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Tagged Sermons (Pag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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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3 고센 땅에 살다 / 창 46:31~47:12

창 46:31-47:12/고센 땅에 살다 180923 주일설교 요셉19 왜 이곳인가 저는 12전 LA로 들어와서 3년 후 뉴저지로 왔습니다. LA로 들어온 이유는 그 곳의 교회 청년부에서 저를 청빙했기 때문이고 뉴저지로 건너 온 이유는 우리교회에서 청빙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미국 이민 올 때 어느 지역으로 들어오셨는지요? 그 때 무엇이 그 곳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직장이나 비지니스를 해야 하는 지역 혹은 지인이 있는 지역이어서였을테고 공부를 하러 오신 분들, 자녀 유학을 위해 오신 분들은 학교가 있는 지역이었겠지요? 혹시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지역이 어딘가를…

20180916 죽어도 족하니라 / 창 46:27~30

창 46:27-30/죽어도 족하니라 180916 주일설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1997년에 출간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은 뉴욕타임즈에서 205주 동안, 약 4년인데요, 비소설분야 베스트셀러에 머물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가던 모리 슈워츠 교수를 14주 동안 그 제자인 기자 미치 앨봄이 매주 화요일 만나며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죽어가는 어느 교수의 삶과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충고가 담긴 이 책이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이 책이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서구인에게 복음의…

20180909 이민의 땅을 향하다 / 창 46:1~7

창 46:1-7/이민의 땅을 향하다 180909 주일설교 요셉17 이민의 긴장 예전에 한 교우분과 대화 중에 미국생활이 어떠냐고 여쭤보았더니 쉽지만은 않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했더니 다 정리하고 와서 돌아가기도 어렵답니다. 미국 올 때의 기대한 만큼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어서 이제는 좋으나 싫으나 여기에 적응하고 살아야지 어떡하겠냐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 혹은 남미 등 여러 곳에서 미국으로 이민 올 때는 기대와 걱정이 함께 있었을 줄 압니다. 어떤 이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하시겠지만 반대로 기대에 못 미쳐 힘겨운…

20180902 다툼이 없는 세상 / 창 45:14~28

창 45:14-28/다툼이 없는 세상 180905 주일설교 요셉15 시기의 무서움 유대인들의 지혜문서인 탈무드에 천사를 만난 장사꾼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당신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당신과 경쟁하는 옆집 장사꾼이 당신이 얻은 것의 두 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100만 불을 받으면 그는 200만 불을 받게 된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러자 그 장사꾼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한 쪽 눈을 멀게 해 주시오.”  경쟁자가 잘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같이 망하는 것을 보겠다는 이…

20180826 멀고 험한 화해의 길 2 / 창 45:1~13

창 45:1-13/멀고 험한 화해의 길2 180826 주일설교 요셉15 회개 없이 용서가 되는가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남북회담 직후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남한사람들이 북한정권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후 교우들이 악수하며 나가실 때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물어오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김정은은 회개하지 않았잖아요?’ 네, 맞습니다. 김정은이 진실한 회개를 한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용서를 하기 쉬울텐데 그런 날이 과연 올지 의문입니다.  6월에는 ‘멀고 험한 화해의 길’이란 제목의 설교에서도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이…

