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1:20-29/지연된 심판
190609 주일설교 엘리야14
지연된 심판
오늘 본문은 나봇살인사건의 결말입니다. 내용은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고 하나님의 법을 폐기시켜버린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그 왕조의 심판을 엘리야가 선포하자 아합이 이를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보시고 심판을 유예시켜 주십니다. 엘리야가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가 얼마나 서늘한가 보십시오. 21-22절입니다.
(왕상 21: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왕상 21: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왕상 21: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왕상 21: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아합 뿐 아니라 그 악에 물든 왕조 자체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는 심판선고입니다. 쓸어버린다는 가슴 서늘한 표현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는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조 이전에 북왕국을 다스리가다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한 왕조들입니다. 심지어 이세벨과 아합의 자손들은 개와 새들이 그 시체를 먹어치운다는 섬뜩한 표현으로 묫자리도 쓸 수 없을만큼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심판선고의 무서움 때문이었는지 아합은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바로 회개를 한 것입니다.
(왕상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이 표현들은 모두 그가 회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심판을 뒤로 미루어 주십니다.
(왕상 21: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죄값은 어떻게 하나
이런 상황전개를 보면서 여러분은 좀 의아하지 않으신지요? 저는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첫째, 아니, 금방이라도 어찌할 듯이 심판을 선고하실 때는 언제고 금방 심판을 뒤로 미루어 주시는가? 둘째, 아합이 회개했다면 왜 심판취소가 아니라 연기인가? 심판의 취소와 연기는 다른 것인가? 셋째, 아합이 받을 심판을 왜 아들들이 받는가? 아들은 무슨 죄인가? 하나씩 살펴봅니다.
먼저 그렇게 무섭게 진노하셨던 분이 그렇게 신속히 심판을 미루어주시는 것입니까? 아합가문이 저지른 죄를 읽어온 이들은 다소 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아합의 죄값은 도대체 누가 치르는가? 나봇은 얼마나 억울할까? 무너진 공의는 어떻게 하나? 이런 황당함을 니느웨에 복음을 전한 요나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니느웨 성으로 가긴 했지만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는 복음을 정말 전하기 싫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저지른 죄와 동족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제대로 된 진노의 심판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마 일제식민지통치를 아직도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사과도 배상도 제대로 하지 않으려는 일본우익을 생각하면 그들이 회개하기보다 더 오만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를 바라는 한국인들의 마음과도 닮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기대와달리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는데 정말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진노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어찌하든 회개하고 용서받아 살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 그 죄인들의 죄값은 누가 어떻게 치릅니까? 이 죄값을 대신 치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나봇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십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부족함 없는 풍성한 위로로 의인들을 위로하십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오늘 우리와 우리 시대가 심판을 받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는 진리입니다.
왜 연기인가
다음으로 아합이 회개했다면 왜 심판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시대로 연기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합과 그 집안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름진 음식을 끊어 금식하고 부드러운 옷을 벗고 굵고 거친 베옷을 입고 베로 된 침대시트 위에 눕는 것은 몹시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명백히 이런 행위는 구약시대 회개하는 이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 죄를 버리는 것은 결코 같은 일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회개의 태도를 넘어 죄를 진짜 버리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아합과 그 왕조가 폐기한 하나님의 법을 다시 세워 지키며 탐욕과 교만과 폭력의 통치를 버리고 백성들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하나님 나라의 지도층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회복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의 회개가 참된 것으로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연기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왕조는 완전히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심판 전에 돌이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에 등장하는 축복과 저주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운명적 축복과 저주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즉 축복을 받은 이들은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하고 저주를 받은 이들은 아무리 돌이켜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운명론은 점보는 무속인들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운명이 아니라 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축복은 순종의 결과로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지금 축복을 선포했다고 해서 무조건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면 이런 축복이 그 결과가 되리라는 예고입니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축복이라는 결과를 맞이하지 못 할 것이라는 점을 전제합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여서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예고이고 그러므로 돌이키면 이 심판을 피해갈 수 있다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아합의 심판이 유예되었다는 것은 아합 왕조가 진정으로 돌이키면 그 심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말이고 지금 하는 회개가 거짓이라면 결국 잠시 유예된 심판은 얼마지나지않아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입니다.
아들은 무슨 죄인가
마지막으로 심판이 아합의 아들의 시대에 임한다면 아들은 무슨 죄입니까? 아버지가 받은 심판을 아들이 대신 받습니까? 이 질문의 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아들시대로 미뤄졌다는 말은 아합의 아들들도 그 아버지 아합의 악행을 그대로 따라할지 하나님이 지켜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들이 어떻게 살든 아버지 죄 때문에 무조건 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실제로 그 아들들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아합이 전쟁에서 죽자 그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의 행위는 어떠했을까요?
(왕상 22: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왕상 22:52)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왕상 22:5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불과 2년 밖에 안 되는 통치였지만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이 악행은 아합 못지않았습니다. 그가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이 없어 후계자가 된 형제이자 아합의 아들 여호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경고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칼을 피해 도망치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에게 새로운 사명을 받아 기름부어 세우라고 한 3명에 의해 실현됩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 아람왕국의 장군 하사엘 그리고 북왕국의 장군 예후입니다. 왕하 9장을 보면 아합의 아들 여호람왕과 아합의 아내 이세벨과 아합 왕조의 모든 왕자들이 이들의 손에 몰살되어 버려진 시체를 개들이 먹어치웁니다.
심판이 지연된 시대
하나님의 긍휼 덕분에 지연된 심판은 그러나 은혜로 얻은 기회를 내팽개침으로써 결국 다음 세대에서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심판이 지연된 시대는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토지법을 내팽개친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았듯 오늘날 이 시대에도 더욱 교묘해진 아합과 이세벨들이 수많은 나봇을 죽이고 있고 수많은 하나님의 포도원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 고통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출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출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출 22: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출 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출 22: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오늘 이 시대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시대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고 행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