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3:26-34/우시는 하나님
1800722 주일설교 요셉14
고통받는 인생
지난 주에 정말 가슴 아픈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7일 한국 경기도 동두천에서 5살 여자아이가 어린이집 통학용 밴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등교를 위해 탄 밴에서 인솔교사가 잠든 아이를 확인하지 않고 내려 문을 잠그는 바람에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폭염 속에서 7시간을 갇혀 있다가 사망한 채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안전벨트도 풀지 못 한 채 열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아이 몸이 다 뒤틀린 채 꺾여있었다고 합니다. 아이 외할머니가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아이 엄마는 계속 울부짖으며 뒹굴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해서 장례도 치르지 못 할 상황이고 외할머니도 한 주 전에 아이와 텃밭에 나가 나물을 캐는데 재미있다고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 자신도 죽고 싶다고 합니다. 불과 2주 전인 지난 5일에도 경상남도 의령에서 3살 외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려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차에 둔 것을 잊고 출근하는 바람에 4시간 동안 방치된 아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기가 막혔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부주의해서 그런 것일까? 미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산호세주립대의 연구팀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98년부터2017년까지 20년간 7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차내에 갇혀 열사병을 목숨을 잃었습니다. 1년에 35명, 한 달에 3명, 열흘에 1명 꼴입니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게도 비극이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요? 손주를 죽게 만든 할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남은 생애를 살아갈까요? 이런 일은 인간의 미련함과 부주의함, 어리석음으로 겪는 고통과 불행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잘못으로 고통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런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소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베냐민 때문에 울다
계속해서 요셉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창 43장 후반부는 요셉이 형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점심 만찬을 대접하는 내용입니다. 형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만찬을 즐기는 중에 베냐민에게 특별하게 대접하는 요셉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베냐민은 영문도 모른 채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먼저 베냐민을 생각하는 요셉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물은 요셉은 베냐민을 찾습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창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
이 짧은 구절 속에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얼마나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지 모릅니다. 먼저 베냐민은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이라고 묘사됩니다. 그 앞에 엎드린 형제가 11명이나 되었지만 그들 중에서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형제는 동생 베냐민이 유일합니다. 게다가 어머니 라헬은 그 동생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베냐민은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 채 어머니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 한 채 자랐습니다. 그런 베냐민을 보는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요셉과 베냐민은 경쟁하는 배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어머니 없이 커야만 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싸울 때면 달려가 고자질할 어머니가 있는 형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요? 요셉에게 베냐민은 어린 시절에 잃은 어머니 라헬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베냐민 역시 얼굴도 모르는 엄나를 대신하는 존재가 형 요셉이었을 것이고요. 엄마 이야기가 듣고 싶으면 베냐민은 형 요셉에게 들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형제는 함께 놀았습니다. 그랬던 베냐민을 향한 야곱의 애정이 남달랐던 것은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팔려온 후 홀로 남은 베냐민을 요셉은 얼마나 걱정하고 얼마나 보고 싶었을지요. 자신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이 동생 베냐민에게는 도대체 또 무슨 짓을 할까, 생각할 때마다 걱정이 되서 잠을 설친 밤이 하루이틀이었겠습니까! 혹독한 흉년을 베냐민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형들이 서로 도와가며 어려움을 이겨내는 동안 베냐민은 홀로 외톨이가 되어 더 굶주려야 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29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창 43:29)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은 베냐민이 맞는지 확인합니다. 22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10대 중반이었던 동생이 어느 새 3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고 걱정하며 22년이나 못 본 채 살아왔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온 마음의 소망을 담아 동생을 축복합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부모된 이들이 사랑하는 자녀, 고생하는 자녀가 잘 되기를 비는 마음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의 축복, 부모의 축복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자녀를 매일 말과 기도로 축복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면 반성하셔야 합니다. 사랑도 말로 표현하고 축복도 말로 선포하십시오.
얼마나 요셉이 베냐민을 사랑하고 걱정해왔는지가 바로 다음 구절에 잘 표현됩니다.
