어 있는데 믿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 곳에 죽어 있는데 믿는 자는 바로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입니다. 반면 살아있는데 믿는 자는 그 곳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제자들 그리고 이제 믿게 될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부활이고 생명인 나를 믿었던 나사로는 지금 죽어있지만 나로인해 지금 살아날 것이다. 지금 살아있으면서 나를 믿는 너희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나사로는 곧 부활하였습니다. 그럼 다른 이들은 이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까? 마르다도,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도 후에 모두 죽어서 무덤에 묻혔습니다. 영원히 살 것이라면서요? 그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이해하면 풀립니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마 9: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은 성도에게 진짜 죽음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왜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십니까? 진정한 죽음이란 육체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는 육체가 살아있어도 사실상 죽은 것이요, 반대로 하나님과 연합한 이는 육체가 죽어도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육체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 잠드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생명은 떠났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연합한 사람은 이미 지금 생명을 얻은 것이요, 부활한 것이요, 이것은 마지막날까지 계속 될 것이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하는 믿음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진짜 부활과 생명은 마지막 날에 육체가 부활할 때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연합한 제자들에게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을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요 5:25에서도 이 진리를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지금이 부활의 때요, 생명 얻을 때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 ‘나사로야, 나오라’하는 말씀을 듣고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부르시듯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도완아, 나오라!’ ‘진희야, 나오라!’ ‘평화야, 나오라!’ 그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육체의 죽음과 상관없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마지막 때가 아닌 바로 지금부터 누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믿음
그럼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마르다가 가진 마지막 때를 바라는 믿음, 내세지향적 믿음 대신 현세지향적 믿음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내세지향적 믿음이 일상의 가치를 무시하는 부작용을 낳듯 현세지향적 믿음은 세상에서의 부와 성공, 건강을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인양 오해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몇 주 전 설교에서 나눈것 처럼, 현대교회의 메시지가 성공지향적 자기계발강연회의 긍정주의 메시지와 다를 바 없이 변질된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를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주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내세지향적 믿음이 일상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면 현세지향적 믿음은 신앙을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믿음은 내세지향적 믿음도, 현세지향적 믿음도 아니라 오늘 여기서 시작해서 다가올 세계에서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릅니다. 하나님나라는 교회와 신앙과 선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와 사회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부와 성공과 건강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이는 누구든지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부활을 경험하여 새생명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음과 그 음성을 들음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의 결혼과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신앙까지 그 무엇이든지 무덤의 권세에 갇힌 것이 있다면 예외없이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믿고 선포하십시오.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래서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나고 무덤의 권세가 깨지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믿고 들을 때에 죄의 무덤, 악의 무덤, 근심의 무덤, 슬픔의 무덤, 무기력의 무덤, 중독의 무덤이 깨지고 열리고 생명의 대지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나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