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6 듣기 거북한 말씀 / 요 6:52-65

20210926 듣기 거북한 말씀 / 요 6:52-65

요 6:52-65/듣기 거북한 말씀

210926 오병이어6
1. 은혜 받은 사람
가수이자 배우인 엄정화 씨는 여러 지인들로부터 전도를 받았지만 신앙은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나 가지는 것이라 여기며 무시했습니다. 개그우먼 이영자 씨가 ‘메리 크리스마스, 하나님이 널 사랑하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손발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니엘 헤니라는 배우와 영화를 찍는데 그와 매니저, 그 소속사 스텝들이 다 기독교인인데 그들이 겸손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며 기독교인은 뭔가 다르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애완견을 데리고 남산 산책길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하나님 생각이 떠오르더니 내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 걸까? 정말 그러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세요. 내려가는 동안 십자가가 보이면 어느 교회든 들어가서 기도할게요.’ 그러나 산을 다 내려오도록 십자가가 안 보였습니다. 그러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은 다 만나주시면서 저만 무시하는 거세요?’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만 이러시면 안 되죠. 교회가 없으면 천사라도 좀 보내주세요.’ 급기야 눈물이 펑펑 쏟아져 엉엉 울고 있으려니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릴 적 둘도없는 단짝이었는데 결혼 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통화하며 지내는 친구였습니다. 늘 엄정화 씨를 위해 기도해주던 그 친구가 그 날 교회에 갔는데 왠지 자꾸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는 겁니다. “정화야, 왜 울어?” 이러이러해서 울고 있다고 하니 조용한 곳에 앉아서 자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로 시작하여 영접기도를 드린 그녀는 그 주부터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첫 날부터 1년 동안 예배 때마다 자리에 앉으면 그냥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어느 주일, 그 날도 엉엉 울고 일어나려니까 한 자매가 다가오더니 ‘자매님, 이젠 기쁘게 예배드리시래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음 주일부터 정말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고 마음에 기쁨이 그렇게 솟아났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배나 기도 중에 혹은 성경을 읽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엄정화 씨처럼 크게 우는 경험을 합니다. 이럴 때 흔히 우리는 은혜받았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그들은 왜 우는 것일까요? 정확히 이건 무슨 일일까요? 이렇게 울어보지 못 한 이들은 그럼 은혜를 못 받은 것입니까?
2. 거북한 말씀
오병이어 기적으로 시작된 예수님과 무리들의 대화를 다룬 요한복음 6장 후반부를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므로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이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입니다. 당신을 먹고 마심이 무슨 뜻인지도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음이며 둘째 또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므로 예수님을 먹고 마심이 곧 말씀을 먹고 마심과 다르지 않습니다. 셋째 그것은 예수님이 삶의 이유가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요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무리들은 아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몰이해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60절입니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듣기가 어렵다. 이 말의 뜻은 이해가 안 된다기 보다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생에 이르는 길 즉 예수님을 믿고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그 분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요구가 제자들이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면 분명합니다. 61절을 보십시오.
(요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걸림이 된다 즉 ‘이해가 안 된다’가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렵다’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더 분명합니다.
(요 6:61)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알아채시고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못마땅하고 거슬립니다.
3. 거슬리는 이유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 왜 제자들에게는 못마땅하고 거슬릴까요? 나를 믿으라, 나를 먹고 마시라, 내 가르침을 새겨라, 이것이 영생의 길이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 전혀 거슬리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역으로 그들에게 너무나 익숙치 않은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오랜 세월 품고 살아와 그들의 일부가 되어버린 가치관과 충돌하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로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렵습니다. 수용이 안 됩니다. 마음에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걸림이 되고 못 마땅하고 거슬립니다. 그들이 가진 기존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5:41 이하에 잘 나와있습니다.
