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25/주님의 길을 닦는 자
161204 대강절 2주
의인의 삶에도 낙심이 있는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의 한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집사님이 아는 한 누구보다 신실하고 겸손한 가정이 있는데 좀처럼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입도 넉넉치 않은데 그 집 아내는 퇴행성 류마티즘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부부도 기도를 많이 하고 이 집사님도 그 부부를 위해 기도하는데도 건강도 경제적 형편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삶에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실망스러운 현실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많습니다. 필립 얀시의 책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이 미국에서 올해의 기독교도서상을 수상하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의인들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런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에서 힘을 얻으라
오늘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하여 벌어지는 사건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세례 요한의 탄생예고사건입니다.
본문에서 듣는 첫째 교훈은 성도가 고난을 이기는 힘을 얻는 곳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의 부모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고대사회에서는 결정적인 불행의 조건을 가졌는데 자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야 불임이 생물학적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또 자유로운 삶을 위해 의도적으로 자녀를 갖지 않으려는 사람들까지 있지만 고대에는 자녀를 가지는 것을 가문과 사회에 대한 의무인 동시에 도덕적 의무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갖지 못 한 여자는 그 이유만으로 이혼을 당하기도 하고 남자 역시 가문과 사회로부터의 압박과 눈총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오래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 했습니다. 그런 그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아들을 얻으리라는 예고를 듣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입니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이 출생 예고를 그가 받은 시점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눅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새 (눅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그는 제비뽑기에 의해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고 성전 안에 들어가 분향까지 하는 직무를 감당하던 중 이 예고를 받습니다. 당시 24반열에 속한 18,000명의 제사장은 일 년에 두 차례 한 주씩 성전업무를 섬겼는데 그들 중에서도 희생제사와 분향을 맡아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제비를 뽑아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 뽑히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로또나 다름없는 일이었는데 사가랴가 뽑혀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를 축복하는 기도응답을 희생제사를 드리는 순간 즉 예배의 자리로 일부러 택하여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줍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자녀들을 축복하시는 순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고 이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 있는 성도는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을 성도는 예배를 통해 얻습니다. 예배를 출석도장 찍듯이 무심히 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가지고 예배에 임하십시오. 사가랴처럼 성도 여러분의 예배도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을 경험하는 순간이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상한 마음을 돌이키라
둘째 교훈은 고난을 겪으며 상한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며 그의 사명도 동시에 밝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으며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먼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세례 요한이 부여받은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마음은 자아를 숭배하고 욕망에 이끌려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을 섬기던 마음으로는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욕망을 섬기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돌아서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계시록은 그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우리 구주로 영접하려면 우리 마음 문을 열어야만 합니다. 목사가 자주 받는 질문이 ‘믿으려고 하는데 잘 안 믿겨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 마음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을 향해 열어놓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닫아놓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도들이 고난과 실망을 겪을 때 마음이 닫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필 나입니까 하는 불만이 생기고 마음문이 닫힙니다.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 해 마음이 답답하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마음 문을 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나름 적지않은 설명을 들었지만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리세계의 원리 하나도 온전히 이해 못 하는 인간이 영적세계의 모든 원리를 이해하지 못 하기에 하나님께 무릎 꿇지 못 하겠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해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이해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성도들이 고난을 대하는 자세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분의 인도를 구하면 역설적으로 고난에 대한 이해를 얻고 마음의 치유를 얻고 고난을 이길 능력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예수님을 영접했듯이 오늘 우리의 마음도 성령님께서 돌이키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라
셋째 교훈은 고난 중에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사가랴는 아내와 함께 아들을 주시기를 기도해 왔고 마침내 그 응답을 받았습니다만 그 반응을 보면 그가 정말 기도 응답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의심하게 합니다. 응답을 받은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눅 1: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 (눅 1: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 (눅 1: 20) …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 합니다. 놀라고 의심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기도는 하고 있었으니 이미 응답의 기대는 접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응답의 기대 없이 기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도하지만 바뀔 것이라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환우를 위해 기도하지만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불의한 자가 회개하기를 위해 기도하지만 심지어 저런 인간은 제대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정말 회개해서 용서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까지 합니다.
사가랴가 이렇게 믿음없이 기도했는데 응답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가랴의 기도는 자신도 몰랐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부합하였던 것입니다. 기도응답의 비밀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권합니다.
(요일 5: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기도가 되기를 함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때로 그 반대로 행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정말 유익한 것입니다.
특히 쉽게 끝나지 않는 고난을 겪는 성도의 경우 이 기도가 절실합니다. 치유되지 않는 질병, 나아지지 않는 형편, 개선되지 않는 관계와 같은 문제로 신음할 때 우리는 무조건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기에 앞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의 바램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지만 일단 그 뜻에 겸손히 순종하고 나면 오히려 자유와 치유를 얻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되고 다른 차원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좀처럼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던 성도의 기도가 일치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순간은 정말 큰 은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끝난 것과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라
마지막 교훈은 성도가 바라볼 비전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을 기다리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응답은 사가랴 부부가 기대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13절 이하를 보십시오.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사가랴는 그저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선지자를 주셨습니다. 사가랴는 그저 자신과 아내가 이 아이로 행복하게 될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의 시야는 우리 한 몸의 안위와 행복에 머물러 있지만 하나님의 시야는 우리를 포함하여 온 인류와 역사의 구원과 완성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필요를 세심하게 채우시지만 동시에 모든 인류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위대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면서도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연주를 기가막히게 조율하여 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면 시야가 더 좁아집니다. 오로지 고난을 피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좁아진 시야는 우리를 더 두렵게 만들고
사가랴는 아들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선지자를 주셨습니다. 우린 그저 눈 앞의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영원한 죄와 죽음에서 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린 그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기만 원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복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린 그저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이라도 살면 족하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한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도 없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가 영생의 복을 누립니다. 이처럼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을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삶에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비록 시야가 좁고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살더라도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더라도 놀라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겸손하게 그 일하심에 순종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이 성탄을 기다리는 계절에 여러분의 마음에 가브리엘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