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1 정결한 마음 / 요 10:22-42

20220731 정결한 마음 / 요 10:22-42

요 10:22-42/청결한 마음

220724 주일설교
1. 소독법
팬데믹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익힌 습관이 있습니다. 손씻기입니다. 우리 손이 온갖 세균을 옮기는, 질병의 매개체란 사실은 오늘날 모르는 이가 없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이 상식을 받아들이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세기는 서양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지만 아직 세균의 존재를 몰랐기에 의사들은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된 손과 옷, 수술도구로 여러 환자를 오가며 치료와 수술을 하기 일쑤였고 환자들은 의사가 옮긴 세균으로 감염되어 사망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1843년 미국의사 올리버 웬델 홈즈가 보스턴의학회에서 최초로 치료나 수술 후 반드시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의사로부터 무시당했습니다. 1847년 헝가리 산부인과의사이자 교수인 이그나즈 제멜바이스 역시 수술 후에는 반드시 염소수로 손을 씻어 감염을 막아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귀기울이는 유럽의사들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두 곳의 대학에서 해임되고 의사면허도 박탈되었습니다. 세상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그는 정신질환을 앓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19세기 의사들이 이 두 선구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무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편견, 제멜바이스의 출신을 경시했습니다. 명문가 출신도, 명문대학 출신도 아닌 그의 주장을 가문과 학벌을 중시했던 당시 의학풍토에서는 얕잡아 본 것입니다. 셋째가 오만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병균의 매개체가 되어 환자를 감염시켜 죽게했다는 주장에 매우 분개했습니다. 아무튼 이 선구자들의 주장을 의학계가 널리 받아들이기까지 반 세기가 더 걸렸고 그 동안 수많은 환자들은 여전히 의사들의 손에 묻어온 세균감염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진실을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줍니다. 큐빅을 잔뜩 뿌려놓으면 그 가운데 다이아몬드를 구분하기 어렵듯 평소 가진 무지, 편견, 자만이 결합하면 진실을 가려낼 분별력을 거의 잃고야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이기도 합니다.
2. 몰이해의 이유
본문의 배경은 겨울, 수전절의 예루살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입니다. 여기서 논쟁이 벌어집니다. 주제는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이냐입니다. 24절입니다.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이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를 숨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답답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힙니다. 25절입니다.
(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첫째 예수님은 이미 여러 차례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 표적도 이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이 이미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지 못 합니까? 26절이 가르칩니다.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정체였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참 메시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양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런 문제를 주시고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게 정말 맞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온전하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변덕스럽습니다. 문제를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마땅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을 원망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실을 찾아가라는 의미입니다.
3. 그릇된 기대
그러나 유대인들은 분명 항변할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의 양떼가 아니라는 모진 말씀을 하실까요? 그 답은 오늘 본문의 배경에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요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2월에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면 성탄트리 옆에 커다란 촛대모양을 세워놓은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 촛대를 메노라라고 부르고 이 촛대상징으로 기념하는 절기를 수전절, 히브리어로 하누카라고 합니다. 하누카의 뜻은 ‘봉헌하다’이고 수전절은 닦을 수자를 써서 ‘성전을 닦아서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수전절의 유래는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세운 헬라제국은 그가 죽은 후 크게 4개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셀리오쿠스 왕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은 기원전 164년 마카비의 지휘 아래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고 헬라의 우상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청결케 하여 하나님께 새롭게 봉헌했습니다. 이 독립과 성전봉헌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수전절입니다. 이 마카비 왕국은 그러나 약 100년 만에 다시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카비 같은 구국의 영웅 곧 메시야가 나타나 자유로운 유대왕국을 건설해 줄 것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으면서도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깨닫지 못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 죄와 죽음을 해결할 메시야, 하나님 나라를 세울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카비와 같이 자신들이 대접받고 왕노릇 하는 유대왕국을 세월줄 정치-군사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어릴 적에 시골외가에 놀러가면 할아버지는 소 먹인 이야기를 하시고 할머니는 뒷산 밭일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 시간 동안 대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도 없이 한 시간 동안 대화가 오고 갑니다.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이렇게 초점이 맞지 않는 주파수처럼 서로 엉뚱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하는 수준에서 넘어서서 급기야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4. 믿는 마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인데 우리는 땅의 나라, 우리의 나라를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을 가르치시는데 우리는 육적인 구원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가르치시는데 우리는 욕망, 돈, 직장, 성공을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니고데모는 뛰어난 지성인이었지만 그 역시 시선이 땅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점이 어긋난 상태에서는 아무리 예배하고 설교듣고 성경공부하고 봉사해도 전혀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해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장하고 성숙하기보다 점점 더 경직되고 자기의를 쌓는 종교생활이 되고 마침내 이웃을 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마치 체인이 풀린 자전거의 패달을 열심히 밟듯 헛도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분과 동행하는 영생을 살려는 이는 마음의 모든 무지, 편견, 오만을 내려놓고  청결한 마음으로 주님과 눈을 맞추어야 합니다. 산상설교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한 마음은 주님의 진리가 잘 보입니다. 헛된 기대와 욕망을 내려놓은 마음은 행복합니다. 창조주의 선한 계획이 이해되고 구원하시는 사랑을 깨닫고 맡기신 사명이 감사하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5. 진리의 창
어떻게 어디서 그 진리가 보입니까? 첫째 성경을 읽을 때입니다. 34-35절입니다.
(요 1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성경은 진리의 등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경을 늘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며 늘 가까이 하는 것은 커다란 행복입니다. 이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머무는 복된 삶입니다.
둘째 주님의 행함을 묵상할 때입니다. 37-38절입니다.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성경과 우리 삶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을 묵상할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역사하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삶에 동행하심을 깨닫습니다.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잃었던 용기와 소망을 회복합니다.
성경을 읽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진리되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어떤 은혜를 베푸십니까?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생명을 누립니다. 우리를 주님의 강한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고난과 시련, 절망과 두려움이 여러분을 위협합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미 이기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세상이 감당치 못 할 용사로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청결한 마음을 성경을 읽으며 늘 주님을 묵상하는 주님의 양떼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