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완" Tagged Sermons (Page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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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1 잃으면 잃으리라 / 창43:1~14

창 43:1-14/잃으면 잃으리라 180701 주일설교 요셉11 움켜쥠 평화가 서너 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장난감 가게에 가서 마음에 드는 로봇을 하나 골랐습니다. ‘아빠가 사줄게. 이건 평화 거야.’ 계산대 앞에서 평화에게 장난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장난감을 꽉 움켜쥐는 겁니다. 아빠가 사준다고 했잖아? 그래, 사주는거야, 그러니까 아빠를 줘. 무슨 소리야? 사준다면서 왜 뺏어가? 아, 이건 뺏어가는 게 아니고 계산하는 거야, 평화가 장난감을 여기 아저씨에게 드리고 아빠가 계산을 해줘야 평화가 이 장난감 가지는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평화는 자기 장난감이 계산대…

20180624 멀고 험한 화해의 길 / 창 42:14~38

창 42:14-38/멀고 험한 화해의 길 180624 주일설교 요셉10 화해가 어려운 이유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있었고 북미정상회담까지 지난 6월 12일에 있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정상들이 손을 맞잡은 장면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하였지만 합의문을 보고 구체적 내용이 빠져있다는 비판도 만만찮았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비핵화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 듯 싱가폴 회담은 북미가 앞으로 가질 여러 회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평화의 길은 오래 걸립니다. 왜일까요?  오늘 우리는 창 42장 중후반부를 읽었습니다. 2주 전…

20180610 Dreams come true! / 창 42:1~13

창 42:1-13/Dreams come true! 180610 주일설교 요셉9 꿈은 이루어지는가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명의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로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격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그의 꿈은 55년이 지난 오늘날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이루어졌습니다. 아프리칸 어메리칸 대통령이 나왔고 팔팍에는 한인시장이 나올 참입니다. 여전히 보이지않는 벽이 있지만 점점 더 그 벽은 얇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55년 전 핍박과 멸시, 억압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싸운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유색인종들이 미국사회에서 누리는 자유와 복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하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어메리칸드림을 이루는 꿈으로부터 팔팍이 공정한 타운이 되고 한국에서는 통일의 소식이 들려오는 꿈까지, 온갖 꿈이 우리에겐 여전히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 어떤 꿈을 꾸고 계시지요? 이 꿈은 과연 이루어질까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질문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꿈의 장애물 첫째는 모든 꿈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꿈을 이룰 신념과 용기의 부족으로부터 꿈에 대한 반대와 공격, 예기치않은 고난과 실패 등입니다. 그러나 이 장애물이야말로 사실은 꿈을 향해 도약하도록 돕는 발판이자 도약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요셉의 이야기가 들려줍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의 대흉년을 대비하는 대목까지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봅니다. 대흉년은 이집트 뿐 아니라 주변 근동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야곱의 아들들도 흉년으로 식량이 떨어지자 곡식이 저장되어 있다는 이집트로 곡식을 구하러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로 와서 그 발앞에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이 대목을 보십시오.  (창 42: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흉년으로 인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한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이 떠올린 꿈이 무엇입니까?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 아니었던가요? 37장으로 돌아가봅시다.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을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리다.’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정확히 20년 전 17살의 요셉이 꾼 꿈대로 그의 형들이 와서 그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묻습니다. 요셉을 이 자리에 세우고 그 형들이 여기까지 데려와 절하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7년의 대흉년이 아니었던가요? 이 대흉년이 아니었으면 가나안 땅에서 형들이 이집트까지 왜 내려오겠습니까? 대흉년이 없었으면 감옥에 있던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는 기회를 감히 어떻게 잡을 수 있었을까요? 또 요셉을 감옥에서 고위관리들과 만나도록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이 아니었던가요? 요셉을 그럼 보디발의 집으로 보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이 아닙니까? 이 모든 꿈의 성취를 이루어낸 일들이 하나같이 고난이었습니다.  고난 없이는 꿈의 성취도 없습니다. 고난 없는 성취는 성취가 아닙니다. 고난은 꿈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약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날 때 주눅들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고난의 도약판을 밟고 높이 솟구쳐 올라 꿈을 향해 전진해나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꿈을 바라볼 것인가 둘째로 성도가 바라볼 것이 과연 꿈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위해 요셉을 보십시오.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한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은 자신의 꿈의 의미를 언제 깨달았습니까? 형들이 자신 앞에 와서 엎드려 절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20년 전 자신이 꾼 꿈이 바로 이 순간을 예고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이 이 순간 직전까지도 자신의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온 후 노예와 죄수로 13년, 총리로 최소 7년 이상 총 20년 동안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온 것일까요?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 하는 꿈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밤낮으로 바라보며 달려온것입니까? 창세기는 이 순간 직전까지 요셉이 자신이 20년 전 꾼 꿈에 대한 어떤 갈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요셉은 자신의 인생의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이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까? 바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서 배운 하나님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고,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로 뿌리쳤고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고 감옥에서 만난 두 관리의 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풀어주실 것이라고 했고 바로의 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풀어주시며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이 보고 달려온 것은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꿈은 하나님을 좇아 살아가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성취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고 꿈은 수단일 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적용하자면, 너희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목적으로 삼아라. 그러면 꿈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꿈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도 이루지 못 하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구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꿈도 이룹니다. 꿈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어떤 꿈이 이루어지는가 셋째로 어떤 꿈이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꿈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습니다. 어떤 꿈은 이루어지고 어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먼저 이 성경본문에서 이루어진 꿈이 누구의…

