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9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 요 14:1-11

20230129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 요 14:1-11

요 14:1-11/하나님을 보여주세요

230129 요한복음
1. 근심하지 말라
신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세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교회밖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보여줘 봐. 그럼 믿을게. 믿고 싶어도 신을 볼 수가 없으니 믿음이 안 생겨.’라고 합니다. 교회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고 천국에 이를까?’하고 궁금해 합니다. 교회 안이나 밖이나 모두가 가진 의문으로 ‘이 걱정근심 많은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까?’ 하고 또 의문을 던집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하게도 이 세 가지 의문 모두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 세 번째 질문부터 거꾸로 답을 들어 봅시다. 먼저 걱정근심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고 걱정하였습니다. 제자들 중 누군가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도 충격적인데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예수님이 떠나신다니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 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또 예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이기에 믿으면 근심을 멈출 수 있을까요?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해 거할 곳 곧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집은 어떤 곳입니까? 아마 헐리우드 배우들의 대저택이 아닐까요? 그보다 더 좋은 집을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제자들 곁을 떠나는 이유는 그 집을 준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준비가 다 되면 어떻게 하십니까?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천 년 전에 오셨듯 다시 오십니다. 자녀들을 영접하셔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십니다.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믿을 때 제자들은 근심에서 벗어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고난과 문제가 심지어 죽음까지 완전히 극복되고 해결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왜 근심할까요? 여러분, 걱정과 근심은 주님의 이 약속을 믿지 못 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심으로 모든 걱정, 근심을 벗어버리시길 축복합니다.
2. 아들을 믿으라
이제 예수님은 당신이 가는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당신의 길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물론 아직 제자들은 배우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요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의 이 질문은 서두의 두 번째 질문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까?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우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갑니까, 물으면 우물쭈물 합니다. 잘 믿어야지요, 열심히 봉사해야지요, 선하게 살아야지요, 기도를 많이 해야지요… 확신 없는 대답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곧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닫혀있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입니다. 인간이 붙들어야 할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이런 선언이 현대인에게 다소 오만하게 들립니다. ‘왜 기독교는 그렇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입니까? 불교나 힌두교는 얼마나 많은 신을 포용하는지 보세요. 크리스마스에는 절에 성탄축하 메시지를 달지 않습니까? 종교간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너그럽습니까? 기독교 안에서도 카톨릭은 타종교와 대화하려고 노력하던데 유독 개신교는 그렇게 혼자 잘났습니까?’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다원화된 사회의 일원으로서 타종교인에 대한 예의와 포용은 보수개신교일수록 부족한 덕목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의를 지키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진리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인가요?’ 4라고 이 인간아, 그걸 꼭 말해 줘야 아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정중한 태도로 답하면 됩니다. 4입니다. 죄송하지만 3이 아니고 5도 아닙니다. 4라고 답하는 것 자체가 무례입니까?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3일수도 있고 5일수도 있다고 해야 할까요? 우주왕복선의 궤도를 계산하면서 설계부의 입장을 고려해서 3이라고 해, 기계부의 입장을 고려해서 5라고 해라고 할까요? 미안하지만 이건 4입니다. 그래야 우주인들이 우주미아가 되지 않고 무사히 왕복선을 몰고 지구로 돌아올 수가 있어요. 이것이 무례하고 독선적인가요? 그렇다면 진리는 거짓 앞에 무례하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분이 제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한 분입니다. 저 분은 저에게 친절하지만 옆집 아저씨예요. 이 분은 학식이 뛰어나지만 스승입니다. 아버지는 이 분이세요. 미안하지만 이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례이고 독선입니까? 그렇다면 진실은 무례하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을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어떤 메시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큼 명쾌하며 어떤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큼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말씀과 행함으로 믿으라
이런 진리를 현대인들이 왜 믿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짠 하고 나타나서 내게 말씀해 봐, 그럼 내가 왜 안 믿겠어? 못 나타나? 그럼 없는 거지.’ 이런 생각은 물론 현대인들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제자인 빌립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러 가시고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 당신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 이 놀라운 메시지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 나라가 실재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그 나라를 열어주시리라는 약속을 믿으려면 하나님 아버지를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요? 당신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이미 임재하여 계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입니다.
(요 14:10) …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이는 마치 안목있는 화가가 그림을 보는 순간 위대한 작가의 작품인지, 섣부른 연습생이 흉내낸 모사품인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뛰어난 성악가가 오디션장에서 노래를 듣는 순간 이 사람이 얼마나 숙련된 가수인지, 얼마나 이 노래를 열심히 연습했는지 금방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 메시지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순종하는 순간 이 말씀이 그저 듣기 좋은 격언인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살리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지를 경험합니다.
말씀을 분별하는 그 안목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안목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주님은 안목을 길러주시기 위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이 안목을 길러주시기 위해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을 선포케 하십니다. 겸손히 그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따를 때 이 안목이 자랍니다. 그래서 안목이 생긴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듣는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자신의 정욕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마귀가 넣어 준 것인지도 깨닫습니다.
병아리 감별사란 직업이 있습니다. 치킨비지니스가 엄청난 산업이다보니 양계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아리들을 양계용과 고기용 등으로 암수를 구분하는 직업입니다. 하루 1만 마리 이상의 병아리의 암수를 구분하고 한 마리당 3초 정도 안에 감별해야 하는데 병아리를 한 손으로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돌기의 유무를 느껴서 판별해 냅니다. 한 마리씩 들여다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별력을 길러내기 위해 감별사는 수도없는 병아리들을 만져서 확인하는 훈련을 반복합니다. 보통 1년 이상을 꼬박 투자해 훈련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이 분별력을 길러내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도 분별력을 얻지 못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럴 경우 예수님은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요 14:11)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못 믿겠거든 예수님이 하신 선한 행위와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라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고치고 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죄없이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마저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경험한 이들이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심지어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습니까? 이를 부인하려면 그들이 보지도 겪지도 않은 것을 위해 목숨을 내버렸다고 해야 합니다. 혹은 그 수천 명의 증인들이 집단으로 환각을 보거나 최면에 걸렸다고 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들이 진짜 예수님의 병고침을 보고 죽은 이를 살리고 당신도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보았다고 해야 합니다.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리로 깨닫고 믿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진리를 가르치셨고 도마에게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분별이 생기지 않으면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도 큰 복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복이 있습니까?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