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2 이혼해도 될까요 / 마 5:27~32

20200202 이혼해도 될까요 / 마 5:27~32

마 5:27-32/이혼해도 될까요

200202 주일설교 산상설교
82년생 김지영
지난 주간 설교준비를 하면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서 일부러 찾아서 봤습니다. 원작소설과 영화가 모두 작년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입니다. 영화는 제목처럼 82년생 30대 후반 여성 김지영의 일상을 관찰하며 시작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 어린 딸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가 된 김지영 씨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모든 면에서 한국사회의 평균적 여성입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다중인격장애로 의심되는 정신질환을 겪습니다.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된듯 남편을 사위라고 부르고 시어머니를 사부인이라고 부르며 대화를 합니다. 어느 날엔 돌아가신 할머니가 되어 어머니를 향해 딸이라고 부릅니다. 다행히 자상한 남편의 도움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회복되어 가는데요, 그 과정에서 할머니, 어머니 또 딸로 대대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속으로만 견디어내야 하는 차별과 불평등, 억압과 착취 그리고 폭력이 낱낱이 고발됩니다.
 집에서는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오빠와 남동생에게 늘 양보하고 희생을 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는 남자사원들에게 무시당하고 희롱과 차별을 받습니다. 시댁에서는 그 자신도 희생자였던 시어머니로부터 당신이 당한 것과 같은 억압과 착취를 강요받습니다. 사회에서는 조신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억압의 시선에 짓눌리고 성폭력을 당해도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당하는 상황을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하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착하고 자상하지만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지는 못 합니다. 이 모든 스트레스가 김지영 씨를 짓눌러 심리적 방어기제로 나타난 것이 그 정신질환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 여동생과 아내 그리고 수많은 교회 안의 김지영씨가 떠올랐습니다. 저 역시 여성의 고통에 무지하고 무심하여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하고 이 자리를 빌어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제가 유아세례 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녀계획을 물었던 것이 어떤 경우에는 무례와 폭력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걱정도 됩니다. 자매님들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모든 남성이 봐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저는 여자들을 잘 이해합니다. 제 아내나 여동생, 딸, 어머니는 그런 스트레스 없어요.’ 바로 이런 남자들이 영화를 봐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명화된 21세기를 살아가지만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세계최초로 합계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출산은 고사하고 결혼 자체를 꺼려하는 데에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세태가 분명 한 몫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도 제3세계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고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같은 선진국은 좀 낫다고 하지만 여전히 극복할 숙제가 많습니다. 사실 여성에의 폭압은 인류 역사에서 없는 사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이런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 대신 사랑과 존중이 있는 세상을 설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간음의 희생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재해석하신 6개의 대립명제 중 두 번째로 간음과 이혼의 문제를 다룹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간음의 의미를 더 넓게 해석하셔서 실제 간음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간음하지 말라하신 것이 첫째요, 가능하면 이혼하지 말라하신 것이 둘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어디까지가 간음이고 어디서부터는 간음이 아닌가, 그래서 간음의 죄를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기독교인의 이혼이 가능한가, 아닌가,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인가  하는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저도 종종 교우들에게 그런 관점으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간음과 이혼의 두 문제를 잘 살펴보면 예수님이 강조하시고자 하는 더 깊은 차원의 문제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바로 간음과 이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희생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여자입니다, 여자! 
먼저 간음의 예를 봅시다. 성경이 성적부도덕을 지적할 때 자주 쓰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음행과 간음이 그것입니다. 음행은 간음보다 훨씬 큰 범위의 성적부도덕 대부분을 가리킵니다. 이에 비해 간음은 그 범위가 더 좁아서, 배우자 아닌 이와 행하는 성적부정만을 가리킵니다. 음행이 아닌 간음의 경우는 분명한 희생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입니다. 그리고 1세기 당시 유대사회에서 간음으로 배신당하는 쪽도, 희생당하는 쪽도 대부분 여자였습니다. 그 사실을 본문 27-28절이 알려줍니다.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은 남자도 할 수 있고 여자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왜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경우만 말씀하십니까? 당시 사회에서 간음의 적극적 주체가 대개 남자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남자의 간음을 합법적으로 보호해주는 사회나 다름없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가 간음하다 발각되면 상대여자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배상하거나 또 다른 아내로 삼아버리면 해결이 되었습니다. 반면 여자가 간음하다 발각되면? 여자와 상대 남자가 모두 돌에 맞아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저런 이유로 남자는 빠져나가고 여자만 희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와 돌로 치려한 장면도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는 돌에 맞아 죽게 생겼는데 남자는 어디 갔나요? 여자는 간음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에서 흔하디 흔한 남자의 간음으로 인해 배신당한 아내는 여전히 집안에서 살지만 사실상 버림받은 여자나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남편은 아무 두려움도 죄책감도 없이 다른 여자와 자고 들어옵니다. 다른 여자에게 양식을 가져다 주느라 정작 아내는 내팽개쳐 둡니다. 아내는 잠자리도, 양식도 제공받지 못 하고 비참한 삶을 삽니다. 이들과 달리 나름 경건하다는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느라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결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도 실제 간음만 하지 않았을 뿐 아내를 배신당한 여자와 다름없이 내팽개쳐 두는 경우가 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왜 아내를 그렇게 버려둘까요? 다른 여자에 대한 음욕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외면하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고 눈을 돌리고 마음으로 즐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간음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혼의 희생자