(창 43: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자녀들 때문에 울다
요셉을 울게 만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요셉이 그 혹독한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이유이자 힘이었습니다. 사랑은 우리 삶에도 이유이자 진정한 힘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살 힘도 없습니다. 돈과 명예와 성공이 삶의 이유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짐승의 삶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전 13:7)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 자체이십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생하는 베냐민을 사랑하여서 우는 요셉처럼 고통받는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우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방황하고 고생하는 이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백성들의 영혼의 굶주림과 육체의 굶주림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 고단한 세상에서 편히 쉬지 못 하고 밤잠 못 자고 병마와 싸우고 가난과 싸우고 편견과 싸우며 괴로워하는 자녀들을 아버지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가슴 아파 우십니다.
(눅 19:41) (예수께서)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AD 70년에 발생할 예루살렘의 파괴와 멸망이라는 혹독한 고난을 겪을 것을 내다보시며 우셨습니다. 그 때 힘없는 백성들이 겪게 될 희생과 고통, 굶주림과 폭력과 착취와 노예됨과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사로의 죽음을 마주하시고서도 가슴 아프게 우셨습니다.
(요 11:33)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나사로)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죄와 죽음의 굴레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십니다. 주님의 눈물이 우리의 위로요, 소망입니다. 주님이 눈물 흘리심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다시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만찬을 열고 베냐민을 특별하게 대접합니다. 34절입니다.
(창 43: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먹고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요셉이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무려 다섯 배나 되는 음식을 줍니다. 베냐민이 그걸 다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그걸 모르겠어요? 몰라서가 아니라 베냐민을 향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냐민이 내 앞에 와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조금 압니다. 연로하신 권사님들이 저를 대접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미 배가 차서 더 먹을 수가 없는데 계속 더 먹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부족한 목사를 사랑해주시는 겁니다. 아내가 제게 주의를 자주 줍니다. ‘여보, 사랑이한테만 너무 티나게 그러지 마.’ ‘알았어.’ 그래놓고도 저녁에 사랑이를 보면 저도 모르게 눈에 하트가 그려지고 껴안고 입맞추고 놓아주기가 싫습니다. 주체가 안 돼요. 자제가 안 돼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이유도 없이 좋은 것이지요.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이 우리 삶의 이유라는 것을 논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냥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냐민을 향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요셉처럼 죄인 된 우리를 향해 주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특별하게 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지않으려고 해도 안 되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주의하고 못나고 실수많고 연약하고 게으르고 죄많은 인간인데도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특별하게 대하십니다. 세상에 십자가만큼 죄많은 인간을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증거가 또 있을까요?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믿기 힘드실 때가 있다면 그 분의 특별한 사랑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바로 이 죄많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이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성도의 힘이요, 소망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지난 2014년 대학시절 기독학생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후배 자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두 딸의 엄마가 된 안효정 집사 가족은 그 해 2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금화터널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과속으로 달려온 트럭이 뒤에서 추돌하는 바람에 큰 딸은 온 몸이 부서지는 큰 부상을 당하고 작은 딸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큰 딸을 중환자실에 눕혀놓고 작은 딸의 장례식을 치르는 엄마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만 그녀는 이 불같은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이런 글을 남겨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와 도전을 주었습니다.
“우리부부의 오랜 기다림의 선물 복덩이 가은이를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저는 가은이를 통해 엄마가 먹으라면 썩은 것도 먹을 줄 아는 순종도 배웠고 앞뒤따지지 않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순전함도 배웠습니다… 사고 이후 금화터널 입구에는 미끄럼 방지턱이 설치되었습니다. 우리 이후로 사고가 안날거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살릴 거니까 가은이가 순교자 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뉴스에서 사고 소식을 볼때 안타까운 마음뿐 아니라 사고당한 분들과 가족의 심정을 이해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가은이가 배우고 싶은게 많았는데 …천국에서 행복하게 우리를 잘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불같은 고난을 이겨낸 힘은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우시며 십자가를 통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