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완" Tagged Sermons (Page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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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0 지금도 고치시는 하나님 / 마4:23~24

마 4:23-24/지금도 고치시는 하나님 180520 주일설교(아이티의료선교보고) 아이티의료선교팀 먼저 지난 10일부터 15일까지 라틴아메리카의 빈국 아이티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인 라고나브 섬을 다녀온 단기의료선교팀의 보고영상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보고 영상> 이 선교팀과 잠시 동행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신나게 의료사역을 감당하는지 저도 같이 흥분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의미 어리석은 질문같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기에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사람들을 고치는 의료선교팀을 저 아이티 오지에 파송했습니까? 의료팀의 존재의미는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요? 이들이 흘린 수고의 땀과 기도의 눈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 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본문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내내 하신 세 가지 사역을 요약해줍니다. 첫째는 가르치심입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쉽게 풀어서 왜곡된 것을 바로 잡아 가르쳐주셨습니다.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구약의 성도들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은 고치심이었습니다. 모든 약한 것 즉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병들고 상한 모든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치심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역 중 하나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곧 제자들의 사역이기도 했습니다. 눅 9:1을 보십시오.  (눅 9: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눅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천국복음 전파와 더불어 앓는 자를 고치시는 이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곧 제자들의 사역이요, 제자들의 사역은 그것이 곧 교회의 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치유의 은사가 있습니다. 고전 12:9의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으니) 병 고치는 은사를 교회에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치유가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치유사역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흔히 치유사역을 복음전파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도구로서 치유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온전한 이해라고 할수도 없습니다. 치유는 복음전파의 도구의 의미를 넘어서 복음전파와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와 가정과 일터와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치유를 행하신목적을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치유의 이유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고치신 것일까요? 마태복음을 보십시오.  (마 14: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의 치유의 의미는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즉 사랑입니다.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은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이유는 교회의 사명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고 그보다 더 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치유하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 치유사역을 감당합니까? 몇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영적 치유 첫째, 교회는 진리와 사랑을 통해 사람들의 병든 영혼을 치유합니다. 세상에 몸을 고치는 병원이 있고 정신을 고치는 정신병원도 있지만 영혼을 고치는 병원은 없습니다. 영혼을 고치는 것은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복음은 죄로 병든 영혼을 고치고 진리의 말씀은 악에 물든 삶을 고치고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로 깨진 마음을 고칩니다. 이 치유사역을 교회는 항상 감당해야 하고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더욱 진리를 선포하고 더욱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서 어느 교회의 청년부를 섬길 때입니다. 한 여교우가 저를 찾아와서는 울면서 당신 아들을 청년부에 좀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이 분의 남편이 외도를 해서 괴로움을 많이 겪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편을 얼마나 닮았는지 보면 화가 나서 언어폭력에 손찌검도 많이 하며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 아이의 영혼이 깨어졌습니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맞고 자라던 아이가 청년이 되자 도리어 엄마를 때리고 욕을 하고 어느 직장을 가든 일주일을 못 넘기고 사람들과 싸우고 나와버립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좀 낫는데 약을 안 먹으면 더 심하게 욕과 폭력을 엄마에게 휘두른다는 것입니다. 청년부에 등록을 시키고 셀에 넣었는데 얼마나 눈빛이 무서운지 자매들이 다들 무서워서 그 셀에 못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난감해하고 있으려니 셀리더들을 섬기는 코치로 섬기던 자매 둘이 저를 찾아와서는 그 형제를 자기네 셀로 넣어달라는 것입니다. 괜찮겠냐고 물으니 그 자매들 말이, 교회에서 그 형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세상 어디에 갈 데가 있겠냐면서 자기네들이 한 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누나들이 그 형제를 셀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쉬는 날에는 불러내서 밥도 사주고 그러니 이 형제의 얼굴빛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저를 찾아와서는, 목사님, 청년부 모임을 매일 하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왜요? 우리 애가 청년부에만 갔다오면 생전 웃지도 않던 애가 웃고 욕도 안 하고 우울증 약을 안 먹어도 멀쩡하게 하루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영혼이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다 병든 사람입니다. 멀쩡한데 왜 교회 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다 죄로 그 영혼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느 사람이 왜 저래,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의 병든 영혼이 다 치유받기를 축복드립니다. 또 형제, 자매의 아픈 영혼을 치유하는데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와 섬김이 쓰임받기를 축복드립니다.    기도를 통한 치유 둘째, 교회는 기도를 통해 사람들의 병든 육체를 치유합니다. 현대사회에는 예수님 당시의 고대사회와 달리 발달된 과학적 치료를 하는 병원이 있습니다. 의학적 지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안에 있는 원리를 발견해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걸리면 주저하지 말고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기도로 나으면 믿음이고 병원에 가면 불신앙이라는 해괴망측한 근본주의적 가르침에 속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병은 병원에서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까? 병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그 역할은 오히려 병원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병을 치유하는 것은 의사나 병원이 아닙니다. 의사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병든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생명력입니다. 이 생명력은 의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그 생명력을 육체 안에 불어넣어 주셨으며 이 생명력이 회복되어야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간혹 드라마를 보면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을 억제하는 것이지, 없는 생명을 있게 하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교회의 기도입니다. 야고보서를 보십시오.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고대의 민간치료요법입니다.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그 생명력을 주님이 회복시켜주시도록 교회는 기도하여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든 성도들을 심방하여 기도하고 구역에서 기도하고 중보기도시간에 기도하고 새벽기도와 수요기도와 금요기도회의 시간에 계속 해서 기도합니다. 고린도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이들이 우리 중에 있습니다. 누구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기에, 그리고 병 고치는 은사가 없어도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에 능력이 있기에 우리 성도들은 쉬지않고 환우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병든 자를 교회의 기도를 통해 살리시는 줄을 믿으시고 기도를 쉬지 않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선교지의 치유 마지막으로 교회는 선교지에서 치유사역을 감당합니다. 사실 교회는 많은 선교지에서 거의 유일한 치료기관입니다. 지금도 많은 오지의 의료상황은 2천 년 전 이스라엘과 별로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번에 의료팀이 방문한 라고나브섬 산간지방만 해도 평생 단 한번도 의사를 만나보지 못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선교팀이 4*4 오프로드용 SUV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길이 얼마나 돌이 많고 험한지 도무지 속도를 내지못하고 꿀렁꿀렁 좌우로 흔들리기를 몇 시간을 가야 합니다. 이동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산 아래에 내려오느냐고 물으니 안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산 위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마을이 라고나브섬 안에만 수십 개가 넘습니다. 20살만 넘으면 이빨이 성한 데가 없고 여자청년들은 결혼도 안 했는데 아이들이 둘, 셋씩 됩니다. 주민들은 모두 두통과 복통, 허리통증을 안고 삽니다.  이번에 라고나브섬의 소망클리닉에 우리 교회 교우들이 도네이션한 초음파진단기로 여러 사람들의 중병을 일찍 발견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곳에서 사역하시는 김성은 선교사님 말이 이런 진단기가 없었다면 많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치료도 못 받고 앓다가 그냥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평균수명은 50세가 채 되지 않습니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살아가지만 비행기로 불과 몇 시간도 안 가면 이런 곳이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고 이 사명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장로교회 전 교우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진리와 사랑과 기도와 섬김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여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20180513 부모를 기쁘게 하는 믿음 / 잠 23:22

