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by 김도완 목사 (Page 31)
20180819 눈을 열어주소서 / 왕하 6:8~20
왕하 6:8-20/눈을 열어주소서 180819 주일설교 잘 안 믿어집니다 예전에 20년이 넘게 신앙생활을 하신 교인과 상담을 했습니다. 대화 중에 아무래도 이 분이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계신가 의심이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 보았습니다. ‘성도님,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 분은 그래도 정직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목사님, 저도 믿고 싶은데 잘 안 됩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목사는 이런 답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여쭈어 보지요. ‘믿기 위해 무엇을 해보셨습니까?’ ‘뭐, 교회도 가보고 이것 저것 해 보았는데 잘 안 믿어져요.’ ‘그러면 성경을 공부해 보셨나요? 기도는 어떻게 해보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배워보신 적이 있나요?’ 몇 가지 질문을 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내와 겸손을 가지고 구체적인 노력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려니와 그저 교회에 계속 다니다보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태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둘째 어떻게 믿음을 얻는지 모릅니다. 셋째 믿음의 장애물이 있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오늘은 본문말씀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보려 합니다. 먼저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엘리사 선지자를 잡으러온 아람군대를 물리치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믿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먼저는 믿음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람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내내 갈등관계에 있던 주적이었습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왕을 잡기 위해 여러 차례 매복작전을 펼쳤는데 이를 번번이 선지자 엘리사가 꿰뚫어보고 이스라엘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매번 매복작전이 실패하는 이유가 엘리사 때문인 것을 안 아람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성을 특공대가 밤새 포위하고 아침에 일어난 사환은 이를 보고 겁에 질립니다. 15절입니다. (왕하 6: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꼼짝없이 잡혀 죽게생겼습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겁에 질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늘 그러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같이 곁에 있으며 똑같은 현상을 보고 있는 엘리사는 전혀 겁에 질리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20180812 돈으로부터의 자유 / 마 6:19~34
마 6:19-34/돈으로부터의 자유 180812 교회창립/광복절기념주일 두려움과의 대화 오늘은 광복 73주년, 교회창립 46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조국 한국에 광복을 주시고 우리 교회를 세워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설교는 그러나 기념주일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먼저 영상을 하나 보시지요. 영화배우 짐 캐리가 주연한 에이스 벤츄라, 라이어 라이어, 브루스 올마이티, 에디 머피의 너티 프로페서, 로빈 윌리암스의 패치 아담스 그리고 에반 올마이티 등 메가히트 휴먼코미디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같은 감독 영화란 점입니다. 할리우드의 스타감독 톰 새디악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영화가 빅히트를 기록할 때마다 그는 다른 헐리우드 감독들이 그러하듯 연봉협상을 통해 마침내 한 편에 수백만 불을 받는 스타감독이 되었습니다. 대저택에서 고급차를 여러 대 세워놓고 자가용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서 몇 달씩 휴가를 보내는 삶을 마침내 누리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도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영화를 만들어내던 그였지만 어느날 산악용 자전거를 타다가 뇌진탕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더욱 진지하게 그 의미를 묻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망가진 세상이 만들어놓은 덫, 인정받지 못 하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덫에 걸린 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영화 한 편에 수백 만 달러를 버는 동안 자신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자신을 돕는 스텝들은 매일매일 생계를 걱정해야한다는 것이 공정하지 못 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을 한 그는 자신의 대저택과 자가용 비행기, 고급 자동차 등을 모두 처분하여 구호단체에 기부하고 이동식 주택으로 옮겨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삶을 살며 비영리영화사를 설립하여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는 더 성공하고 더 소유하고 더 부유해지지 않으면 큰일날 것이라고 위협하는 자기안의 두려움과 끊임없이 싸우며 깨달은 바를 ‘두려움과의 대화’라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 사람처럼 큰 돈을 벌지는 못 할 것이고 또 이 사람처럼 전 재산을 처분하자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 사람이 돈의 압박으로부터 얻은 자유를 우리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부터의 자유 성경적재정교실을 교인들에게 권하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묻습니다. ‘이 과정을 공부하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뭘 배우나요?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이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돈 때문에 울고 웃고 돈 때문에 때로 자유와 목숨까지 희생시킵니다. 이정도면 돈이야말로 인간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하나도 과장이 아닙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은 주인자리를 놓고 하나님과 경쟁합니다. 왜 우리는 돈의 노예로 전락할까요? 돈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태도 때문입니다. 돈을 쌓으려는 것 첫째는 돈을 쌓아두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우리 모두 돈을 더 많이 쌓아두고 싶습니다. 특히 현대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는 노골적으로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쌓고 더 쓰는 삶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옷에 스는 좀과 동전에 생기는 동록과 사기꾼, 도둑을 막기위해 우리는 돈도 더 써야 하고 신경도 쓰고 괴로움도 겪어야 합니다. 냉장고에 넣고 잊어버려 얼린 음식을 버려야 하고 쓰지도 않은 채 창고에 넣어두었다가먼지쌓인 가구와 가전제품과 낚시도구와 골프채를 내버려야 합니다. 인류의 절반이 빈곤상태에, 그 절반은 굶주리고 있는 세계에서 말입니다. 돈을 쌓아두기 위해 우리는 이웃들과의 평화를 희생시킵니다. 가족과 남남이 되고 친구와 원수가 됩니다. 하지않아도 되는 많은 고생을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돈이 주는 많은 근심과 고통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20절입니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그럼 톰 새디악처럼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럼 가족은 어떻게 돌보나요? 그런 걱정은 필요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구제의 1순위는 바로 가족입니다. 성경도 성도의 첫째 의무를 가족을 돌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우리가 돈을 하늘에 쌓으면 우리의 마음이 비로소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립니다. 21절입니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 마음에 땅에 머물면 온갖 근심과 고통에 짓눌립니다. 