이혼도 마찬가지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권리 자체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어땠을까요? 온갖 이유로 다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불임이거나 성적으로 남편에게 불성실하거나 가정생활에 태만하거나 혹은 정서적으로 남편에게 창피를 주거나 만족을 주지 못 하는 것도 이혼사유였습니다. 그저 랍비에게 가서 이런 이유를 설명하고 이혼, 이혼, 이혼 세 번 외치고 이혼증서를 써주면 그걸로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얼마나 이혼이 쉬운지요! 그런데 모세는 왜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셨을까요? 31절을 보십시오. 
(마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이 쉬운 이혼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냥 아내를 집에서 쫓아내는 못된, 악한, 쳐죽일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혼증서는 더 이상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로 이를 가진 여자는 합법적으로 재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혼증서 없이 그저 쫓겨난 여자는 법적으로 여전히 전남편의 소유로 여겼기에 누구든 그녀를 데려와 살게 되면 남의 아내를 데려온 간음을 행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32절의 후반부를 보십시오. 
(마 5:32) ‘…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러므로 이혼증서도 없이 쫓겨난 여자는 재혼도 할 수 없이 남은 평생을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유대사회에서 여자는 돈을 벌 수도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 그녀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젊으면 몸을 팔고 늙으면 구걸을 하는 비참한 삶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런 못된 짓을 하는 남자들에게 정 아내가 싫어서 이혼을 해야겠거든 제발 그냥 쫓아내지 말고 이혼증서라도 써서 내보내라, 그래야 그녀가 재혼해서 살 길이라도 생기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간음의 경우처럼 이혼도 일방적으로 여자가 희생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존중으로
그럼 예수님이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던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남자들의 음란하고 이기적인 마음에 희생당하고 고통당하는 여자들을 착취와 배신 대신 사랑과 존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마음으로 다른 여자들을 욕망하는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29-30절입니다. 
(마 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눈은 다른 여자의 몸을 살피는 눈입니다. 손은 다른 여자의 몸을 더듬는 손입니다. 눈을 빼고 손을 찍는 마음으로 음란한 마음을 내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다른 여자를 욕망하지 말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네 아내에게 그 모든 마음을 주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눈은 오직 아내를 바라보고 성도의 손은 오직 아내의 손을 잡는데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라고 하십니다. 32절입니다.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혼증서를 써주었다 하더라도)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구절은 ‘그러면 음행한 여자는 버려도 되네요. 이혼은 이런 경우에만 되고 다른 경우에는 안 되는군요.’라는 적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증서만 써주면 죄책감 없이 이혼할 수 있으니 그럴 구실만 찾고 아내를 버릴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아내를 이혼이 가능한 대상으로 보지말고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의 첫째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아내입니다, 아내! 유대 탈무드를 보면 사랑해야할 이웃의 범위를 자세히 설명해 두었습니다. 첫째 이웃이 바로 아내입니다. 그 다음이 미성년 자녀예요. 셋째가 부모님, 넷째는 성년이 된 자녀, 다음으로 형제, 삼촌, 사촌, 가까운 친척, 가까운 이웃, 먼 이웃의 순입니다. 아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섬겨야 할 첫째 이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비유로 노래하는 잠언을 보십시오. 
(잠 5:15)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잠 5: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잠 5:17)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잠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음의 범위가 어디까지냐, 이혼은 어떤 경우에 가능하냐는 문제를 넘어섭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모두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아니고 여자 혼자 살아도 경제적, 정서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을 수 있고 이혼의 사유도 음행 못지않은 다양한 이유가 발생합니다. 여자만 희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타당하며 사는 남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모든 다양한 사례와 경우를 관통하는 본질적인 사명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 모든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자인 아내를 외로이 버려두지 말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아끼라는 그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적어도 아내와 사는 동안에는 간음하지 않고 아내를 버릴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는 최소한의 배려는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정결한 마음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평생 존중하며 섬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제자들의 의입니다. 사랑하는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교우들의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