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Tagged Sermons (Page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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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하나님을 보여줘 / 롬 1:20

롬 1:20/하나님을 보여줘 180729 주일설교 신을 보여줘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기행과 과격한 언행으로 이미 유명합니다만 이번 달 8일에는 공식석상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보여준다면, 또는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즉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민의 80%가 카톨릭교도인 필리핀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사과를 하였습니다만 유사한 발언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사과의 진정성을 믿는 이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을 보여주면 믿겠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은 어제 오늘 나온 것이 물론…

20180722 우시는 하나님 / 창 43:26~34

창 43:26-34/우시는 하나님 1800722 주일설교 요셉14 고통받는 인생 지난 주에 정말 가슴 아픈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7일 한국 경기도 동두천에서 5살 여자아이가 어린이집 통학용 밴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등교를 위해 탄 밴에서 인솔교사가 잠든 아이를 확인하지 않고 내려 문을 잠그는 바람에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폭염 속에서 7시간을 갇혀 있다가 사망한 채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안전벨트도 풀지 못 한 채 열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아이 몸이 다 뒤틀린 채 꺾여있었다고 합니다. 아이 외할머니가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아이 엄마는 계속 울부짖으며 뒹굴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해서 장례도 치르지 못 할 상황이고 외할머니도 한 주 전에 아이와 텃밭에 나가 나물을 캐는데 재미있다고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 자신도 죽고 싶다고 합니다. 불과 2주 전인 지난 5일에도 경상남도 의령에서 3살 외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려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차에 둔 것을 잊고 출근하는 바람에 4시간 동안 방치된 아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기가 막혔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부주의해서 그런 것일까? 미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산호세주립대의 연구팀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98년부터2017년까지 20년간 7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차내에 갇혀 열사병을 목숨을 잃었습니다. 1년에 35명, 한 달에 3명, 열흘에 1명 꼴입니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게도 비극이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요? 손주를 죽게 만든 할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남은 생애를 살아갈까요? 이런 일은 인간의 미련함과 부주의함, 어리석음으로 겪는 고통과 불행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잘못으로 고통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런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소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베냐민 때문에 울다 계속해서 요셉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창 43장 후반부는 요셉이 형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점심 만찬을 대접하는 내용입니다. 형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만찬을 즐기는 중에 베냐민에게 특별하게 대접하는 요셉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베냐민은 영문도 모른 채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먼저 베냐민을 생각하는 요셉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물은 요셉은 베냐민을 찾습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창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

