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39-42/거쳐가는 믿음과 종착역의 믿음
210214 주일설교 요한14
참 믿음이란
최근 안타깝게도 교우들의 장례예식을 많이 치르는데 한 중년의 남자 교우의 마지막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팬데믹으로 면회가 제한되어 전화통화로 안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교우께서는 평소에도 성령님과 깊이 교제하셨는데 병실에서는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환하게 웃으시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남은 생애를 주님의 일만 하다가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장기를 기증하고 주님 곁으로 가신 장례식에서 아내인 교우께서 말씀하시기를, 남편이 병상에서 유언처럼 이런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는 겁니다. ‘여보, 세상에 거짓신자가 너무 많아. 우리는 진실한 신자로 삽시다.’ 부군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도 남은 생애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시고 장례 후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구하며 저에게도 늘 기도를 부탁해 오셨습니다.
‘세상에 거짓 신자가 너무 많아. 나는 진실한 신자로 살고 싶다’는 고인의 유언이 한동안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바람일 겁니다. 거짓 신자는 성경의 주요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것이고 심판 때에 양과 염소로 신자들이 나뉠 것이고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 할 것이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끼는 때가 또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듣다보면 ‘그럼 나는 진짜 신자인가? 나의 믿음은 진짜 믿음인가?’하는 의문이 들지 않으십니까? 참된 구원에 이르는 진짜 믿음은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진짜일까요? 참 믿음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답을 오늘 본문의 수가성 사람들에게서 찾아봅니다.
서로 다른 믿음의 단계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사건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야곱의 우물 가에서 예수님과의 대화 후 마을로 달려간 여인의 말을 듣고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러나왔습니다. 잠시 대화 후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머무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수가성은 사마리아에서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동네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요약해 설명하는 4개의 구절 속에 믿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4번이나 등장합니다. 한 절에 한 번씩입니다.
(요 4:39) … 사라리아인들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 4:41) …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 … 우리가 믿는 것은… 구주신 줄 앎(믿음)이라…
즉 이 단락의 주제가 바로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네 번이나 등장하는 믿음이 서로 깊이가 다른 두 종류란 것을 사마리아인들의 입을 통해 이렇게 42절에서 설명합니다.
(요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믿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에 먼저 여인의 말을 듣고 믿는 믿음이 나오고 이어서 본인들이 직접 듣고 믿는 믿음이 나옵니다. A가 아니고 B이다 즉 A와 B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른 최종적 믿음의 상태는 A가 아니라 B입니다. A가 아니라 B가 진짜 믿음, 성도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A는 거쳐가는 믿음 혹은 불완전한 믿음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떤 믿음이 거쳐가는 믿음이요, 어떤 믿음이 도달해야하는 참 믿음일까요?
충격이 만드는 믿음
먼저 거쳐가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놀람이 만드는 믿음으로 39절에 나옵니다.
(요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유대인만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는 게 아닙니다. 경멸당하는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을 좋아하겠습니까? 당연히 그들은 유대인들을 싫어하고 멸시하겠지요. 그런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자신들과 같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니요! 어떻게 유대인들을 향한 거부감과 의심을 거두고 선뜻 그를 메시야로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놀람’입니다. 그녀의 과거를 모두 꿰뚫어보듯이 안다는 말에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전까지만 해도 동네사람들과 어울리기조차 싫어하며 물의 기름처럼 피해다녔는데, 갑자기 동네사람들에게 달려와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붙들고 흥분해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녀의 태도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 또한 그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태도변화만 봐도 우물가에 있다는 그 사람에게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그 무엇은 마치 지진처럼 우리 마음에 충격을 주고 견고한 불신과 회의의 울타리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기적을 경험합니다.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꿈도 꾸지 못 하던 큰 성공을 거둡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실패를 딛고 재기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런 놀랄만한 경험들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의 세계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줍니다.
사람이 만드는 믿음
둘째는 사람들로 인한 믿음으로 42절을 소개됩니다.
