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3:10-13/폐기냐 회복이냐
180121 주일설교 천국6
다미선교회와 전통적 구원관
벌써 26년 전인 1992년 연말 한국사회는 이장림 목사가 이끄는 다미선교회 사건으로 떠들썩했습니다. 그 해 10월 28일 성도들의 휴거가 먼저 일어나고 이어서 1999년에 세계종말이 온다고 믿었던 신도들은 일찌감치 학업과 직장을 그만두고 재산을 팔아 다미선교회에 모두 헌금하고는 하얀 옷을 입고 그 날 저녁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선교회 소속 교회로 몰려들어서는 열광적으로 찬양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회 앞을 가득 매운 뜨거운 언론의 취재 경쟁 속에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일부 신도는 크게 낙담하고 일부 신도는 교회기물을 부수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적지않은 이는 애써 담담한 태도를 취하려 애를 썼습니다.
군대에서 이 사태를 접한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답답함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마지막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저 사람들은 무슨 배짱으로 자기들만 그 때를 안다고 주장하는 건가. 둘째는 그들을 일부 이해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들이 시기를 잘 못 알아서 그렇지, 만약 그 종말의 시기를 정말 알게 된다면 나라도 저들처럼 일상을 뒤로 하고 주님을 기다리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신다는데 공부는 해서 무엇하며 직장생활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헛된 일인데 저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도피적 신앙입니다만 적어도 그 때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적지않은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그것은 전통적 구원관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믿어온 구원관은 ‘육체의 죽음 이후 구원받은 영이 저 하늘 어딘가의 천국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원관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이 세상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영인데 왜 죽어서 썩어 없어질 육체를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또 영원히 거할 곳은 저기 천국인데 심판받아 사라져버릴 이 땅을 왜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이런 구원관은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 더러 이처럼 육체와 삶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심각한 부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이렇게 믿어왔던 것일까요? 무엇을 오해한 것일까요? 그 오해 중 하나를 오늘 풀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저 하늘 어딘가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 땅이 심판을 받아 소멸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게 만든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후서 3장입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벧후 3:12)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0절에서는 뜨거운 불에 의해 물질이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불타거나 혹은 드러납니다. 12절에서는 하늘도 ‘불에 의해 풀어지고’ 물질 역시 불에 ‘녹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심판 때에 땅과 하늘 즉 이 세상이 불타사라지고 세상을 이루던 물질도 풀어져 사라지고 우리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강조할 것은, 성경전체에서 세상이 불로 소멸될 것이라고 해석되는 곳은 이 본문이 유일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의 첫 번째 원칙이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특정성경의 본문은 그 주제를 다루는 성경전체의 다른 본문들과의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해석하라는 뜻입니다. 이 원칙을 고려하면 여기 단 한 곳에 등장하는 표현을 근거로 땅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풀어지다’로 번역된 단어 히브리어 뤼오의 뜻입니다.
(벧후 3:10)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뤼오)… (벧후 3:11) 이 모든 것(땅과 그 중의 모든 일)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뤼오)… (벧후 3:12)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뤼오)…
풀어지다는 번역때문에 세상이 불에 의해 풀어 흩어져버리는 방식으로 소멸된다고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뤼오는 묶인 것을 풀다, 갇힌 것을 석방하다, 해방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뤼오는 물질과 땅과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흩어져 소멸된다기보다는 그것이 묶여있던 상태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의해 묶여 있었을까요? 바로 죄의 저주이지요. 이 저주를 창 4:17절이 이렇게 소개합니다.