20180715 영문을 모를 인생 / 창 43:15-25

창 43:15-25/영문을 모를 인생 180715 주일설교 요셉13 불안의 이유 현대인에게 우울증과 더불어 빠르게 늘고 있는 신경증이 불안장애입니다. 널리 알려진 공황장애라는 증상도 불안장애의 한 종류인데요. 대략 인구의 13-14%가 불안장애를 겪고 평생 1회 이상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은 인구의 30%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불안해할까요?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그의 책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여러 가지 원인을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전통사회에서 신분과 삶의 수준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고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귀족이나 동양의 양반 모두 어지간히 중죄를 짓거나 망나니짓을 하지않고서는 여간해서 신분과 부를 잃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서민이나 천민들도 비록 삶이 고단하긴 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신분과삶의 처지 때문에 불안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분의 굴레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삶의 수준도 상당부분 스스로가 획득해야 합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더 높은 생활수준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자칫잘못하면 더 낮은 생활수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소개하는데 첫째, 변덕스러운 재능입니다. 큰 히트곡을 냈지만 더 이상 히트곡을 내지 못 하고 잊혀지는 것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가수들이나 아이템을 하나 성공했지만 계속 해서 그런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지 못 해 불안한 비지니스맨들이 그 예일 것입니다. 둘째는 운입니다. 도대체 왜 남들이 안 걸리는 병이 내게 걸리고 남들은 성공한 아이템이 내가 시작하니까 사양길에 접어드는지 예측할 수 없는 운을 말합니다. 셋째는 고용주, 넷째는 고용주의 이익, 마지막은 세계경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내 마음대로 안 되며 운은 예측할 수 없고 고용주와 세계경제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안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님, 일이 잘 되어 가는데도 왠지 불안해 잠을 못 잡니다.’ 이런 상담을 드물지않게 합니다. 불안을 느끼는 우리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불안한 인생 창세기 43장 중반부를 읽었습니다. 이 대목은 이집트에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져 불가피하게 다시 양식을 사러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총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예물을 마련하고 양식값도 갑절로 준비하여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의 총리 앞에 서는데 요셉이 그들을 자신이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먹도록 합니다. 최고권력자에게 식사초대를 받았고 분명 이것은 호의의 표시인데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불안해합니다. (창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가 소개됩니다.  (창 43: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창 43: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창 43: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알지 못 하겠다! 분명히 우리가 양식값으로 지불한 돈이 왜 도로 자루 안에 있지? 누가 넣었지? 모르겠다!’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무지, 불확실성이 지금 이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똑같이 겪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될지 안 될지,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무런 사고를 겪지는 않을지,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의 이유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안 걸리는 병에 나는 왜 걸리는지, 다른 사람 비지니스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힘든건지, 다른 자녀들은 공부도 잘 하고 착한 것 같은데 왜 내 자녀는 이렇게 힘이 드는건지 모릅니다. 원인을 알면 속이라도 시원하고 무슨 대처라도 해보겠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현상 너머의 차원들 자, 그럼 이 형제들은 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여러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차원은 청지기의 차원입니다. 그는 요셉의 명으로 형제들 몰래 돈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은 사람이므로 돈이 어떻게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갔는지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도 모릅니다. 둘째 차원은 요셉의 차원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반응을 보려고 돈을 도로 집어넣도록 명령하였으니 왜 돈이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이상은 모릅니다. 마지막 차원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자루 안에 들어간 이유와 과정 뿐 아니라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 이 일을 통해 어떤 놀라운 일을 또 하실 것인지까지 모두 아십니다. 이 형제들이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야 하는데 청지기나 요셉의 차원에서벌어지는 일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90%는 물 속에 잠겨있어 보이지 않듯이 실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알 수 없고 극히 일부의 표면 밖에는 못 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가 직장을 잃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상사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의 자리에 사장의 친척이 낙하산으로 내려와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아무 상관없이 회사가 어려워져 부서마다 한 명씩 감원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에는 중국에서 수입하던 원자재 값이 올랐을 수 있습니다. 혹은 뉴저지의 세금제도가 바뀌면서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주력 판매처인 중미의 정치상황이 불안해져 판로가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래처가 부도나면서 회사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의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자원남용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생산비용의 증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 뒤에도 수백, 수천가지 변수가 작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어떻게 다 쫓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가 아는 것은 실재와 거리가 멉니다.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시에 교만한 지를 떠벌리는 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전 10: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20180708 떨칠 수 없는 추격자 / 창50:15~21

창 50:15-21/떨칠 수 없는 추격자 180708 주일설교 요셉12 쉬지 않는 추격자 지난 2004년 한국의 전북 익산 경찰서에 초췌한 모습의 40대 남자가 자수하러 와서 21년 전 자신의 큰 형을 죽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 큰 형이 매일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집과 재산마저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하자 격분한 나머지 둘째형과 공모하여 큰 형을 흉기로 살해하고 집 뒤 텃밭에 암매장하였습니다. 큰 형이 안 보이자 가족들은 그가 가출한 것으로 생각했고 둘째 형과 그는 이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큰…

20180701 잃으면 잃으리라 / 창43:1~14

창 43:1-14/잃으면 잃으리라 180701 주일설교 요셉11 움켜쥠 평화가 서너 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장난감 가게에 가서 마음에 드는 로봇을 하나 골랐습니다. ‘아빠가 사줄게. 이건 평화 거야.’ 계산대 앞에서 평화에게 장난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장난감을 꽉 움켜쥐는 겁니다. 아빠가 사준다고 했잖아? 그래, 사주는거야, 그러니까 아빠를 줘. 무슨 소리야? 사준다면서 왜 뺏어가? 아, 이건 뺏어가는 게 아니고 계산하는 거야, 평화가 장난감을 여기 아저씨에게 드리고 아빠가 계산을 해줘야 평화가 이 장난감 가지는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평화는 자기 장난감이 계산대…

