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 감사하는 사마리아인 / 눅17:11~19

20161120 감사하는 사마리아인 / 눅17:11~19

눅 17:11-19/감사하는 사마리아인

61120 추수감사주일설교

아빠를 기쁘게 하는 자녀

김기동 목사의 고구마전도왕이란 책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휴일에 신문값을 받으러 사람이 왔는데 김목사가 아무리 찾아도 지갑을 못 찾겠더랍니다. 그래서 열 살 된 딸아이를 불렀습니다. ‘얘, 어제 아빠가 용돈으로 준 만 원짜리 좀 주려무나. 지갑 찾으면 줄게.’ ‘싫어, 아빠가 나 줬잖아. 내 돈이야.’ 순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이 여덟 살 된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한 순간의 고민도 없이 얼른 만 원짜리를 꺼내 주더랍니다. 신문값을 줘서 사람을 보내고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넌 만 원이 아깝지 않니?’ ‘원래 아빠 돈이잖아요. 아빠가 주신 거잖아요.’ 그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이쁜지 지갑을 찾아서 아들을 불러 2만 원을 쥐어 줬습니다. 딸아이가 나섭니다. ‘아빠, 만 원 줘야지, 왜 2만 원 줘?’ ‘아빠 말에 순종을 잘 하는 것이 이뻐서 상으로 2만 원 준다.’ ‘그럼 아빠, 나도 만 원 가져가고 2만 원 줘.’ ‘늦었어. 이 녀석아. 넌 이미 찍혔어.

’왜 김목사의 딸아이는 아빠를 섭섭하게 하고 아들아이는 아빠를 기쁘게 한 것일까요? 딸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빠가 준 용돈이었고 아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용돈을 주신 아빠였던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수 있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차이가 아닙니다. 이런 차이가 성도의 믿음 안에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차이는 결코 가볍지않은 운명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 믿음의 차이는 어떤 것이며 그 차이가 초래하는 운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차별적인 은혜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시는 중에 벌어진 치유사건입니다. 11절을 보면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그러므로 12절에 등장하는 열 명의 나병환자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섞여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아마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듣고 있었을테고 그래서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은 레위기와 민수기의 율법이 규정하는 바 일반인들과 섞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때도 예수님을 보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쳐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에게 보내셨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는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고대사회에서도 가장 멸시받고 부정한 나병환자들이었고 또한 그들 중에는 인종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개보다 더 멸시받는 사마리아인들이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부정하다고 멸시하지 않으시고 네 인종이 무엇이냐고 차별하지도 않으시고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병에 걸렸냐고 비난하지도 않으시고 그 죄가 크냐, 작냐고 판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두에게 차별없이 조건없이 치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무차별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죄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부어집니다. 신분도 성별도 인종도 과거도 묻지않고 심지어 죄의 크기도 가리지 않고 부어집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는 씻어내고야 마는데 그 이유는 그 죄가 무겁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는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주님의 은혜는 해와 비처럼 모든 이에게 조건없이 제한없이 차별없이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힘입어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의 세례를 오늘도 받고 살아갑니다. 이런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고 전하시고 주님을 높이는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두 차원의 믿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사건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주님의 치유사건 중 하나로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난 일로 인해서 이 사건은 믿음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내며 복음서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열 명의 나환자 중 한 사람인 사마리아인이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주님은 먼저 아홉 명의 치유를 받았으나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꾸짖으시는 동시에 돌아온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시면서 두 부류의 믿음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아홉 명의 돌아오지 않은 이들은 믿음이 없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분명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졌고 그것을 간구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하실 때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가 완치되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면 의사가 없던 고대의 의사노릇도 했던 제사장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을 너희가 완치되었으니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듣는 시점에서 그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의심과 불평이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뭐야, 우리 몸은 그대론데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되었다는 확인을 해달라고 하란 말이야?’ ‘이대로 제사장이 있는 성전 가까이 갔다가는 돌에 맞아 죽어.’ ‘저 사람, 사기꾼 아니야? 고쳐주고 나서 가 확인을 받으라고 해야지. 고쳐주지도 않은 채 고침을 받았다는 확인부터 받으라니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에게 갔고 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아홉 명의 나환자들이 가졌던 믿음을 응답받는 믿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응답받는 결코 작은 믿음이 아니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를 경험하는데는 충분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한 믿음은 오직 한 명,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깨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구원을 가리키는 단어는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러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하셨을 때 사용하셨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감사하는 믿음은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해줍니다. 주님의 이 선언으로 한 가지가 확실해졌습니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한 명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열 명이 축복을 받았지만 한 명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응답받는 믿음은 축복을 누리게 해주지만 감사하는 믿음은 구원을 누리게 해줍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도 행했습니다’라고 하는 이들을 향해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자마다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힌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기도하고 축복받고 응답받는 이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이들은 그리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열 명의 한 명일 정도로 말입니다.