하늘에 머물면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여러분의 돈을 하늘에 쌓음으로 그 마음이 하늘에 머물고 그래서 하늘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돈으로 염려하는 것 돈에 대한 잘못된 두 번째 태도는 돈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할까, 고생할까, 원하는 삶을 살지 못 할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왜입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첫째 이유는 염려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키가 자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염려한다고 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덜 버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염려하면 돈을 더 못 벌 가능성이 큽니다. 염려가 눈을 가려 성공의 가능성을 낮추기 때문입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는 둘째 이유는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성경에는 돈에 관련한 구절이 무려 2,350구절이 나옵니다. 그 어떤 주제보다 많은 빈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돈은 필요한 만큼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선순위 네, 목사님. 저도 돈을 쌓고 싶지 않고 돈 때문에 염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 먹은 대로 잘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답을 33절이 알려줍니다. (눅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은 어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밀려나가듯 하나님이 오시면 돈은 밀려나갑니다. 돈에 관심을 안 가지고 돈 때문에 걱정을 안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봐야 하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얀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말하는 순간 생각납니다. 듣는 순간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돈을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야 비로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것은 바로 크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크시고 참으로 귀하시고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어떤 돈도 할 수 없는 구원을 행하시고 생명과 복과 은혜와 세상 모든 만물로 우리를 채우시고 비교할 대상이 없을만큼 우리를 진정으로 영원히 매혹시킬 수 있는 아름다우심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는 것만이 돈의 미련과 압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유를 누린 인생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 ‘참회록’에서 전쟁과평화, 안나카레리나 같은 작품들로 세계적 명성과 부를 얻게 된 51세 때의 묵상을 소개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이나 하나님의 가치가 아닌 이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를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그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부유하고 유명해지고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고 특히 그가 속한 사교계에서는 ‘야망, 권력, 부러움, 섹스, 오만, 분노, 복수를 존중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그는 이 모든 것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20180729 하나님을 보여줘 / 롬 1:20
롬 1:20/하나님을 보여줘 180729 주일설교 신을 보여줘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기행과 과격한 언행으로 이미 유명합니다만 이번 달 8일에는 공식석상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보여준다면, 또는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즉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민의 80%가 카톨릭교도인 필리핀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사과를 하였습니다만 유사한 발언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사과의 진정성을 믿는 이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을 보여주면 믿겠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은 어제 오늘 나온 것이 물론…
20180722 우시는 하나님 / 창 43:26~34
창 43:26-34/우시는 하나님 1800722 주일설교 요셉14 고통받는 인생 지난 주에 정말 가슴 아픈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7일 한국 경기도 동두천에서 5살 여자아이가 어린이집 통학용 밴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등교를 위해 탄 밴에서 인솔교사가 잠든 아이를 확인하지 않고 내려 문을 잠그는 바람에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폭염 속에서 7시간을 갇혀 있다가 사망한 채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안전벨트도 풀지 못 한 채 열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아이 몸이 다 뒤틀린 채 꺾여있었다고 합니다. 아이 외할머니가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아이 엄마는 계속 울부짖으며 뒹굴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해서 장례도 치르지 못 할 상황이고 외할머니도 한 주 전에 아이와 텃밭에 나가 나물을 캐는데 재미있다고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 자신도 죽고 싶다고 합니다. 불과 2주 전인 지난 5일에도 경상남도 의령에서 3살 외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려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차에 둔 것을 잊고 출근하는 바람에 4시간 동안 방치된 아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기가 막혔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부주의해서 그런 것일까? 미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산호세주립대의 연구팀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98년부터2017년까지 20년간 7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차내에 갇혀 열사병을 목숨을 잃었습니다. 1년에 35명, 한 달에 3명, 열흘에 1명 꼴입니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게도 비극이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요? 손주를 죽게 만든 할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남은 생애를 살아갈까요? 이런 일은 인간의 미련함과 부주의함, 어리석음으로 겪는 고통과 불행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잘못으로 고통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런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소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베냐민 때문에 울다 계속해서 요셉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창 43장 후반부는 요셉이 형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점심 만찬을 대접하는 내용입니다. 형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만찬을 즐기는 중에 베냐민에게 특별하게 대접하는 요셉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베냐민은 영문도 모른 채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먼저 베냐민을 생각하는 요셉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물은 요셉은 베냐민을 찾습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창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
20180715 영문을 모를 인생 / 창 43:15-25