20180624 멀고 험한 화해의 길 / 창 42:14~38

창 42:14-38/멀고 험한 화해의 길 180624 주일설교 요셉10 화해가 어려운 이유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있었고 북미정상회담까지 지난 6월 12일에 있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정상들이 손을 맞잡은 장면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하였지만 합의문을 보고 구체적 내용이 빠져있다는 비판도 만만찮았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비핵화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 듯 싱가폴 회담은 북미가 앞으로 가질 여러 회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평화의 길은 오래 걸립니다. 왜일까요?  오늘 우리는 창 42장 중후반부를 읽었습니다. 2주 전…

20180610 Dreams come true! / 창 42:1~13

창 42:1-13/Dreams come true! 180610 주일설교 요셉9 꿈은 이루어지는가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명의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로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격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그의 꿈은 55년이 지난 오늘날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이루어졌습니다. 아프리칸 어메리칸 대통령이 나왔고 팔팍에는 한인시장이 나올 참입니다. 여전히 보이지않는 벽이 있지만 점점 더 그 벽은 얇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55년 전 핍박과 멸시, 억압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싸운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유색인종들이 미국사회에서 누리는 자유와 복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하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어메리칸드림을 이루는 꿈으로부터 팔팍이 공정한 타운이 되고 한국에서는 통일의 소식이 들려오는 꿈까지, 온갖 꿈이 우리에겐 여전히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 어떤 꿈을 꾸고 계시지요? 이 꿈은 과연 이루어질까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질문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꿈의 장애물 첫째는 모든 꿈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꿈을 이룰 신념과 용기의 부족으로부터 꿈에 대한 반대와 공격, 예기치않은 고난과 실패 등입니다. 그러나 이 장애물이야말로 사실은 꿈을 향해 도약하도록 돕는 발판이자 도약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요셉의 이야기가 들려줍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의 대흉년을 대비하는 대목까지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봅니다. 대흉년은 이집트 뿐 아니라 주변 근동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야곱의 아들들도 흉년으로 식량이 떨어지자 곡식이 저장되어 있다는 이집트로 곡식을 구하러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로 와서 그 발앞에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이 대목을 보십시오.  (창 42: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흉년으로 인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한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이 떠올린 꿈이 무엇입니까?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 아니었던가요? 37장으로 돌아가봅시다.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을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리다.’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정확히 20년 전 17살의 요셉이 꾼 꿈대로 그의 형들이 와서 그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묻습니다. 요셉을 이 자리에 세우고 그 형들이 여기까지 데려와 절하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7년의 대흉년이 아니었던가요? 이 대흉년이 아니었으면 가나안 땅에서 형들이 이집트까지 왜 내려오겠습니까? 대흉년이 없었으면 감옥에 있던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는 기회를 감히 어떻게 잡을 수 있었을까요? 또 요셉을 감옥에서 고위관리들과 만나도록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이 아니었던가요? 요셉을 그럼 보디발의 집으로 보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이 아닙니까? 이 모든 꿈의 성취를 이루어낸 일들이 하나같이 고난이었습니다.  고난 없이는 꿈의 성취도 없습니다. 고난 없는 성취는 성취가 아닙니다. 고난은 꿈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약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날 때 주눅들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고난의 도약판을 밟고 높이 솟구쳐 올라 꿈을 향해 전진해나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꿈을 바라볼 것인가 둘째로 성도가 바라볼 것이 과연 꿈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위해 요셉을 보십시오.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한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은 자신의 꿈의 의미를 언제 깨달았습니까? 형들이 자신 앞에 와서 엎드려 절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20년 전 자신이 꾼 꿈이 바로 이 순간을 예고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이 이 순간 직전까지도 자신의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온 후 노예와 죄수로 13년, 총리로 최소 7년 이상 총 20년 동안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온 것일까요?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 하는 꿈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밤낮으로 바라보며 달려온것입니까? 창세기는 이 순간 직전까지 요셉이 자신이 20년 전 꾼 꿈에 대한 어떤 갈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요셉은 자신의 인생의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이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까? 바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배운 하나님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고,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로 뿌리쳤고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고 감옥에서 만난 두 관리의 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풀어주실 것이라고 했고 바로의 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풀어주시며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이 보고 달려온 것은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꿈은 하나님을 좇아 살아가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성취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고 꿈은 수단일 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적용하자면, 너희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목적으로 삼아라. 그러면 꿈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꿈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도 이루지 못 하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구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꿈도 이룹니다. 꿈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어떤 꿈이 이루어지는가 셋째로 어떤 꿈이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꿈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습니다. 어떤 꿈은 이루어지고 어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먼저 이 성경본문에서 이루어진 꿈이 누구의…