20180722 우시는 하나님 / 창 43:26~34

창 43:26-34/우시는 하나님 1800722 주일설교 요셉14 고통받는 인생 지난 주에 정말 가슴 아픈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7일 한국 경기도 동두천에서 5살 여자아이가 어린이집 통학용 밴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등교를 위해 탄 밴에서 인솔교사가 잠든 아이를 확인하지 않고 내려 문을 잠그는 바람에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폭염 속에서 7시간을 갇혀 있다가 사망한 채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안전벨트도 풀지 못 한 채 열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아이 몸이 다 뒤틀린 채 꺾여있었다고 합니다. 아이 외할머니가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아이 엄마는 계속 울부짖으며 뒹굴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해서 장례도 치르지 못 할 상황이고 외할머니도 한 주 전에 아이와 텃밭에 나가 나물을 캐는데 재미있다고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 자신도 죽고 싶다고 합니다. 불과 2주 전인 지난 5일에도 경상남도 의령에서 3살 외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려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차에 둔 것을 잊고 출근하는 바람에 4시간 동안 방치된 아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기가 막혔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부주의해서 그런 것일까? 미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산호세주립대의 연구팀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98년부터2017년까지 20년간 7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차내에 갇혀 열사병을 목숨을 잃었습니다. 1년에 35명, 한 달에 3명, 열흘에 1명 꼴입니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게도 비극이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요? 손주를 죽게 만든 할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남은 생애를 살아갈까요? 이런 일은 인간의 미련함과 부주의함, 어리석음으로 겪는 고통과 불행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잘못으로 고통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런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소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베냐민 때문에 울다 계속해서 요셉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창 43장 후반부는 요셉이 형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점심 만찬을 대접하는 내용입니다. 형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만찬을 즐기는 중에 베냐민에게 특별하게 대접하는 요셉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베냐민은 영문도 모른 채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먼저 베냐민을 생각하는 요셉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물은 요셉은 베냐민을 찾습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창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

20180715 영문을 모를 인생 / 창 43:15-25

창 43:15-25/영문을 모를 인생 180715 주일설교 요셉13 불안의 이유 현대인에게 우울증과 더불어 빠르게 늘고 있는 신경증이 불안장애입니다. 널리 알려진 공황장애라는 증상도 불안장애의 한 종류인데요. 대략 인구의 13-14%가 불안장애를 겪고 평생 1회 이상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은 인구의 30%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불안해할까요?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그의 책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여러 가지 원인을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전통사회에서 신분과 삶의 수준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고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귀족이나 동양의 양반 모두 어지간히 중죄를 짓거나 망나니짓을 하지않고서는 여간해서 신분과 부를 잃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서민이나 천민들도 비록 삶이 고단하긴 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신분과삶의 처지 때문에 불안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분의 굴레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삶의 수준도 상당부분 스스로가 획득해야 합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더 높은 생활수준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자칫잘못하면 더 낮은 생활수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소개하는데 첫째, 변덕스러운 재능입니다. 큰 히트곡을 냈지만 더 이상 히트곡을 내지 못 하고 잊혀지는 것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가수들이나 아이템을 하나 성공했지만 계속 해서 그런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지 못 해 불안한 비지니스맨들이 그 예일 것입니다. 둘째는 운입니다. 도대체 왜 남들이 안 걸리는 병이 내게 걸리고 남들은 성공한 아이템이 내가 시작하니까 사양길에 접어드는지 예측할 수 없는 운을 말합니다. 셋째는 고용주, 넷째는 고용주의 이익, 마지막은 세계경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내 마음대로 안 되며 운은 예측할 수 없고 고용주와 세계경제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안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님, 일이 잘 되어 가는데도 왠지 불안해 잠을 못 잡니다.’ 이런 상담을 드물지않게 합니다. 불안을 느끼는 우리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불안한 인생 창세기 43장 중반부를 읽었습니다. 이 대목은 이집트에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져 불가피하게 다시 양식을 사러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총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예물을 마련하고 양식값도 갑절로 준비하여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의 총리 앞에 서는데 요셉이 그들을 자신이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먹도록 합니다. 최고권력자에게 식사초대를 받았고 분명 이것은 호의의 표시인데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불안해합니다. (창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가 소개됩니다.  (창 43: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창 43: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창 43: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알지 못 하겠다! 분명히 우리가 양식값으로 지불한 돈이 왜 도로 자루 안에 있지? 누가 넣었지? 모르겠다!’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무지, 불확실성이 지금 이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똑같이 겪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될지 안 될지,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무런 사고를 겪지는 않을지,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의 이유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안 걸리는 병에 나는 왜 걸리는지, 다른 사람 비지니스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힘든건지, 다른 자녀들은 공부도 잘 하고 착한 것 같은데 왜 내 자녀는 이렇게 힘이 드는건지 모릅니다. 원인을 알면 속이라도 시원하고 무슨 대처라도 해보겠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현상 너머의 차원들 자, 그럼 이 형제들은 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여러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차원은 청지기의 차원입니다. 그는 요셉의 명으로 형제들 몰래 돈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은 사람이므로 돈이 어떻게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갔는지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도 모릅니다. 둘째 차원은 요셉의 차원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반응을 보려고 돈을 도로 집어넣도록 명령하였으니 왜 돈이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이상은 모릅니다. 마지막 차원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자루 안에 들어간 이유와 과정 뿐 아니라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 이 일을 통해 어떤 놀라운 일을 또 하실 것인지까지 모두 아십니다. 이 형제들이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야 하는데 청지기나 요셉의 차원에서벌어지는 일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90%는 물 속에 잠겨있어 보이지 않듯이 실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알 수 없고 극히 일부의 표면 밖에는 못 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가 직장을 잃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상사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의 자리에 사장의 친척이 낙하산으로 내려와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아무 상관없이 회사가 어려워져 부서마다 한 명씩 감원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에는 중국에서 수입하던 원자재 값이 올랐을 수 있습니다. 혹은 뉴저지의 세금제도가 바뀌면서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주력 판매처인 중미의 정치상황이 불안해져 판로가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래처가 부도나면서 회사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의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자원남용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생산비용의 증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 뒤에도 수백, 수천가지 변수가 작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어떻게 다 쫓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가 아는 것은 실재와 거리가 멉니다.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시에 교만한 지를 떠벌리는 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전 10: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20180708 떨칠 수 없는 추격자 / 창50:15~21