(요 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들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서로 높이면서 만족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판, 존경, 성공의 자부심,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구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하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높여줄 다른 메시야,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세속적 메시야, 그들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을 예의바른 메시야를 원하고 그들을 영접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신들이 세워놓은 왕국에 부귀와 안락을 더해줄 메시야를 기다리지, 왕좌에서 내려와 참되신 왕 하나님 앞에 굴복하라고 가르치는 메시야는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걸림이 되고 못마땅하고 거슬렸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믿어서 영생을 얻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해온 것처럼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해야만 받는 하나님의 은총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괜찮은 인간이라고, 더 나아가 하나님처럼 높여주는 자부심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양식을 구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양식을 더욱더 많이 쌓아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신분에, 십자가에 희생되는 메시야는 그들이 기대했던 영광스러운 메시야, 그들을 부와 성공의 자리로 끌어올려줄 메시야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살리시는 성령님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따르지 못 하는 이유를 드러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고 비껴듣고 골라듣고 귀를 닫고 듣습니까? 왜라고요? 거북하고 거슬리고 못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왕인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종이 되라니요! 인간은 스스로 그 교만과 오만을 버리고 왕좌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절대 무릎 꿇지 못 합니다. 인간은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굴복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절망적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까요? 그 방법을 예수님이 두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첫째 답이 62절입니다.
(요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이 못 믿겠다고?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것 승천을 보게 될 것이다. 승천은 곧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모두 가리키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못 하는 이들의 모든 죄의 짐을 다 벗기셨습니다. 두 번째 답이 63절입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 말이 거슬린다고? 그러면 너희를 살리시는 성령을 보게 될 것이다. 성령님은 너희 죽은 영을 살리신다. 육체,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나는 너희에게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가르쳤다. 즉 자신이 왕된 삶을 살아온 죄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영생의 길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감화감동하심을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 마음의 오만과 교만의 둑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망치가 됩니다. 성령님은 그 망치를 휘둘러 그 둑을 무너뜨리십니다.
5. 둑이 무너진 사람들
그 둑이 무너질 때 사람들의 영은 큰 지진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부활하실 때, 성령이 임하실 때 큰 진동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8:1)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영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영혼, 성령님이 임하는 영혼에는 예외없이 지진과 진동이 있습니다. 그 뒤흔드는 진동으로 견고하고 완고하던 교만과 오만의 둑이 무너집니다. 그 둑이 무너질 때 갇혔던 영혼의 슬픔과 아픔과 상처와 고통의 물이 쏟아집니다. 그 물이 바로 눈물이 되어 터져나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만날 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쏟아진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그 눈물의 성분을 다 모릅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이 섞여 있는지, 얼마나 많은 회한과 죄송함이 들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감사와 감격이 요동치는지 다 계산해볼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둑이 무너집니다. 이 둑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역사만이 무너뜨리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영혼이 없습니다. 65절을 보십시오.
(요 6:65) 또 이르시되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와 성령님으로 인하여 그 마음의 교만과 오만의 둑이 무너지지 않은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는 구원과 상관이 없이 여전히 자신이 왕되어 살아가는 이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이들이 엄정화 씨처럼 펑펑 울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둑이 무너질 때 펑펑 우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는 것이 아니라 오만과 교만의 둑이 무너져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하나님께 굴복한 이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는지 아닌지로 반드시 드러납니다. 바울처럼 극적으로 회심한 이도 있지만 디모데처럼 가랑비에 옷젖듯이 회심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나님에게 굴복한 이후 그들의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교회 와서 펑펑 울고도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이 왕되어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사실은 살리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교만과 오만의 둑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정의 수문을 열고 조금 흘려보내 자기위안을 삼은 것입니다. 그런 이는 울어도 성령님과 상관없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살펴보지 않아도 더 빨리 알 수 있는 자가진단키트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주의깊게 보십시오. 둑이 무너지기 전 주님의 가르침은 듣기 거북하고 불편한 말씀입니다. 둑이 무너지고 나면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십니까? 저와 여러분 마음의 오만과 교만의 둑이 완전히 무너져내려 모든 주님의 말씀이 달고 오묘하게 들리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