20180603 지혜와 명철의 근원 / 창 41:37~46

창 41:37-46/지혜와 명철의 근원 180603 주일설교 요셉8 풀기 힘든 문제 조만간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기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많은 전문가들이 바로 AI 즉 인공지능로봇을 꼽습니다. 프로그래밍된 로봇 뿐 아니라 학습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사고하는 수준까지 도달한 로봇이 가져올 변화는 사뭇 위협적인데요, 근 20년 내에 현재 직업의 80%를 AI가 대체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존 물류창고를 비롯해 많은 단순노동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AI로봇은 곧 대부분의 전문직종마저 대체할 것이 확실시되는데요, 이렇게 되면현재 우리들의 직업도 점점 사라질 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할 일이 거의 없는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지금도 비정규직의 확대, 실질임금감소 등으로 점점 좋은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다음 세대의 미래는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21세기 자본’이란 책으로 유명한 세계적 경제학자인 프랑스의 토마 피케티는 2003년 ‘미국에서의 소득 불평등, 1913-1998’이란 글에서 미국의 소득불평등은 20세기 초반에 매우 높았으나 2차 세계대전 후 매우 낮아졌고 1980년에 접어들며 다시 급속히 심각해졌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스탠포드대학의 라지 체티 교수가 쓴 소득불평등에 관한 보고서는 1940년에 태어난 사람의 90%가 그의 부모보다 소득이 높아졌지만 40년 후인 1980년에 태어난 사람은 50%만이 부모보다소득이 높아졌을 정도로 그 비율이 급락했습니다. 1980년의 40년 후는 2020년입니다. 최근의 소득불평등의 현상을 근거로 예상키로는 지금 자라고 있거나 태어날 우리 자녀들은 우리들보다 소득이 높아질 확율이 훨씬 낮아질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걱정이 되고 머리가 아프지 않으신지요? 이런 시대에 ‘내 아이만 공부 잘 해서 좋은 직장 잡으면 되지’라는 희망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요. 젊은이들에게 ‘너만 잘 하면 성공은 보장되어 있어’라는 식의 희망도, ‘네가 게을러서 가난한거야.’라는 윽박지름도 사실상 다 부질없는 소리입니다. 빌딩도 집어삼키는 쓰나미가 오는데 ‘수영만 잘 하면 살아남지’라고 자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늘 찾아오는 쓰나미같은 위협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부질없는 권력과 지혜 오늘은 창세기 41장을 살펴봅니다. 41장 전체를 살펴볼 텐데요, 본문은 일부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요셉의 이야기로 돌아왔는데요, 17살에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노예와 죄수로 13년째 고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41장은 요셉이 감옥에 여전히 갇혀있는 중 이집트의 통치자 바로가 꿈을 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꿈은 매우 불길한 것이어서 바로를 큰 근심에 빠뜨립니다. 8절을 보십시오.  (창 41: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바로는 당대 최강의 제국 이집트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의 근심을 풀기 위해 이집트의 참모들과 지식인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당대의 권력과 지혜가 모두 동원되었지만 그들 앞에 다가오는 재앙을 해결하기는커녕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권력과 지혜도 인생과 역사의 미래를 뒤덮는 그림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어떤 대통령도, 그 어떤 석학도 역사의 주관자일 수 없으며 구원자일 수 없다는 사실을깨우쳐줍니다. 자녀와의 문제부터 경제적 문제, 건강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 닥친 수많은 크고작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무기력을 인정하고 교만과 오만을 내려놓고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응답 이 때 요셉과 함께 감옥에 있던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 대해 바로에게 보고하고 바로는 그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감옥에서 벗어나 바로 앞에 서는지를 보십시오.  (창 41: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요셉의 오랜 기도가 전혀 예상치 못 한 순간에 예상치 못 한 방법으로 응답됩니다. 결코 오지않을 것 같던 순간이 갑자기 왔습니다. 13년간의 노예와 죄수생활이 극적으로 끝났습니다. 끝나지않을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는 의인의 구원은 급히, 갑작스럽게, 전혀 예상치 못 하게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은 악인의 멸망 역시 감자기 올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눅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믿음은 이 결코 오지않을 것 같은 순간을 인내로 기다리느냐, 마느냐로 드러납니다. 요셉은 13년 간을 숱한 회의와 불안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가 드러나는…

