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7:40-52/그리스도를 닮은 마음
220123 초막절5
1. 이순신 장군의 자살
잘 아시는 대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 노량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어 자살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전에서 이기든 지든 자신은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고 그럴경우 가족들까지 변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던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쳐 원성을 산 자신과 달리 이순신 장군과 같은 전쟁영웅과 의병장들이 백성의 큰 지지를 받는 것에 시기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이순신 장군을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려고 했으며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혐의를 씌워 죽였습니다. 정여립 사건 때는 아무 관계없는 이들까지 1,00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유형은 생전 이순신 장군의 결심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마음속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김덕령 장군의 전기인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에는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김덕룡 장군이 (선조에 의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조심하여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했다.’
2. 의인을 죽이는 악
선조의 시기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구국의 영웅들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더 나아가 임진왜란의 혹독한 재앙을 견뎌내고도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지 못 하게 발목을 잡아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기는 의인을 죽이는 악입니다. 인류역사 내내 수많은 의인을 죽였습니다. 가인은 자신과 달리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동생 아벨을 시기해 죽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말에 시기로 눈먼 사울은 죽을 때까지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녔습니다. 시편은 그런 악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시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우리 주 예수님마저도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에 희생되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를 간파하였습니다.
(마 27:18) 이는 그(빌라도)가 그들(유대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오늘 본문은 시기의 악에 사로잡힌 이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의인을 비난하고 해칠 이유를 찾아냅니다. 첫째 출신지를 문제삼습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난합니다. 갈릴리는 당시 이방인들의 마을이 많이 섞여 있어서 헬라화되어 있었고 이는 스스로 순결하다 자부하는 유대 종교인들이 멸시하는 이유였습니다. 42절에서 성경을 인용하며 유대지방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서 갈릴리에서 성장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습니다.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워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낸 성전경비병들 말씀을 듣고 동요되어 빈손으로 돌아오자 47-48절에서 자신들 즉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믿지 않는 이가 어떻게 메시야일 수 있느냐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자신들이라고 여길 만큼 교만했습니다.
셋째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과 믿는 자들을 정죄합니다. 49절에서 자신들과 달리 이들은 율법을 모르는 무지랭이들이며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폭언을 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그들의 위선을 고발합니다. 51절에서, 율법은 정죄하기 전에 피고의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라고 했는데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 변호의 기회도 주지 않고 저주를 선언하느냐는 지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율법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52절에서 다시 처음의 이유, 출신지를 거론하며 비난을 이어갑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꼴입니다. 그들은 잘못이 있기에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기로 정해놓고 이유를 찾습니다. 시기에 눈먼 이들의 전형적인 악입니다.
3. 나 홀로 의롭다
이런 시기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뜻밖에 시기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왜 원로목사의 아들이 담임목사직을 세습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이런 이유를 들었습니다. 후임목사가 와서 목회를 잘 하면 은퇴한 원로목사도 인간인지라 시기가 생기고 그래서 교회에 이런저런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무리 잘 해도 시기가 생기지 않으니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세습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 면에서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교회가 내놓을 수 있다는 것에 기가막히고 동시에 목회자조차도 얼마나 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면 이런 주장이 나오겠는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한국의 망우동에서 청년부 목사로 섬길 때 연배가 좀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과 대화하노라면 한국에 제대로 된 목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번에 어느 교회에 부임한 어느 목사는 자기가 잘 아는데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어서 틀려먹었고 어느 교회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도 잘 아는데 저런 문제가 있어서 목회하면 안 되는 사람이고 어느 교회 어느 목사는 순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와,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다 아세요? 응, 내가 발이 좀 넓어. 목사님이 아시는 분 중 제대로 된 목사는 없어요? 응, 없는데 한 사람 정도 있지. 누군데요? 나! 나 정도는 되야 목회를 하지. 아, 그렇군요. 결국은 그 교회가 어려울 때, 자신이 비난했던 방식으로, 일부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4. 돌만 캐는 이들
목사가 이럴진대 교인들은 어떻게 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시기에 눈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교인들의 온갖 허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된 성도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문제가 잘 보일까요? 자신이 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시기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심판자가 되실 하나님도 안 보이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안 보이고 자신을 정죄치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안 보이고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진리도 안 보이고 오직 이웃의 허물과 나의 자랑거리만 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어느 목사님이 비유하시기를,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야지, 돌을 캐면 어떻게 하느냐? 돌은 캐도캐도 끝도없이 나온다, 왜 이렇게 돌이 많으냐고 불평하고 비난하느라 감자는 하나도 못 캔다’는 것입니다. 감자밭에서는 돌을 캐지말고 감자를 캐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장점과 은사와 수고를 찾아서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단점과 문제와 허물만 찾아내서 비난하고 험담하고 상처를 주느라 인생을 다 낭비하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막히고 답답한 노릇입니까? 감자는 안 캐고 돌만 캐는 사람에게 주님은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 4: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진실을 왜곡해서 비난하는 구부러진 말, 시기와 미움에서 나온 꼬이고 비뚤어진 말을 버리고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고 이웃의 영혼에 칼을 꽂습니다. 시기에 눈먼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 5:8)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끝없는 험담과 비난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 하는 이들만큼 불행한 이가 없습니다. 가인을 죽인 가인, 예수님을 죽인 종교인과 같이 멸망의 길을 갑니다.
5. 감자를 캐라
이런 멸망의 길을 떠나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립보서는 이렇게 명하십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을 높이셨습니다. 그 분 안에는 어떤 시기도 없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에게 와서 자신들에게 오던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다 몰려간다고 했을 때 한 말입니다.
(요 3:30) “그(예수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세례 요한)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사도 바울도 감옥에 갇힌 자신을 괴롭게 만들려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우리가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입술에 칭찬의 열매가 맺힙니다. 진정 낫게 여긴다면, 존경한다면 이웃의 장점이 보입니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입술에서 정죄의 독이 빠져나갑니다. 비난과 정죄는 독입니다. 자신과 이웃을 다 죽이는 독입니다. 이 독이 빠지면 이웃의 허물이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는 대우를 감사합니다. 왜 자신을 더 잘 대접하지 않는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만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는 예전에 글을 쓸 때 ‘사랑하고 존경하는…’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낯 간지러웠습니다.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에게 써야지, 아무에게나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위선이라 여겼습니다. 어느 날 가만히 앉아서 적어봤습니다. 그럼 내가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누구인가? 거의 없었습니다. 와, 나야말로 나 홀로 의로운 위선자가 아닌가! 그 날 이후로 이 표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현을 씀으로써 이 사람을 사랑하라신 주님의 명령을 떠올립니다. 이 사람이 존경할 만한 점이 얼마나 많은지와 그것을 보지 못 했던 저의 교만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의 기쁨과 평화가 저를 덮어주십니다. 감자를 캐는 것을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여러분은 가정과 교회와 일터의 밭에서 감자를 캐십니까, 돌을 캐십니까? 감자를 캐서 나누어 먹으며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