창 50:15-21/떨칠 수 없는 추격자 180708 주일설교 요셉12 쉬지 않는 추격자 지난 2004년 한국의 전북 익산 경찰서에 초췌한 모습의 40대 남자가 자수하러 와서 21년 전 자신의 큰 형을 죽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 큰 형이 매일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집과 재산마저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하자 격분한 나머지 둘째형과 공모하여 큰 형을 흉기로 살해하고 집 뒤 텃밭에 암매장하였습니다. 큰 형이 안 보이자 가족들은 그가 가출한 것으로 생각했고 둘째 형과 그는 이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큰…

20180701 잃으면 잃으리라 / 창43:1~14

창 43:1-14/잃으면 잃으리라 180701 주일설교 요셉11 움켜쥠 평화가 서너 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장난감 가게에 가서 마음에 드는 로봇을 하나 골랐습니다. ‘아빠가 사줄게. 이건 평화 거야.’ 계산대 앞에서 평화에게 장난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장난감을 꽉 움켜쥐는 겁니다. 아빠가 사준다고 했잖아? 그래, 사주는거야, 그러니까 아빠를 줘. 무슨 소리야? 사준다면서 왜 뺏어가? 아, 이건 뺏어가는 게 아니고 계산하는 거야, 평화가 장난감을 여기 아저씨에게 드리고 아빠가 계산을 해줘야 평화가 이 장난감 가지는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평화는 자기 장난감이 계산대…

20180624 멀고 험한 화해의 길 / 창 42:14~38

창 42:14-38/멀고 험한 화해의 길 180624 주일설교 요셉10 화해가 어려운 이유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있었고 북미정상회담까지 지난 6월 12일에 있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정상들이 손을 맞잡은 장면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하였지만 합의문을 보고 구체적 내용이 빠져있다는 비판도 만만찮았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비핵화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 듯 싱가폴 회담은 북미가 앞으로 가질 여러 회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평화의 길은 오래 걸립니다. 왜일까요?  오늘 우리는 창 42장 중후반부를 읽었습니다. 2주 전…