20180527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7 – 믿음과 사랑 / 마 22:35~40

마 22:35-40/어떻게 구원을 받는가7 : 믿음과 사랑 180527 주일설교 구원7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 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시리즈는 끝난 것 아닌가, 오늘 설교제목을 보고 의아하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예, 6주간 시리즈 설교를 이미 마쳤습니다만, 최근 다른 두 양육과정에서 몇 분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제가 충분히 교우 여러분들을 이해시키지 못 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되어 A/S를 한 주 하기로 했습니다. ‘에이, 시리즈 설교 CD 다 만들었는데…’ 설교CD를 매주 제작해 주시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6주간 시리즈 설교를 통해 제가 강조한 것은 구원의…

20180520 지금도 고치시는 하나님 / 마4:23~24

마 4:23-24/지금도 고치시는 하나님 180520 주일설교(아이티의료선교보고) 아이티의료선교팀 먼저 지난 10일부터 15일까지 라틴아메리카의 빈국 아이티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인 라고나브 섬을 다녀온 단기의료선교팀의 보고영상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보고 영상> 이 선교팀과 잠시 동행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신나게 의료사역을 감당하는지 저도 같이 흥분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의미 어리석은 질문같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기에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사람들을 고치는 의료선교팀을 저 아이티 오지에 파송했습니까? 의료팀의 존재의미는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요? 이들이 흘린 수고의 땀과 기도의 눈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 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본문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내내 하신 세 가지 사역을 요약해줍니다. 첫째는 가르치심입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쉽게 풀어서 왜곡된 것을 바로 잡아 가르쳐주셨습니다.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구약의 성도들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은 고치심이었습니다. 모든 약한 것 즉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병들고 상한 모든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치심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역 중 하나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곧 제자들의 사역이기도 했습니다. 눅 9:1을 보십시오.  (눅 9: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눅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천국복음 전파와 더불어 앓는 자를 고치시는 이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곧 제자들의 사역이요, 제자들의 사역은 그것이 곧 교회의 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치유의 은사가 있습니다. 고전 12:9의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으니) 병 고치는 은사를 교회에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치유가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치유사역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흔히 치유사역을 복음전파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도구로서 치유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온전한 이해라고 할수도 없습니다. 치유는 복음전파의 도구의 의미를 넘어서 복음전파와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와 가정과 일터와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치유를 행하신목적을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치유의 이유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고치신 것일까요? 마태복음을 보십시오.  (마 14: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의 치유의 의미는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즉 사랑입니다.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은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이유는 교회의 사명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고 그보다 더 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치유하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 치유사역을 감당합니까? 몇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영적 치유 첫째, 교회는 진리와 사랑을 통해 사람들의 병든 영혼을 치유합니다. 세상에 몸을 고치는 병원이 있고 정신을 고치는 정신병원도 있지만 영혼을 고치는 병원은 없습니다. 영혼을 고치는 것은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복음은 죄로 병든 영혼을 고치고 진리의 말씀은 악에 물든 삶을 고치고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로 깨진 마음을 고칩니다. 이 치유사역을 교회는 항상 감당해야 하고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더욱 진리를 선포하고 더욱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서 어느 교회의 청년부를 섬길 때입니다. 한 여교우가 저를 찾아와서는 울면서 당신 아들을 청년부에 좀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이 분의 남편이 외도를 해서 괴로움을 많이 겪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편을 얼마나 닮았는지 보면 화가 나서 언어폭력에 손찌검도 많이 하며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 아이의 영혼이 깨어졌습니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맞고 자라던 아이가 청년이 되자 도리어 엄마를 때리고 욕을 하고 어느 직장을 가든 일주일을 못 넘기고 사람들과 싸우고 나와버립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좀 낫는데 약을 안 먹으면 더 심하게 욕과 폭력을 엄마에게 휘두른다는 것입니다. 