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0 아브라함의 믿음 / 롬4:1-8

20160110 아브라함의 믿음 / 롬4:1-8

롬 4:1-8/아브라함의 믿음

160110 주일설교

선행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

작가 데이비드 그레고리가 쓴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닉 코민스키가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형식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놓은 책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 하는 닉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닉, 당신이 아는 가장 선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글쎄요, 마더 테레사가 아닐까요?’ ‘그럼 명함을 한 장 꺼내서 세로로 놓고 가장 윗부분에 선을 가로로 긋고 그녀의 이름을 써보세요. 그리고 가장 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마 히틀러겠지요.’ ‘그럼 그의 이름을 가장 아랫 부분에 역시 선을 긋고 그의 이름을 써보세요. 이제 닉 당신은 두 사람 사이 어디 쯤 있습니까?’ 닉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자신의 이름을 중간에서 조금 위에 써넣었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드리죠. 이 명함을 시카고의 시어스타워 맨 아래층에 세워놓는다고 가정하면 하나님의 기준은 100층 높이의 타워 맨 꼭대기에 있습니다.’ ‘아니, 그럼 테레사와 히틀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다는 겁니까?’ ‘두 사람은 분명 같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테레사의 선행조차도 히틀러처럼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완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기독교의 진리 한 가지를 쉽게 설명해 줍니다. 그 어떤 인간도 선한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구원은 선한 삶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그 다른 길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설명해 왔습니다.

 

행위의 한계 

우리의 로마서 여행은 어느덧 3장을 마치고 4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로마서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는 4장까지 이어지고 5장부터는 구원받은 성도의 새 삶에 대해 설명을 시작합니다. 오늘 읽은 4장에서는 3장까지 설명한 구원의 교리를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예를 드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해줍니다. 제일 먼저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역시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는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유대인들의 조상이자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브라함조차도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받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선한 삶을 살았다는 마더 테레사조차도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는 근처에조차 못 간 것과 같습니다. 테레사도, 아브라함도 인간 앞에서는 모르겠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인간 앞에서의 온갖 자랑은 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마치 동네에서는 공부 좀 한다는 아이가 강남 8학군으로 이사를 갔더니 반에서 꼴찌도 간신히 면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아브라함이 믿은 것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까? 3절입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인용하는 장면은 창세기 15:5-6입니다.

(창 15:5) 그(아브라함)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이로 여기시고

바로 전 장면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미 100세이니 늙어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자녀를 주실 뿐 아니라 그 자녀가 엄청나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첫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 둘째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그런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그리고 약속한 바를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이 포함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이 능력과 사랑과 신실함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 능력과 사랑과 신실함을 가장 놀랍고도 선명하게 드러내준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그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적용시키셔서 지키셨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할 방법을 찾아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방법은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대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성육신 하셔서 자신들의 구주를 영접하지 않는 백성들, 도무지 믿지 못 하는 제자들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신실함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망 없는 죄인 된 우리를 기어이 구원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신실함을 온전히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대가가 아닌 은혜 

이 모든 소식을 우리가 복음, 기쁜 소식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 모든 구원의 역사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거저 누리는 것이기에 그 구원은 은혜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롬 2: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기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해서 그에 합당한 일당을 받는 이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습니다. 일을 안 했는데도 일당을 받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이것은 당연한 대가, 보수가 아니라 은혜요, 선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를 예수님이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유 속에서 포도원 주인은 일꾼을 아침 9시, 낮 12시, 오후 3시 그리고 5시에 눈에 띄는대로 불러다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6시에 일을 끝내고는 언제 왔든 상관없이 모두 하루치 일당을 한 푼도 빼지 않고 다 줍니다. 이 일당은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일터를 찾지 못 하고 어떤 농장주에게서도 선택되지 못 한 일꾼들에 대한 은혜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죄인들이 의롭다는 인정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선한 삶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공로가 아닙니다. 종종 믿음이 선행을 대신하는 인간의 공로라고 착각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믿음이란 마치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시장에서 방황하던 일꾼들이 지금이라도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라는 자비로운 주인의 초청에 응해서 주인을 따라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연장 들고 제대로 땀도 안 흘렸는데 하루치 일당을 다 주는 것을 보고는 ‘보라, 내가 주인을 따라 들어왔으니 그 공으로 일당을 받는 것이 아니냐.’고 할 일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믿음은 결코 공로가 아니라 은혜를 거저 받아들이는 겸손함입니다.

이런 겸손한 믿음을 허락받아 소유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믿는 자의 복

그러므로 공로도 없이 죄사함을 받는 성도들은 얼마나 큰 복을 누리는 것입니까? 6-8절이 이에 대해 선언합니다.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롬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선하게 살지도 못 했고 살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왜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시고 천국 시민권을 거저 주십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일도 하지 않고 보수를 받은 포도원 일꾼들처럼 우리는 선한 삶도 없이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복인지요,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얼마나 큰 선물인지요!

이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아본 분이 계십니까? 세계적인 축구선수 크리스챤 호날도가 어머니 생일선물로 7만불 짜리 포르쉐 승용차를 선물했다고 언론에 보도되더군요. 세상 어떤 선물이 영원한 생명에 비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은혜를 누려본 분이 계십니까? 교통경찰이 티켓 한 장만 없던 것으로 해주어도, 값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기만 해도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제받은 은혜에 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복을 누리는 분이 계십니까? 부자집 자녀로 태어나면 금수저를 물고 났다고 부러워하는 세상인데 온 우주의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이 복과 비할 복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복을 감사하지 못 하고 세상의 복만을 그렇게 부러워하며 세상 복을 더 누리지 못 하는 것으로 안달복달 하며 사는 것일까요? 이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복을 날마다 누리고 전하며 사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