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35-44/예수님은 계획이 있다
201011 주일설교 코로나10/나사로의 부활
왜 돌보지 않으시는가
저희 집 막내 진리는 불만이 많습니다. 늘 형, 누나와 비교해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랑이가 미들스쿨에 들어가며 셀폰을 선물받자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형은 셀폰 있어, 누나도 셀폰 있어, 나만 셀폰 없어. No fair!’ ‘진리야, 형도, 누나도 다 미들스쿨 때부터 셀폰 썼어. 너도 미들스쿨 가면 셀폰 쓸거야.’ 그래도 불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빠는 나 care 안 해. 엄마는 나 상관 안해. 내가 죽어도 상관없어?’ ‘어떻게 상관 안해? 엄마, 아빠는 늘 널 캐어하고 상관해. 사랑해.’ ‘아니야, 내가 죽어도 엄마, 아빠는 상관하지 않을거야!’
진리의 유치한 원망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흔히 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났을 때 제자들은 겁에 질려 이렇게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막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여러분은 이런 원망을 해보신 적이 없는지요? 병에 걸려 이렇게 고생하는데, 실직하고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결혼과 가정이 이렇게 파탄날 지경인데, 신분으로 고생한 적이 몇 년인데 왜 주님은 돌보지 않으십니까? 이런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자매들의 마음이 정말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녀들은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리다 지쳐 원망에 사로잡힌, 죽은 나사로의 여동생들입니다.
예수님은 계획이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묘사하는 요 11장의 일부입니다. 11장 전체가 묘사하는 이 사건을 시간관계상 일부만 읽었습니다만 예배 후 차분히 11장 전체를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괜히 요한복음이 이 사건을 이토록 길게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풍성한 진리가 들어있고 생생한 사건현장이 묘사되어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을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님과 특별한 친분이 있던 나사로의 동생들은 반가움보다 원망이 더 컸습니다. 두 자매의 첫 마디를 들어보십시오.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두 자매의 첫 마디가 한결같이 왜 진작 오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녀들의 원망은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자매들은 이미 며칠 전에 예수님께 사람을 급히 보내 나사로의 위중함을 알리고 어서 와 고쳐주시라고 간곡히 요청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전갈을 받고도 일부러 이틀이나 더 머물며 시간을 끄셨습니다.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시고
반면 이틀이 지난 후에는 제자들이 만류하는데도 나사로의 집이 있는 유대땅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십니다.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또한 예수님은 일부러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지난 시점에 그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요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죽은 이가 3일 내에 살아날 지도 모른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일장을 하는 이유도 장례준비나 먼 곳의 지인이 오도록 여유를 두는 것 외에 이런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4일째라는 말은 가족들이 모든 희망을 완전히 버린 시점이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은 오랄 때는 일부러 안 가시고 위험하다고 말리는데 굳이 가시겠다고 하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4일째에 그 집에 도착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에게는 나사로 가족도, 제자들도 몰랐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스케쥴과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르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의 계획과 우리의 기대가 다르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주님께 실망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 실망과 원망은 모두 주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과 그 계획이 우리의 기대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와 계획대로 세상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진작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계획이 있으며 우리 기대가 아닌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계획인가
그럼 주님은 도대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그 계획은 예수님의 반복되는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 11:42) ‘…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계획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직접 보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그 아들의 영광을 보고 믿는 것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나사로의 동생들, 제자들 그리고 모인 무리들에게 이 영광을 보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그녀들의 그토록 간절한 부름과 기다림을 외면하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럴 만큼 이 영광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인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예수님은 나사로 가족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베이스캠프가 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이었다면 유대 사역의 베이스캠프는 이 베다니의 나사로 집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가족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이렇게 가깝게 섬기고 교제하고 따르던 나사로가 힘겹게 투병과 마침내 죽도록 예수님은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그 동생들이 기다리다 지쳐 실망이 절망이 되고 슬픔이 원망이 되도록 예수님은 견디셔야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당신도 무척 마음이 고통스러워 우셨습니다.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당신의 슬픔, 나사로의 고난, 그 누이들의 고통… 이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예수님이 계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당신의 영광을 보고 믿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이 영광을 보는 것이 그 모든 대가를 치를 만큼 가치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고통과 슬픔, 괴로움을 당할 때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물에 빠져 숨이 막혀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와 가치가 떠오르겠으며 총알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고통에 누가 다른 이의 사정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물에 빠진 아이를 발견한 부모는 자신이 수영을 못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조국과 전우를 위해 전쟁터를 누비는 군인에게는 목숨을 잃는다는 공포마저 잊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분명 고통에서 벗어나고 안락과 풍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지만 인생의 참 의미는 안전과 풍요와 쾌락이 아니라 사랑과 가치와 기쁨입니다.
코로나로 지치고 실직과 파산으로 고통받고 병들고 다쳐서 괴로운 상태를 겪는 한이 있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진정 그 분을 믿게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이 없으며, 그 모든 고통을 치를 가치가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분을 믿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보라
그럼 도대체 그 영광이란 어떤 것이기에 이런 고통마저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그 영광이 드러나는 장면을 보십시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오직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즉 죽음의 권세에 간단히 깨뜨려버리는 생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가 생명의 권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권세는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 죽음의 권세를 가볍게 제압하는 것이 생명의 권세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생명의 권세가 바로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이 생명을 세상에 부여하는 권세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생명을 부어주시는 이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이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 충만한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어디서 시작됩니까? 바로 이 은혜와 진리의 부재, 생명과 구원의 없음입니다. 그 은혜와 진리와 생명과 구원의 영광이 모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의 근본해결책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돈이 해결책이고 좋은 의료보험이 해결책이고 신분과 학벌과 일자리와 좋은 집과 차가 해결책인데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무슨 문제가 해결됩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없어도 예수님이 계시면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어떻게 이 풍성한 생명이 가득합니까? 저 태양이 빛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이 문을 열고 비를 뿌리기 때문입니다. 대지가 풍성한 양분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뜨지 않고 비가 오지 않고 땅이 말라버리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한들 지구는커녕 나무 한 그루 살릴 수 있습니까? 비료를 주고 양동이로 물을 퍼오고 전등을 비추어 본들 무엇 하나 살릴 수 있습니까? 전등을 태양과 바꾸며 양동이물을 비와 바꾸며 비료를 저 대지와 어찌 바꿀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과 약과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우리를 죽음의 모든 권세와 증상으로부터 구원하여 생명의 모든 은혜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오늘 슬픔과 절망과 원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있다면 ‘나사로야,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영광을 보고 구원하시는 그 분의 사랑과 권세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