(창 4: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아담의 죄가 초래한 저주에 묶여있던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의미합니다. 뜨거운 불이 태우는 것은 물질이나 땅이나 하늘이 아니라 그것을 묶고 있던 저주이고 그 결과 물질과 땅과 하늘은 저주로부터 풀려난 정결한 세상, 치유된 세상, 회복된 세상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10절 후반부와 11절의 문맥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벧후 3:10)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뤼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물질이 불에 의해 정화되면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숨겨져 있던, 은밀한 일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만약 뤼오를 소멸되다로 해석하면 ‘물질이 뜨거운 불에 소멸되면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는 표현이 너무나 어색합니다. 땅과 그 중의 모든 일도 같이 소멸된다고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뤼오를 불에 의해 해방되다 혹은 정화되다라고 해석하면 그 결과 땅과 그 중의 모든 일이 드러난다는 표현이 비로소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순물이 섞인 금덩어리를 불타는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이 다 걸러지고 정금은 따로 나와서, 그 전에는 섞여서 드러나지 않던 금과 불순물이 낱낱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11절도 보십시오.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뤼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여기서도 만약 불이 이 모든 것을 소멸시킬 것이라고 해석하면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다 없어지는데 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까? 만약 불이 이 모든 것을 정화시켜 은밀한 것 즉 죄와 악을 다 드러낼 것이라고 해석하면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불에 의해 정화되는 세상 속에 숨겨져있던 거룩하지 않은 행실들도 다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베드로후서 3장 전체를 해석하면 그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주의 날이 임하면 심판의 불에 의해 모든 숨겨져있던 은밀한 죄와 악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이 세상은 정화되고 정결케 됩니다. 즉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세상, 죄와 악으로 병들지 않은 세상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곧 새하늘과새땅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 소망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폐기냐 회복이냐
‘아, 목사님의 말씀은 지금 이 땅이 심판의 불에 의해 폐기되고 저 하늘 어딘가에 있는 새하늘과새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을 정화시키고 정결케하고 회복시켜서 이 땅 위에 새하늘과새땅을 만들어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네, 정확히 맞습니다. 이 땅을 폐기시키지 않고 회복시키신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결국 어떻게든 새하늘과새땅에서 살게 된다는 결론은 똑같지 않나요? 새 것을 가지고 오나 있던 것을 고쳐쓰나 뭐가 다릅니까?’ 이렇게 반문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답을 드리자면, 확실히 이 두 가지는 다릅니다. 만약 땅이 폐기된다고 믿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의 삶이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6일에 걸쳐 창조하시고 그 과정을 창세기에 자세히 소개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인간에게 이 세상을 돌보고 관리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폐기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도 인간의 임무도 결국 모두 실패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직업과 모든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어차피 폐기될 땅 위에서 어차피 소멸될 일들을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저 죽어서 갈 천국을 준비하는 것만이 의미를 가지게 될텐데 그렇다면 가장 그런 준비를 잘 하는 사람들이 다미선교회 사람들인 것입니다.
반대로 이 땅이 폐기되지 않고 정화되고 회복되어 새하늘과새땅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현재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과 이 땅 위에서의 모든 일상은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 전 설교에서 부활의 몸이 현재의 이 몸과 연속성이 있다고 한 것처럼 새하늘과새땅에서의 삶도 오늘 우리들의 일상과 분명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이 땅과 일상은 영원과 맞닿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의 삶의 일부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헛되지 않은 이 땅의 삶
제3세계의 빈곤국의 원조와 구제활동을 하는 영국의 자선단체인 Christian Aid의 슬로건은 ‘우리는 죽음 이전의 삶을 믿는다’입니다. 이 단체가 빈곤국가를 돕는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것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것이 곧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새하늘과새땅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땅이 버려질 땅이 아니라 정화되고 회복되어 영원히 살아갈 땅이기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빈곤과 착취와 불의와 전쟁을 대항해서 싸우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의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한 장엄한 예언을 한 후 이렇게 선언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건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
오늘 여러분이 이 땅 위에서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해 무엇을 하든, 새하늘과새땅의 건설을 위해 그 무엇을 하든,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어떤 직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그 모든 것이 주의 일이라면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닌 줄로 믿습니다. 이 땅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정화되고 정결케되고 치유되고 회복되어 새하늘과새땅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영원의 가치를 가집니다. 무엇을 하든 그 영향이 영원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이 숙제를 풀어가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