청년부에 등록을 시키고 셀에 넣었는데 얼마나 눈빛이 무서운지 자매들이 다들 무서워서 그 셀에 못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난감해하고 있으려니 셀리더들을 섬기는 코치로 섬기던 자매 둘이 저를 찾아와서는 그 형제를 자기네 셀로 넣어달라는 것입니다. 괜찮겠냐고 물으니 그 자매들 말이, 교회에서 그 형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세상 어디에 갈 데가 있겠냐면서 자기네들이 한 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누나들이 그 형제를 셀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쉬는 날에는 불러내서 밥도 사주고 그러니 이 형제의 얼굴빛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저를 찾아와서는, 목사님, 청년부 모임을 매일 하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왜요? 우리 애가 청년부에만 갔다오면 생전 웃지도 않던 애가 웃고 욕도 안 하고 우울증 약을 안 먹어도 멀쩡하게 하루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영혼이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다 병든 사람입니다. 멀쩡한데 왜 교회 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다 죄로 그 영혼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느 사람이 왜 저래,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의 병든 영혼이 다 치유받기를 축복드립니다. 또 형제, 자매의 아픈 영혼을 치유하는데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와 섬김이 쓰임받기를 축복드립니다.    기도를 통한 치유 둘째, 교회는 기도를 통해 사람들의 병든 육체를 치유합니다. 현대사회에는 예수님 당시의 고대사회와 달리 발달된 과학적 치료를 하는 병원이 있습니다. 의학적 지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안에 있는 원리를 발견해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걸리면 주저하지 말고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기도로 나으면 믿음이고 병원에 가면 불신앙이라는 해괴망측한 근본주의적 가르침에 속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병은 병원에서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까? 병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그 역할은 오히려 병원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병을 치유하는 것은 의사나 병원이 아닙니다. 의사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병든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생명력입니다. 이 생명력은 의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그 생명력을 육체 안에 불어넣어 주셨으며 이 생명력이 회복되어야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간혹 드라마를 보면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을 억제하는 것이지, 없는 생명을 있게 하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교회의 기도입니다. 야고보서를 보십시오.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고대의 민간치료요법입니다.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그 생명력을 주님이 회복시켜주시도록 교회는 기도하여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든 성도들을 심방하여 기도하고 구역에서 기도하고 중보기도시간에 기도하고 새벽기도와 수요기도와 금요기도회의 시간에 계속 해서 기도합니다. 고린도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이들이 우리 중에 있습니다. 누구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기에, 그리고 병 고치는 은사가 없어도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에 능력이 있기에 우리 성도들은 쉬지않고 환우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병든 자를 교회의 기도를 통해 살리시는 줄을 믿으시고 기도를 쉬지 않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선교지의 치유 마지막으로 교회는 선교지에서 치유사역을 감당합니다. 사실 교회는 많은 선교지에서 거의 유일한 치료기관입니다. 지금도 많은 오지의 의료상황은 2천 년 전 이스라엘과 별로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번에 의료팀이 방문한 라고나브섬 산간지방만 해도 평생 단 한번도 의사를 만나보지 못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선교팀이 4*4 오프로드용 SUV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길이 얼마나 돌이 많고 험한지 도무지 속도를 내지못하고 꿀렁꿀렁 좌우로 흔들리기를 몇 시간을 가야 합니다. 이동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산 아래에 내려오느냐고 물으니 안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산 위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마을이 라고나브섬 안에만 수십 개가 넘습니다. 20살만 넘으면 이빨이 성한 데가 없고 여자청년들은 결혼도 안 했는데 아이들이 둘, 셋씩 됩니다. 주민들은 모두 두통과 복통, 허리통증을 안고 삽니다.  이번에 라고나브섬의 소망클리닉에 우리 교회 교우들이 도네이션한 초음파진단기로 여러 사람들의 중병을 일찍 발견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곳에서 사역하시는 김성은 선교사님 말이 이런 진단기가 없었다면 많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치료도 못 받고 앓다가 그냥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평균수명은 50세가 채 되지 않습니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살아가지만 비행기로 불과 몇 시간도 안 가면 이런 곳이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고 이 사명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장로교회 전 교우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진리와 사랑과 기도와 섬김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여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20180513 부모를 기쁘게 하는 믿음 / 잠 23:22