(요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
이 말은 수가성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녀의 말 때문에 믿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녀의 증언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낯선 유대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말, 선한 행동 혹은 변화된 삶은 일정한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습니다. 악한 말 한 마디가 사람의 영혼을 칼보다 더 날카롭게 찔러 죽입니다. 선한 말은 죽어가는 사람도 부활시킵니다. 친절한 행동은 꽁꽁 얼어붙은 영혼을 따뜻하게 녹이는 봄기운입니다. 변화된 삶은 기적을 믿지 않는 불신으로 가득 찬 마음의 댐을 무너뜨립니다. 분명 사람들의 말, 행동, 삶은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의 불신앙을 몰아내고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충격적 사건, 믿음의 말, 선한 행위는 사람들이 불신의 벽을 너머 믿음의 문을 두드리고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도록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들이 은혜를 입도록 기도하고 믿음의 말과 선한 행실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만드는 믿음은 어디까지나 거쳐가는 믿음이지, 종착역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 점은 한 가지만 생각해 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어느 종교든 혹은 비종교인의 삶에서든 확신의 말, 선한 행위 그리고 기적적인 일들은 일어나고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도 이런 것 때문에 자신들 종교에 확신을 갖고 혹은 무신론적 삶에서도 의미를 찾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궁극적인 믿음, 신자가 도달하여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종착역의 믿음은 이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그 종착역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님과 동거함이 만드는 믿음
첫째는 주님과 동거함으로 생기는 믿음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요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그들은 예수님을 수가성으로 초청했습니다. 이틀 동안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말씀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주님과 동거하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합니다. 그 분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크심을 경험합니다. 그 분의 사랑과 위로와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분이 훌륭한 랍비를 넘어 선지자를 넘어 메시야요, 세상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습니다. 그 분을 알게 됩니다. 42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요 4:42) “…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믿음)이니라.” 하였더라.
참 믿음은 주님과 동거하는 경험이 없이는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구원의 이르기 위해 주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다 즉 수가성 사람들처럼 주님을 초청하여 그 분과 동거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영생의 길을 구하는 이들에게는 계속 해서 와 보라고 명하십니다.
(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요한의 제자들)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주님이 계신 곳에 가서 보고 함께 거해야 합니다. 주님을 우리 삶에 초청하여 동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참된 믿음이 생깁니다. 그 동거는 마치 결혼생활과 같습니다. 데이트 마치고 헤어지지 않고 24시간을 함께 합니다. 그 동거는 또한 연인에게 빠진 젊은이와 같습니다.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지울 수 없습니다. 그 동거는 마치 숨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과의 영적 교제가 멈추지 않고 계속 됩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과 더불어 살다가 주일에 한 시간 주님을 만나는 것은 당연히 동거가 아닙니다. 교도소 면회 가듯이 주님을 면회가는 것입니다. “목사님, 주님 면회 신청합니다.” “네, 교우님, 면회 안내지 받으시고요, 거기 통에 신청서 봉투 넣으세요. 헌금봉투라고 적혀있습니다. 한 시간 허락됩니다.” “아, 목사님, 감사합니다. 주님 잘 계시네요. 오늘은 두둑히 넣었으니 주님께 맛있는 것 좀 넣어주세요.” “그럼요, 다음 주까지 제가 주님 잘 돌볼테니 신경쓰지 마시고 마음대로 사시다가 다음 주에 또 면회오세요.” 이런 코메디를 혹시 우리는 매주 찍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과 동거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만드는 믿음
종착역의 믿음은 둘째로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믿음입니다. 41-42절입니다.
(요 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그 분께 말씀을)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수가성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듣고 믿는 믿음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깨닫고 알고 믿었습니다. 사람의 말, 증언, 전도를 듣는 믿음은 거쳐가는 믿음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종착역의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믿음입니다.
말씀에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빛과 진리가 가득 합니다. 말씀에는 소망과 은혜가 가득합니다. 말씀은 죽어가는 이를 살립니다. 잠자는 이를 깨웁니다. 지친 이를 벌떡 일으킵니다. 불신앙의 마음을 겸손과 믿음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의 능력은 온 종일 외쳐도 다 묘사하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을 대신하지 못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 듣기를 간절히 원한 마리아를 예수님은 칭찬하셨습니다.
(눅 10:42) “…마리아는 이 좋은 편(말씀 듣는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쉬지않고 말씀을 가르쳤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그 말씀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는 말씀의 집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창고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학교입니다. 교회가 구제하여 사람들을 돕고 봉사활동으로 유익을 끼치고 친절을 베풂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해도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대신은커녕 비교조차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태양입니다. 등대를 아무리 만들고 불을 켜도 태양이 한 번 떠오르면 사라집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대지에 푸르르게 살아나고 생명이 움트고 어둠과 추위와 죽음은 물러갑니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참 믿음, 구원의 믿음, 영생의 믿음이 자랍니다.
기적이나 성공이나 기도응답이나 사람들의 증언이나 친절이나 선행으로도 우리의 불신앙의 댐에 금은 갑니다. 그러나 그 댐을 완전히 부수어버리고 맹렬히 쏟아져내리는 믿음으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만드는 것은 주님의 임재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과 동거하고 그 말씀을 전심으로 듣는 이만이 참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영원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시는지요? 그것이 여러분을 참신자인지, 무늬만 신자인지를 결정합니다. 참되고 영원한 믿음의 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