잠 23:22/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 180513 어버이주일 무조건적 사랑 감신대 교수이셨던 선한용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에게는 2개의 신앙이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 신앙이요, 둘째는 어머니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 사셨던 선교수님의 가족은 2차 대전 중 미공군의 폭격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집 근처에서 쾅 하고 폭탄이 떨어지고 집이 무너질 듯 요동하면 아버지는 아이쿠야 하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시는데 어머니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서 어린 아들을 덮친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한국에 들어와 사시다가 6.25가 일어났습니다. 선교수님의 마을에도 공산군이 들어와서 젊은이들을 모두 끌고갔는데 숨어지내던 청소년이었던 선한용 교수님도 발각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울며불며 뒤따라오다가 마을 어귀에서는 다들 돌아갔는데 어머니만 고개를 몇 개를 넘도록 쫓아오셔서는 ‘내 아들 대신 날 잡아가소’하고 울며 매달리셨습니다.  부모의 자녀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부모공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경하기 힘든 이유가 많이 생깁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가 고지식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잘 모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빠, 도와줘. 이건 어떻게 해? 아빠, 헬프 미~’ 아빠는 평화에게 모르는 것이 없는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빠 말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들이 생겼습니다. ‘아빠, 선생님이 아니라 그랬어.’ ‘아빠, 친구들이 이건 꼭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 저에게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빠가 자기보다 영어도 못 하고 미국문화도 잘 모르고 이제는 힘도 더 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평화와 장난치느라 한 번씩 씨름을 하면 힘은 또 세졌는지 많이 컸구나 하는 대견스러움과 곧 내가 필요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장기와 팔씨름을 이기던 날이 생각났습니다. 허허 웃으시던 아버지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섭섭함을 느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어머니는 이런 염려, 저런 걱정, 훈계와 잔소리를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말로는 네, 네 하지만 내심 대학을 다녀보지 않으신 어머니가 대학생활에 대해 뭘 아실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바로 이런 저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머리가 굵은 자식이 아버지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어머니를 무시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늙은 부모는 당연히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집니다. 힘겨운 시대를 견뎌온 부모는 풍요로운 시대가 여전히 낯섭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겨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까? 부모에게는 자녀가 가진 지식, 학력, 돈, 실력, 젊음보다 더 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보물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셨고 사랑으로 만물을 회복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부모는 이 사랑으로 자녀를 출산하고 이 사랑으로 힘겨운 양육을 감당하고 이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자녀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존재가 우리를 부모처럼 염려해줄까요? 목숨걸고 사랑한다던 연인이나 부부조차도 함께 있을 때 뿐 헤어지면 잊어버리고야 맙니다. 둘도없던 친구들도 멀리 떨어지면 눈에서 멀어지는만큼 마음에서도 멀어집니다. 세상 어떤 관계도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그러나 눈 감기 전까지 잊는 법이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공경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또 가르치십니다.  (출 20: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 27: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부모공경여부에 따라 복과 저주의 길이 나뉜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이에게 먼저 땅을 주시고 장수하는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길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80506 가정의 선교사 / 잠 22:6

잠 22:6 / 가정의 선교사 180506 어린이주일 왜 자녀를 가지나 저의 아버지는 7남매 중 장남, 어머니는 7남매 중 장녀이셨습니다. 두 분의 열네 형제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결혼하였고 가정마다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명절이면 친가를 가든 처가를 가든 스무 명이 넘는 사촌들로 북적댔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당시의 여느 가정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는데요, 그러나 이런 모습은 앞으로 거의 보기가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50대 이상 교우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 중 거의 빠지지 않는 소재가 바로 결혼하지 않고 있는 자녀들 이야기입니다.…

20180429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겔 37:15~23

겔 37:15-23/우리의 소원은 통일 180429 주일설교 남북정상회담 <영상>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영상을 보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한국시간으로 지난 금요일인 4월 27일 남북이 분단된 후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무려 3,000명의 기자단의 규모가 보여주듯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가진 이 정상회담은 불과 얼마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두 정상은 이 날 하루 회담 결과 많은 중요한 합의를 판문점 선언이란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중요한 몇 가지만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