잠 23:22/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 180513 어버이주일 무조건적 사랑 감신대 교수이셨던 선한용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에게는 2개의 신앙이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 신앙이요, 둘째는 어머니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 사셨던 선교수님의 가족은 2차 대전 중 미공군의 폭격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집 근처에서 쾅 하고 폭탄이 떨어지고 집이 무너질 듯 요동하면 아버지는 아이쿠야 하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시는데 어머니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서 어린 아들을 덮친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한국에 들어와 사시다가 6.25가 일어났습니다. 선교수님의 마을에도 공산군이 들어와서 젊은이들을 모두 끌고갔는데 숨어지내던 청소년이었던 선한용 교수님도 발각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울며불며 뒤따라오다가 마을 어귀에서는 다들 돌아갔는데 어머니만 고개를 몇 개를 넘도록 쫓아오셔서는 ‘내 아들 대신 날 잡아가소’하고 울며 매달리셨습니다.  부모의 자녀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부모공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경하기 힘든 이유가 많이 생깁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가 고지식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잘 모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빠, 도와줘. 이건 어떻게 해? 아빠, 헬프 미~’ 아빠는 평화에게 모르는 것이 없는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빠 말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들이 생겼습니다. ‘아빠, 선생님이 아니라 그랬어.’ ‘아빠, 친구들이 이건 꼭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 저에게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빠가 자기보다 영어도 못 하고 미국문화도 잘 모르고 이제는 힘도 더 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평화와 장난치느라 한 번씩 씨름을 하면 힘은 또 세졌는지 많이 컸구나 하는 대견스러움과 곧 내가 필요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장기와 팔씨름을 이기던 날이 생각났습니다. 허허 웃으시던 아버지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섭섭함을 느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어머니는 이런 염려, 저런 걱정, 훈계와 잔소리를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말로는 네, 네 하지만 내심 대학을 다녀보지 않으신 어머니가 대학생활에 대해 뭘 아실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바로 이런 저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머리가 굵은 자식이 아버지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어머니를 무시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늙은 부모는 당연히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집니다. 힘겨운 시대를 견뎌온 부모는 풍요로운 시대가 여전히 낯섭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겨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까? 부모에게는 자녀가 가진 지식, 학력, 돈, 실력, 젊음보다 더 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보물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셨고 사랑으로 만물을 회복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부모는 이 사랑으로 자녀를 출산하고 이 사랑으로 힘겨운 양육을 감당하고 이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자녀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존재가 우리를 부모처럼 염려해줄까요? 목숨걸고 사랑한다던 연인이나 부부조차도 함께 있을 때 뿐 헤어지면 잊어버리고야 맙니다. 둘도없던 친구들도 멀리 떨어지면 눈에서 멀어지는만큼 마음에서도 멀어집니다. 세상 어떤 관계도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그러나 눈 감기 전까지 잊는 법이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공경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또 가르치십니다.  (출 20: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 27: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부모공경여부에 따라 복과 저주의 길이 나뉜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이에게 먼저 땅을 주시고 장수하는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길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