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8 헤아릴 수 없는 지혜 / 창 48:8~22

20190908 헤아릴 수 없는 지혜 / 창 48:8~22

창 48:8-22/헤아릴 수 없는 지혜

190908 주일설교 요셉24
파리가 고맙다
여름이 어느덧 다 가고 가을이 온 듯 합니다. 여름을 지내는데 참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파리입니다. 파리를 생각하면 백해무익한 곤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보기에 징그럽습니다. 낮잠을 잘 때 파리라도 나타나면 귀찮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병균도 옮기고, 파리가 도대체 이 세상에 왜 필요한가? 저는 한 때 하나님께서 도대체 파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왜 파리처럼 불필요한 곤충을 만드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기, 바퀴벌레, 지네 등등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만약에 누가 여러분에게 “이 파리같은 놈아!”라는 욕을 한다면 무척 기분 나쁘시겠지만, 제 설명을 들어보면 오히려 기분 나쁜 건 파리 쪽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겁니다. 왜냐면 파리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대단히 유익한 곤충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파리는 식물의 꽃가루를 옮기는 ‘수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많은 이들이 벌, 나비, 새들이 꽃가루를 옮기지 않는가? 그래서 식물이 수분을 해서 번식을 하게 하지 않는가 생각하지만 벌, 나비, 새들의 수분량은 파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그 개체수와 활동량에 있어서 파리와 비견할 수 있는 수분하는 곤충과 동물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새, 벌, 나비를 자주 보십니까, 파리를 자주 보십니까? 파리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고, 여름이면 항상 있습니다. 적도부터 극지방까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파리를 잡듯이 새, 벌, 나비를 때려잡았다면 벌써 이 동물, 곤충들은 모두 멸종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리는 죽여도 죽여도 어디서 나오는지 끝없이 나옵니다. 그만큼 파리는 수가 많고 그 활동량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수와 활동량으로 수분을 많이 시키는 것이 파리입니다. 실제로 초파리를 이용해 수분을 하는 비닐하우스 농가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파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가 먹는 많은 과일, 야채, 또 아름다운 꽃들이 생존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생존도 위협받겠죠.
둘째로, 파리는 먹이사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파리를 먹고 사는 작은 새, 동물, 그리고 조금 큰 곤충들에 있어서 파리만한 먹이 공급을 대체할 다른 곤충이 없습니다. 그 많은 수와 왕성한 번식력으로 파리는 끊임없이 지구상의 생물들에게 먹이를 공급해주는 아주 중요한 곤충입니다. 만약 파리가 사라지면 먹이사슬의 그 위에 있는 생물들로부터 차례로 많은 생물들이 지구 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꼭대기에 있는 인간들에게도 아주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파리는 사체 분해에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다른 건 좀 큰 역할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은 거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이 다해 사체가 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것이 바로 파리입니다. 파리는 소화기관이 발달하지 않아 신선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패가 시작된 것들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체에 파리가 모이고, 파리가 까놓은 알에서 나온 수많은 구더기들이 그 사체를 분해하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과정을 맡은 딱정벌레류의 곤충들이 와서 분해과정을 진행합니다. 결국 파리가 없으면 사체의 분해과정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곧 파리가 없는 세상은 지구가 시작된 이래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간 모든 동물, 식물들의 사체가 분해되지 않은 채 온 세상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세상이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지경이 되면 우리도 살아갈 수 없고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파리가 맡은 역할 중 하나만 사라져도 인간은 생존에 위협을 받을만한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파리는 완벽한 창조의 증거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의 틈이나 모순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 없는 완벽한 창조의 지혜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파리조차 이렇다면 다른 생물들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완벽한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 완벽한 지혜로 저와 여러분의 삶도 돌보고 인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요셉의 기대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그 지혜가 곳곳에서, 자연 만물에서, 우리의 삶에서, 이 세상 어디에서나 확인되는데 그 중 한 곳이 오늘 읽은 본문이 되겠습니다. 자녀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에서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가 소개되는데요, 요셉은 나이 많아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축복을 받게 합니다. 큰 아들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세우고,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을 왼쪽에 세우는데, 그 이유는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오른손’은 ‘능력’과 ‘옳음’, ‘의로움’, ‘강함’ 등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으로 하는 복이 왼손으로 하는 복보다 더 큰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죠. 장자인 므낫세를 오른쪽에 세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상속에 있어서도 장자에게 더 큰 몫을 주었습니다. 아들이 예를 들어 넷이라면 부모의 유산을 5등분을 해서 다른 아들들에게는 한 몫씩을 주고,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었던 것이죠. 인간의 상식으로나 질서로나 혹은 제 생각에는 요셉의 마음 속에 큰 아들 므낫세의 재능에 대한 기대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좀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자녀도 있고, 또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자녀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부모 마음에도 더 기대가 되는 자녀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요셉의 태도를 볼 때 어린 아이들이지만 므낫세가 에브라임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든 요셉은 므낫세가 더 큰 축복을 받아야 마땅하다 생각하고 야곱의 오른쪽에 세웠는데, 야곱이 이해하기 어렵게 갑자기 손을 ‘X’자로 엇갈려서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는 것입니다. 왜 야곱이 이해할 수 없이 이렇게 하는지 요셉이 당황해 야곱에게 일러줍니다. 오른쪽에 있는 아이가 장자 므낫세가 맞고,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 48:19a) 그의 아버지(야곱)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요셉)아, 나도 안다.
