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 목자의 음성 / 요 10:1-10

20220710 목자의 음성 / 요 10:1-10

요 10:1-10/목자의 음성

220710 주일설교
1. 양을 부르는 음성
산 이곳저곳에 흩어져 보이지도 않는 양을 모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 영상에 답이 있습니다. <영상> 답은 바로 목자의 음성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읽고 온라인에 관련영상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방금 보신 영상과 더불어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지 실험한 영상이 여럿 있었습니다. 낯선 이가 부를 때는 가까이 있는 양들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부르자 멀리 있는 양들도 알아 듣고 달려오더니 목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0장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양과 목자의 비유입니다. 언듯 보면 이 본문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듯 하지만 사실 10장은 우리가 계속 읽어온 9장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과 연결된 해설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의 이 장, 절 구분은 16세기에 붙인 겁니다. 9장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과 이 10장의 해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2. 양이 듣는 음성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은 한 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가난하고 배우지도 못 했고 종교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내세울 것도, 존경받을 만한 것도 없는 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하고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존경받는 이들이었는데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도, 믿지도 못 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도 어떤 이는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신실하게 순종하는데 왜 똑같은 말씀을 어떤 이는 듣고도 깨닫지도, 돌이키지도 못 하고 교만을 버리지 못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3절입니다.
(요 10: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그 이유는 이 시각장애인이 참 주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참 양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불러서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그럼 이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계시고 부르시고 생명의 나라로 이끄십니다. 9-10절입니다.
(요 10: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요 10:10) …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 참 생명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는 참 양들은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습니다. 참 목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이 여러분에게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양이 듣지 않는 음성
그러나 세상에는 참 목자의 음성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득한 시장, 쇼핑몰이나 음악이 시끄러운 파티에 가면 곁에 있는 친구의 말을 듣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뭐라고? 뭘 가져오라고?’ 세상에는 강도의 음성이 소란스럽게 주님의 음성을 가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 10: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특별히 강조하십니다. 생명을 앗아가려는 도둑과 강도가 있습니다. 이 강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 10: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이 강도의 음성은 생명을 빼앗습니다. 달콤하고 매력적이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죽음의 음성입니다. 이런 음성을 듣는 이는 참 목자의 양이 아닙니다. 참 양은 그 음성을 가려 내어 듣지 않습니다. 15절입니다.
(요 10: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강도와 목자의 음성
제가 LA에서 청년부 사역을 할 때입니다. 어느 저녁 청년들이 운동하는 곳에 4살 쯤 된 평화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운동장 한 쪽에서 평화를 놀리려니까 근처에 꼭 평화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가 있었습니다. 제가 평화에게 ‘가서 허그하고 같이 놀아’하고 보내니까 그 아빠도 아이를 보내면서 그러는 겁니다. ‘야, 가서 누가 쎈가 맞짱 떠 봐. 지면 안 된다.’ 깜짝 놀랐습니다. 4살 짜리 아이들이 누가 쎈가 가리는 것이 왜 중요하고 맞짱을 어떻게 뜹니까? 그 아이는 4살부터 낯선 이들을 만나면 긴장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음성을 듣고 자랄 겁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할까요? 하늘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 자란 아이와 얼마나 다를까요? 그는 어쩌면 평생 자신보다 쎈 이를 두려워하고 약한 이를 무시하며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을까요?
정치공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는데 마키아 벨리는 똑같은 이유로 군주에게 두려움으로 인간을 통제하라고 가르칩니다. 군주는 자신의 안위와 성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마라. 그리고 나쁜 일은 가급적이면 부하를 시켜라. 그리고 자신은 뒤에 숨어라”
이런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고 뺏고 더 가지고 움켜쥐어야 살아남는 세상이라는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음성이 자신을 죽여 양들을 살리시는 참 목자의 가르침과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주님은 당신을 죽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군주이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군주이신지요? 얼마나 자비로운 왕이십니까? 세상 어디에서 이런 목자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이 참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우리는 삽니다. 이 목자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를 헤멜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내시고 부르십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아시고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듣는 이는 얼마나 복된지요.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긍휼히 여기고 청결하고 화평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의를 위해 박해받기를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입니다.
반면 강도의 음성은 우리에게 교만하고 분내고 다투라고 합니다. 거짓을 퍼뜨리고 불의와 모략을 꾸미라고 합니다. 불의에 가담하여 의인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길은 욕심대로 될 것 같지만 멸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귀에는 누구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강도의 음성을 뿌리치고 참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음성을 듣고 생명길 가는 천국백성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