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7 과학과 신앙 / 창1:1~5

20170917 과학과 신앙 / 창1:1~5

창 1:1-5/과학과 신앙

170917 구역모임

공룡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번에 한국에 갔다가 대학시절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대학교수였다가 지금은 어느 로펌의 언론홍보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최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데 제가 뭐라 할 때마다 ‘마음으로는 믿어’라며 상황을 모면하곤 했습니다. 오랜만에 목사 친구를 만나자 평소 궁금했다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김목사, 성경이 공룡을 설명할 수 있어?’ ‘욥기에서 묘사하는 거대한 하마와 악어가 공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 ‘그 묘사가 공룡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혹은 그 연대를 설명할 수 있어?’ ‘그런 건 증명할 수 없지.’ ‘성경이 공룡을 설명하지 못 하는 것 때문에 믿음을 가지지 못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 ‘이교수, 지금 남아있는 생물종보다 멸종된 생물종이 더 많다고 하고 지금도 매년 100여 종이 멸종하고 있어. 오래 전에 멸종된 생물종 중 하나를 성경이 설명하지 않다고 해서 성경을 못 믿을 책이라고 한다면 대학교수의 논리치고는 너무 부실하지 않아?’ 그렇게 시작된 친구와의 대화는 과학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한참을 진행되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고대인들과 달리 직면한 도전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분명 과학과 신앙 사이의 갈등입니다. 과학과 신앙이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아서 진화론 혹은 빅뱅이론, 138억년이라는 우주의 나이 등을 들으면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특히 자녀들이 질문을 해오면 더욱 난감해집니다. 이 때 사람들이 택하는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의 부정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과학을 부정합니다. 과학이 마귀와 무신론자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믿고 거부하거나 공격합니다. 둘째 신앙을 부정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창조를 믿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져서 교회를 떠납니다. 셋째 문제를 부정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과학이론을 들어도 잘 모르겠고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니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덮어놓고 믿기만 하자고 위안합니다. 어느 입장이든지 과학에 대한 두려움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오늘은 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이라는 문제를 풀 방법은 없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방법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전제를 하나씩 바로 잡아나감으로써 진실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책인가

첫 번째 다룰 전제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권위를 오해한 나머지 과학책처럼 읽습니다. 성경은 절대적 권위의 책이니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고 과학분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 결과 과학계의 연구성과를 부정하고 흔히 창조과학이라고 알려진 이론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조과학의 주장은 흔히 젊은지구론으로 알려졌습니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을 과학책의 서술처럼 읽어서 하나님이 6일 동안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창조는 6,000천 년 전에 이루어졌고 현재의 지질상태는 노아의 홍수에 의해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창조과학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안도감을 준 반면 과학계에 종사하거나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 교회 밖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을 반지성적인 집단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최근 한국의 중소기업부 장관 후보자였던 기독교인이 창조과학회 활동을 이유로 과학계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받기도 했던 것이 그 예입니다.

창조과학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과학책처럼 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계시의 책입니다. 무엇을 계시합니까?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구원의 지혜와 선한 일을 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을 계시합니다. 장로교를 비롯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1장 성경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책(신약과 구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된다.’

성경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계시하기 위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계시의 책을 과학책으로 읽어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구약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우리가 삼겹살을 멀리 하지 않듯, 여자는 교회에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잠잠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우리 자매들이 히잡을 쓰거나 찬양대, 기도자, 구역일꾼 등에서 배제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구원의 길과 삶에 관한 계시와 당시의 문화적 요소를 분리해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기록 역시 고대 근동의 문화적 이해가 반영되어 있기에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문화적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기원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의 목적을 깨닫게 되고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현대과학의 언어로 억지로 끼워맞추는 과오를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은 창조를 부정하는가

두 번째 다룰 전제는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과학의 성격을 오해하고 그 능력을 맹신한 나머지 과학의 발전이 무신론을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리차드 도킨스같은 일부 맹신적 무신론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그 주장을 듣는 일부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의 성과를 인정하면 창조신앙이 부정당한다고 불안해합니다.

먼저 무신론과 과학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면, 무신론은 과학의 발전으로 생겨난 사상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도 무신론자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고소당했고 그리스 초기의 유물론 철학자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히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이들에 대한 묘사가 나오지요.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 말은 무신론과 과학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도 무신론은 존재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무신론이 증명된 것도 아닙니다. 과거에는 신의 존재를 빠뜨리고는 세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의 발전으로 신의 의지나 역할 없이도 자연의 내재한 법칙으로 자연현상이 거의 설명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과학이 신이 없음을 증명한 것이 아닌가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신의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고 세상을 설명하는 이유는 신을 자연현상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 자체에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싸도 일반카메라로는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찍을 수 없고, 내 카메라가 못 찍는다고 자외선이나 적외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인간이 발견한,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방법 중 하나인 과학적 인식방법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이 찾아보니 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과학은 신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과학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옥스포드대학의 면역학자 피터 메더워 경은 ‘과학의 한계’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씁니다.

‘과학의 한계는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의 존재에 의해 드러난다.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상상할 수 없이 과학이 진보한다고 해도 이 질문들에 대답할 능력이 과학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과학의 연구성과는 철저히 중립적입니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듯이 신의 부재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지만, 동시에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과학의 성과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탁월한 과학자들이 신실한 신앙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 속에만 계시는가 

마지막으로 다룰 전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초월적 세계 속에 가두어 둡니다. 수술을 해서 병이 나으면 의사에게 고마워하고 의사가 못 고친다는 병이 나으면 그제서야 기적이라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의 한계를 초월한 세계 속에만 계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초월해 계신 분일뿐 아니라 그 자연법칙 속에 내재해 계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시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지옥)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시 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의 영은 천국과 지옥 뿐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 그 어디에도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기도 하셨지만 대부분은 제자들의 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셨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의 도네이션을 받은 것으로 제자들과 함께 드셨습니다. (가롯 유다는 제자들 중에 헌금관리를 맡은 이로서 오늘날로 치자면 재정부장 정도가 됩니다.) 하나님은 초월 속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 속에 계시며 역사하십니다. 이 말은 곧 한 순간에 우주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셨다 해도 하나님의 창조이지만, 긴 시간 동안 자연법칙을 사용하셔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셨다해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인 것은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대과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창조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신앙은 창조과학과 다릅니다. 창조신앙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와 주권을 믿는 신앙이라면 창조과학은 그 창조가 창세기의 문자 그대로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조신앙은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창조과학은 일부일 뿐입니다. 우주와 지구의 나이, 빅뱅과 우주의 팽창, 진화와 종별 창조 등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변수로 해서 다양한 창조신앙이 조합됩니다. 이 많은 입장 중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자요, 주권자시라는 것만이 진리입니다. 그 창조방법은 더 겸손한 연구와 신중한 분별과 시간의 검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연구성과와 창조방식에 대한 입장은 좀 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천동설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을 때 이를 인정하면 지동설을 믿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무너질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모두가 천동설을 믿지만 기독교 신앙은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성장,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현대과학의 이론들을 인정하면 창조신앙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합니다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론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많은 과학 이론 중 일부는 폐기될 테고 일부는 수정, 발전될 터이고 또 새로운 이론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이론들을 지나치게 맹신할 필요도,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진리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물의 아버지시라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일하시고 만물 가운데 계시도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담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