 

두 믿음의 목적

그러면 이 두 가지 믿음, 응답받는 믿음과 감사하는 믿음에는 무슨 차이가 있길래 구원의 유무라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까? 그것은 두 믿음이 사랑하는 대상의 차이입니다. 응답받는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일단 그 선물을 받게 되면 주신 분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돌아올 이유도 감사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감사하는 믿음은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선물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주님을 잊지 않습니다. 더 큰 선물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주님에게로 그 시선이 향합니다. 그는 선물을 받은 것보다는 그 선물을 주신 분이 중요하기에 돌아와 그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사는 단순히 땡큐하는 마음자세를 가졌느냐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않는지의 증거인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딸아이는 아빠에게 받은 만 원을 사랑했기에 그것을 내놓기를 싫어했지만 아들아이는 아빠를 사랑했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이 사업을 실패해 더이상 돈을 벌어오지 못 하면 화가 납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이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질까봐 더 마음이 아픕니다.

개신교, 카톨릭, 정교회 그리고 소종파까지 합치면 오늘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것이 과연 주님일까요, 주님이 주시는 선물일까요? 이 본문의 사건을 굳이 일반화를 시켜본다면 그들 중 주님의 선물이 아니라 주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는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선물을 사랑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인생

그 증거는 바로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삶이 어려워지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이 쏟아집니다. 감사는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왜 아홉 명은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그들이 건강을 되찾은 것을 아마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원래 그들은 건강했다가 나병에 걸렸겠지요. 그들 자신의 건강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원망과 저주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들은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건강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돈을 빌립니다. 천불만 빌려주라. 5백불 밖에 없는데… 그럼 지금 5백불 주고 나머지 5백불은 생기는 대로 줘라. 응? 그래야되나? 당연하지. 내가 천불 필요하다고 하잖아.’ 조크입니다. 이 조크의 웃음포인트는 무엇입니까?  돈을 빌리겠다는 사람이 그것을 은혜로 알지 않고 자신의 권리로 아는 뻔뻔함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꼭 이와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학교를 졸업하는 이가 자신의 학력이면 최소 연봉 10만 불 직장은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취업한 곳에서 6만 불 밖에 안 됩니다. 그의 마음에는 감사가 아니라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왜일까요? 10만 불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만 불이든 6만 불이든 모두 은혜라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사가 없습니다.

제가 성균관대에 입학하여 과 신입생 환영회에 갔습니다. 한 명씩 입학소감을 밝히라고 했더니 앞선 신입생들이 한결같이 자신은 서울대 가려했는데, 연대 가려했는데… 하고 소감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입생들의 소감을 듣고 기분 좋을 선배가 어디 있을까요? 선배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떨떠름합니다. 얼마나 초라한 모습입니까?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왜일까요? 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챙피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저는 성대 입학한 것이 정말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최고의 복이라고 믿습니다.’ 일그러져있던 선배들의 얼굴이 그제서야 환하게 펴지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럴진대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이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으로 사는 인생과 자신이 받은 것은 한없는 은혜인 줄 알고 그 은혜의 선물을 주신 이를 더욱 사랑하는 인생 중 어느 것이 더 귀하겠습니까!

주님의 선물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를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님도 그러하셨듯 열에 하나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뉴저지장로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주님의 선물이 아닌 주님 그 분을 사랑하고 감사가 넘치는 인생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