이 말은 내가 몰라서, 우연히, 나이가 많아서,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요, 이 시간 야곱은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과정을 통해 야곱이 그런 계시를 받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그가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나도 알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창 48:19b) 그(므낫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에브라임)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에게 더 큰 복을 주시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야곱의 예언대로 이후에 북이스라엘을 주도하는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대로 작은 아들이 큰 아들보다 더 큰 복을 받는 것이죠.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질서와 기대, 상식과 지혜, 당연히 큰 아들, 더 재능이 있는 아들이 더 큰 복을 누려야 한다는 이 질서, 이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일하심, 자유로운 선택, 그리고 인간의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아주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인간의 지혜는 더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지혜를 절대로 좇아갈 수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이사야서 55장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지자의 음성을 통하여 선언합니다.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은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길이 하나님의 길을 좇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지혜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고사하고,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대화만 해도 어른들이 하는 말을 아이들이 못 알아듣지 않습니까? 몇십년 더 살았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내가 아이들을 라이드하러 나갔을 때 작은 아이가 엄마가 몇시에 오는지 묻습니다. “8시에 올거야.”라고 대답을 했지만 아내가 8시에 돌아오지 않으면 작은 아이는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엄마가 좀 늦는가 보다. 아빠는 엄마가 8시에 올 줄 알았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야.”라고 설명을 하지만 그것을 아이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하는 말의 뉘앙스를 이해시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고작 몇십년 차이가 나는 우리들 사이에도 서로의 생각과 판단을 이해시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하늘과 땅의 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으며, 어떻게 땅이 하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이처럼 인간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가 이 땅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의 지혜가 세상을 다스리고 주장한다면 세상은 벌써 수천번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세상을 파괴하고 훼손하고, 착취와 전쟁과 갈등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안다고, 똑똑하다고, 자기가 맞다고 주장하면 할 수록 점점 세상은 파괴됩니다. 점점 세상은 갈등이 심해지고, 멸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병들고, 깨어지고, 훼손된 세상을 당신의 완전한 지혜로 끊임없이 치유하고 회복시켜 새롭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
하나님이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치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이 망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저희가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잘 받으면 뼈가 다시 붙고, 몸의 질서가 회복되고, 그래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 망가지고 병든 것을 치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이 치유하고 회복시키시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가장 잘 두드러지는 곳을 꼽는다면 구원의 자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를 택하신 지혜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선교보고를 하는 것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0: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구원의 진리)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작고, 약하고, 보잘 것 없고, 겸손한 자)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는 것을 들어보니 누가 복음을 받아들입니까?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사두개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권세있는 헤롯당은 오히려 제자들을 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멸시받는 죄인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이들, 율법을 모르고 지키지 못하여 바리새인들에게 죄인이라 손가락질 당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이 큰 기쁨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강한 자, 슬기롭다는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까? 바로 다음 구절에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왜 슬기롭다는 자들, 강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손가락질 받는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입니까?