20180610 Dreams come true! / 창 42:1~13

창 42:1-13/Dreams come true! 180610 주일설교 요셉9 꿈은 이루어지는가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명의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로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격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그의 꿈은 55년이 지난 오늘날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이루어졌습니다. 아프리칸 어메리칸 대통령이 나왔고 팔팍에는 한인시장이 나올 참입니다. 여전히 보이지않는 벽이 있지만 점점 더 그 벽은 얇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55년 전 핍박과 멸시, 억압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싸운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유색인종들이 미국사회에서 누리는 자유와 복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하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어메리칸드림을 이루는 꿈으로부터 팔팍이 공정한 타운이 되고 한국에서는 통일의 소식이 들려오는 꿈까지, 온갖 꿈이 우리에겐 여전히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 어떤 꿈을 꾸고 계시지요? 이 꿈은 과연 이루어질까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질문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꿈의 장애물 첫째는 모든 꿈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꿈을 이룰 신념과 용기의 부족으로부터 꿈에 대한 반대와 공격, 예기치않은 고난과 실패 등입니다. 그러나 이 장애물이야말로 사실은 꿈을 향해 도약하도록 돕는 발판이자 도약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요셉의 이야기가 들려줍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의 대흉년을 대비하는 대목까지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봅니다. 대흉년은 이집트 뿐 아니라 주변 근동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야곱의 아들들도 흉년으로 식량이 떨어지자 곡식이 저장되어 있다는 이집트로 곡식을 구하러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로 와서 그 발앞에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이 대목을 보십시오.  (창 42: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흉년으로 인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한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이 떠올린 꿈이 무엇입니까?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 아니었던가요? 37장으로 돌아가봅시다.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을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리다.’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정확히 20년 전 17살의 요셉이 꾼 꿈대로 그의 형들이 와서 그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묻습니다. 요셉을 이 자리에 세우고 그 형들이 여기까지 데려와 절하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7년의 대흉년이 아니었던가요? 이 대흉년이 아니었으면 가나안 땅에서 형들이 이집트까지 왜 내려오겠습니까? 대흉년이 없었으면 감옥에 있던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는 기회를 감히 어떻게 잡을 수 있었을까요? 또 요셉을 감옥에서 고위관리들과 만나도록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이 아니었던가요? 요셉을 그럼 보디발의 집으로 보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이 아닙니까? 이 모든 꿈의 성취를 이루어낸 일들이 하나같이 고난이었습니다.  고난 없이는 꿈의 성취도 없습니다. 고난 없는 성취는 성취가 아닙니다. 고난은 꿈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약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날 때 주눅들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고난의 도약판을 밟고 높이 솟구쳐 올라 꿈을 향해 전진해나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꿈을 바라볼 것인가 둘째로 성도가 바라볼 것이 과연 꿈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위해 요셉을 보십시오.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한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은 자신의 꿈의 의미를 언제 깨달았습니까? 형들이 자신 앞에 와서 엎드려 절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20년 전 자신이 꾼 꿈이 바로 이 순간을 예고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이 이 순간 직전까지도 자신의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온 후 노예와 죄수로 13년, 총리로 최소 7년 이상 총 20년 동안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온 것일까요?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 하는 꿈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밤낮으로 바라보며 달려온것입니까? 창세기는 이 순간 직전까지 요셉이 자신이 20년 전 꾼 꿈에 대한 어떤 갈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요셉은 자신의 인생의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이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까? 바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배운 하나님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고,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로 뿌리쳤고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고 감옥에서 만난 두 관리의 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풀어주실 것이라고 했고 바로의 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풀어주시며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이 보고 달려온 것은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꿈은 하나님을 좇아 살아가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성취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고 꿈은 수단일 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적용하자면, 너희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목적으로 삼아라. 그러면 꿈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꿈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도 이루지 못 하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구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꿈도 이룹니다. 꿈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어떤 꿈이 이루어지는가 셋째로 어떤 꿈이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꿈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습니다. 어떤 꿈은 이루어지고 어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먼저 이 성경본문에서 이루어진 꿈이 누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