20180603 지혜와 명철의 근원 / 창 41:37~46

창 41:37-46/지혜와 명철의 근원 180603 주일설교 요셉8 풀기 힘든 문제 조만간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기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많은 전문가들이 바로 AI 즉 인공지능로봇을 꼽습니다. 프로그래밍된 로봇 뿐 아니라 학습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사고하는 수준까지 도달한 로봇이 가져올 변화는 사뭇 위협적인데요, 근 20년 내에 현재 직업의 80%를 AI가 대체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존 물류창고를 비롯해 많은 단순노동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AI로봇은 곧 대부분의 전문직종마저 대체할 것이 확실시되는데요, 이렇게 되면현재 우리들의 직업도 점점 사라질 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할 일이 거의 없는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지금도 비정규직의 확대, 실질임금감소 등으로 점점 좋은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다음 세대의 미래는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21세기 자본’이란 책으로 유명한 세계적 경제학자인 프랑스의 토마 피케티는 2003년 ‘미국에서의 소득 불평등, 1913-1998’이란 글에서 미국의 소득불평등은 20세기 초반에 매우 높았으나 2차 세계대전 후 매우 낮아졌고 1980년에 접어들며 다시 급속히 심각해졌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스탠포드대학의 라지 체티 교수가 쓴 소득불평등에 관한 보고서는 1940년에 태어난 사람의 90%가 그의 부모보다 소득이 높아졌지만 40년 후인 1980년에 태어난 사람은 50%만이 부모보다소득이 높아졌을 정도로 그 비율이 급락했습니다. 1980년의 40년 후는 2020년입니다. 최근의 소득불평등의 현상을 근거로 예상키로는 지금 자라고 있거나 태어날 우리 자녀들은 우리들보다 소득이 높아질 확율이 훨씬 낮아질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걱정이 되고 머리가 아프지 않으신지요? 이런 시대에 ‘내 아이만 공부 잘 해서 좋은 직장 잡으면 되지’라는 희망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요. 젊은이들에게 ‘너만 잘 하면 성공은 보장되어 있어’라는 식의 희망도, ‘네가 게을러서 가난한거야.’라는 윽박지름도 사실상 다 부질없는 소리입니다. 빌딩도 집어삼키는 쓰나미가 오는데 ‘수영만 잘 하면 살아남지’라고 자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늘 찾아오는 쓰나미같은 위협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부질없는 권력과 지혜 오늘은 창세기 41장을 살펴봅니다. 41장 전체를 살펴볼 텐데요, 본문은 일부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요셉의 이야기로 돌아왔는데요, 17살에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노예와 죄수로 13년째 고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41장은 요셉이 감옥에 여전히 갇혀있는 중 이집트의 통치자 바로가 꿈을 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꿈은 매우 불길한 것이어서 바로를 큰 근심에 빠뜨립니다. 8절을 보십시오.  (창 41: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바로는 당대 최강의 제국 이집트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의 근심을 풀기 위해 이집트의 참모들과 지식인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당대의 권력과 지혜가 모두 동원되었지만 그들 앞에 다가오는 재앙을 해결하기는커녕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권력과 지혜도 인생과 역사의 미래를 뒤덮는 그림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어떤 대통령도, 그 어떤 석학도 역사의 주관자일 수 없으며 구원자일 수 없다는 사실을깨우쳐줍니다. 자녀와의 문제부터 경제적 문제, 건강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 닥친 수많은 크고작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무기력을 인정하고 교만과 오만을 내려놓고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응답 이 때 요셉과 함께 감옥에 있던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 대해 바로에게 보고하고 바로는 그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감옥에서 벗어나 바로 앞에 서는지를 보십시오.  (창 41: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요셉의 오랜 기도가 전혀 예상치 못 한 순간에 예상치 못 한 방법으로 응답됩니다. 결코 오지않을 것 같던 순간이 갑자기 왔습니다. 13년간의 노예와 죄수생활이 극적으로 끝났습니다. 끝나지않을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는 의인의 구원은 급히, 갑작스럽게, 전혀 예상치 못 하게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은 악인의 멸망 역시 감자기 올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눅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믿음은 이 결코 오지않을 것 같은 순간을 인내로 기다리느냐, 마느냐로 드러납니다. 요셉은 13년 간을 숱한 회의와 불안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가 드러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