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부심으로 충만한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누려도 그 구원이 자신들의 자격으로, 지혜로, 경건함으로, 자신들의 학식으로, 자신들의 강함으로 된 것으로 생각하기에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 구원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감격하며 그 구원의 힘으로, 진리의 힘으로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권세와 부와 지식과 명성과 능력으로 사회적인 힘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 감격할 이유도 없고, 그 힘을 의지해 살아갈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삼청동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삼청동은 한 집의 담장 둘레가 100m 쯤 됩니다. 집에 들어가 첫 주에 집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부요한 집의 아이를 맡아서 과외를 하던 중 마침 그 아이의 생일이 되어 고민 끝에 좋은 목도리를 대학로에서 사고 포장을 해서 가져갔습니다.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더니 감사하다고 하며 옷장에 목도리를 거는데 이미 거기에는 많은 목도리가 걸려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목도리가 대수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어도 잘 삽니다. 이 세상이 천국인데 천국을 뭐 그렇게 사모하고 감사하고 감격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작은 자들,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보잘 것 없고,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것이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 감격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진실로 드러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혜를 깨닫고 사도 바울이 감탄을 합니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이 얼마나 깊고 풍성한지 인간의 생각, 판단, 지혜로는 도저히 헤아리지도, 좇아가지도, 예측하지도 못했던 그런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그 지혜 덕분에 우리는 구원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 지혜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천국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교회를 택하신 지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는 또 한 곳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쓴 사도 바울의 편지에 그 자리가 이렇게 드러납니다.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지혜, 구원의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도구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맡은 공동체가 그 무엇도 아닌 교회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왜 교회인가? 교회가 얼마나 흠이 많고 불안전하고 문제가 많은가? 교회 와서 은혜받을 때도 있지만 상처받을 때도 있고, 교회가 기쁨이 될 때도 있지만 교회 때문에 속상할 때도 얼마나 많은가? 이런 교회가 뭐가 좋다고 하나님은 이 교회를 복음을 맡은 공동체로 삼으셨느냐 말입니다. 왜 위대한 제국, 강력한 군대, 돈이 많은 기업, 지식이 많은 연구소를 복음을 맡은 공동체로 삼지 않으셨느냐 말입니다. 그랬다면 훨씬 더 강하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잘 전파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11절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엡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이 교회를 복음 전파의 도구로, 공동체로 쓰기로 계획하셨다는 말이고, 그 말씀은 그 계획을 다시 검토해 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연히 하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 밖에 없는 것 같아 교회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수님을 통해 교회를 세울 계획, 그 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실 계획을 세우셨는데,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분의 완전한 지혜로 아무리 다시 다시 또 다시 검토해봐도 교회 말고는 이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공동체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찾아낸 최고의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강력한, 위대한 제국도 몇백년이 지나지 않아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강력한 군대도 결국은 다 흩어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기업은 돈 안되는 이 복음 전파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식이 많은 연구소는 그 지식에 취해서 인간의 지혜로는 깨닫지도 못하는 이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리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누구만이, 어떤 공동체만이 감당하며 전파할 수 있습니까? 왜 자신이 구원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감히 헤아리지 못하여, 작고 약한 자를 택하신 그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사랑과 긍휼에 감사, 감격하여 그 복음을 붙들고 어떤 고난과 핍박과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당하며 그 복음을 위해 달려나갈 준비가 된 이들, 그런 죄인들의 공동체, 교회라야만이 이 복음을 끝까지 붙들고, 전파하며 그 복음을 들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을 하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2,000년이 지난 오늘 전 세계 곳곳에 이 복음이 퍼져가서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통하여 또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세계 사람 3명 중 한명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는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주일 아침에 전세계 곳곳에서 열린 예배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는 주라고 고백하고, 다시금 삶의 자리에 달려나가 예수가 주이심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그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에, 바로 이 선택 속에서도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에 감탄한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시 147: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하나님의 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붙들고 지키고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오차가 없는, 틈이 없으신 그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는 백해무익해 보이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는 그러므로 영원히 그 하나님의 지혜를 이 시인처럼 고백하고 또 고백하며 찬양을 거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 찬양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