창 43:15-25/영문을 모를 인생 180715 주일설교 요셉13 불안의 이유 현대인에게 우울증과 더불어 빠르게 늘고 있는 신경증이 불안장애입니다. 널리 알려진 공황장애라는 증상도 불안장애의 한 종류인데요. 대략 인구의 13-14%가 불안장애를 겪고 평생 1회 이상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은 인구의 30%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불안해할까요?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그의 책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여러 가지 원인을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전통사회에서 신분과 삶의 수준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고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귀족이나 동양의 양반 모두 어지간히 중죄를 짓거나 망나니짓을 하지않고서는 여간해서 신분과 부를 잃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서민이나 천민들도 비록 삶이 고단하긴 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신분과삶의 처지 때문에 불안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분의 굴레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삶의 수준도 상당부분 스스로가 획득해야 합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더 높은 생활수준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자칫잘못하면 더 낮은 생활수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소개하는데 첫째, 변덕스러운 재능입니다. 큰 히트곡을 냈지만 더 이상 히트곡을 내지 못 하고 잊혀지는 것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가수들이나 아이템을 하나 성공했지만 계속 해서 그런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지 못 해 불안한 비지니스맨들이 그 예일 것입니다. 둘째는 운입니다. 도대체 왜 남들이 안 걸리는 병이 내게 걸리고 남들은 성공한 아이템이 내가 시작하니까 사양길에 접어드는지 예측할 수 없는 운을 말합니다. 셋째는 고용주, 넷째는 고용주의 이익, 마지막은 세계경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내 마음대로 안 되며 운은 예측할 수 없고 고용주와 세계경제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안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님, 일이 잘 되어 가는데도 왠지 불안해 잠을 못 잡니다.’ 이런 상담을 드물지않게 합니다. 불안을 느끼는 우리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불안한 인생 창세기 43장 중반부를 읽었습니다. 이 대목은 이집트에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져 불가피하게 다시 양식을 사러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총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예물을 마련하고 양식값도 갑절로 준비하여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의 총리 앞에 서는데 요셉이 그들을 자신이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먹도록 합니다. 최고권력자에게 식사초대를 받았고 분명 이것은 호의의 표시인데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불안해합니다. (창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가 소개됩니다. (창 43: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창 43: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창 43: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알지 못 하겠다! 분명히 우리가 양식값으로 지불한 돈이 왜 도로 자루 안에 있지? 누가 넣었지? 모르겠다!’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무지, 불확실성이 지금 이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똑같이 겪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될지 안 될지,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무런 사고를 겪지는 않을지,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의 이유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안 걸리는 병에 나는 왜 걸리는지, 다른 사람 비지니스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힘든건지, 다른 자녀들은 공부도 잘 하고 착한 것 같은데 왜 내 자녀는 이렇게 힘이 드는건지 모릅니다. 원인을 알면 속이라도 시원하고 무슨 대처라도 해보겠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현상 너머의 차원들 자, 그럼 이 형제들은 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여러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차원은 청지기의 차원입니다. 그는 요셉의 명으로 형제들 몰래 돈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은 사람이므로 돈이 어떻게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갔는지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도 모릅니다. 둘째 차원은 요셉의 차원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반응을 보려고 돈을 도로 집어넣도록 명령하였으니 왜 돈이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이상은 모릅니다. 마지막 차원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자루 안에 들어간 이유와 과정 뿐 아니라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 이 일을 통해 어떤 놀라운 일을 또 하실 것인지까지 모두 아십니다. 이 형제들이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야 하는데 청지기나 요셉의 차원에서벌어지는 일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90%는 물 속에 잠겨있어 보이지 않듯이 실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알 수 없고 극히 일부의 표면 밖에는 못 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가 직장을 잃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상사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의 자리에 사장의 친척이 낙하산으로 내려와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아무 상관없이 회사가 어려워져 부서마다 한 명씩 감원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에는 중국에서 수입하던 원자재 값이 올랐을 수 있습니다. 혹은 뉴저지의 세금제도가 바뀌면서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주력 판매처인 중미의 정치상황이 불안해져 판로가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래처가 부도나면서 회사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의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자원남용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생산비용의 증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 뒤에도 수백, 수천가지 변수가 작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어떻게 다 쫓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가 아는 것은 실재와 거리가 멉니다.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시에 교만한 지를 떠벌리는 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전 10: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20180708 떨칠 수 없는 추격자 / 창50:15~21
창 50:15-21/떨칠 수 없는 추격자 180708 주일설교 요셉12 쉬지 않는 추격자 지난 2004년 한국의 전북 익산 경찰서에 초췌한 모습의 40대 남자가 자수하러 와서 21년 전 자신의 큰 형을 죽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 큰 형이 매일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집과 재산마저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하자 격분한 나머지 둘째형과 공모하여 큰 형을 흉기로 살해하고 집 뒤 텃밭에 암매장하였습니다. 큰 형이 안 보이자 가족들은 그가 가출한 것으로 생각했고 둘째 형과 그는 이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