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기를 원하느냐 / 요 5:1-9

낫기를 원하느냐 / 요 5:1-9

요 5:1-9/낫기를 원하느냐

210307 주일설교
내 책임이 아니예요
뉴욕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지고 있는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로 지금은 고인이 된 정신과의사 스캇 팩이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부대에서 의사로 근무할 때 일입니다. 부대 사령관이 알콜중독인 장교 한 사람의 치료를 부탁해 왔습니다. 자신은 중독자가 아니며 술을 마시는 것도 자기 탓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그 장교와의 상담치료는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되곤 했습니다.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나요?’ ‘오키나와에서는 저녁에 술마시는 것 외에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독서는 어때요?’ ‘좋지요.’ ‘그럼 술 마시는 대신 저녁에 독서를 하시는 것은 어때요?’ ‘부대는 독서하기에 너무 시끄러워요.’ ‘조용한 도서관을 가면 어때요?’ ‘너무 멀어요.’ ‘술집보다 더 먼가요?’ ‘그렇지는 않지만 저녁시간에 책만 읽기는 좀 내키지 않는군요.’ ‘낚시는 어때요?’ ‘좋지요.’ ‘그럼 술 대신 낚시를 시작해 보시지요.’ ‘혼자서 무슨 재미로 낚시를 하나요?’ ‘낚시동호회를 하는 부대원들을 소개시켜 드리지요.’ ‘글쎄요. 시간이 없을 것 같요.’ ‘주말에 가시면 되지 않겠어요?’ ‘주말을 내내 낚시만 하라고요?’ ‘주말 내내 술을 마시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이 빌어먹을 섬에선 차라리 내내 술을 마시는 것이 나아요.’ 한 동안 치료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캇 팩은 사령관에게 자신에겐 그 장교를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장교는 술을 계속 마시다가 불명예스럽게 퇴역당하고 말았습니다.
스캇 팩은 여러 사례를 소개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해결할 방법은 없다고 결론내립니다. 문제의 원인에도, 해결에도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터, 가정, 자녀, 친구, 건강, 관계 등 온갖 문제에서 책임을 지지 않고 타인과 세상을 탓하려는 태도가 만연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여러 가지 성격장애가 나온다고 합니다. 성격장애에는 회피성, 의존성, 강박성, 편집성, 분열성, 히스테리성 장애 등이 있습니다. 반면 모든 일에 자신이 과도하게 책임을 지려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경증 즉 노이로제 증세가 나옵니다. 신경증에는 공황장애, 불안장애, 강박장애 등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장애들이 있습니다.
좀 단순화하면, 신경증을 유발하는 태도는 늘 ‘내 잘못이야, 내가 더 잘 해야만 했어’라고 말합니다. 반면 성격장애를 유발하는 태도는 늘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야. 세상의 잘못이야. 나는 책임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경증 환자는 자신을 못 살게 굴고 성격장애 환자는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못 살게 군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책임과 타인의 책임을 공정하게 구분합니다. 자신이 책임질 일을 책임지고 타인의 책임을 무모하게 떠안지 않습니다.
이 원리는 영적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구원은 죄를 포함한 모든 영적 문제를 해결받고 치유받는 과정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문제의 원인에도, 해결에도 우리가 져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전반부는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있었던 치유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성인 남자들이 모두 그렇게 하듯 명절을 지키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정신적 수도였습니다. 성전 북쪽으로는 제사에 쓸 양을 끌고들어가는 양문이 있고 그 북쪽으로 다섯 개의 회랑으로 둘러쌓인 두 개의 연결된 샘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무대인 베데스다 연못인데요. 이 연못은 빗물을 모아두는 샘이었지만 동시에 샘근원도 있어서 바닥에서 물이 솟아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전설이 생겼는데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그 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 치유받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무튼 그 전설에 기대어 많은 환자들이 그 샘 주변에 모여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유인지 이 샘을 방문하셨고 거기서 38년된 병자를 만나십니다. 병명은 모르나 사건전개를 보면 분명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병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향해 던지신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6절입니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의문이 생깁니다. 세상 모든 병자들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낫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어떤 병자가 빨리 낫지 않기를 바라겠으며, 병자에게 낫기를 원하느냐는 것처럼 어리석은 질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도대체 왜 이런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던지실까요? 그 이유는 같은 구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누운 것을 보셨는데 병이 아주 오래 되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그 병자의 색이 바래고 누더기가 된 옷, 가까이 가기 힘들 정도의 악취, 그의 주변으로 널려있는 굳어버린, 어쩌면 아직 굳지 않은 배설물들을 보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몰골, 소망을 잃어버린 표정, 주변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지친 모습을 보셨을 지도 모르지요. 구걸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에 적응해버린 그의 모습, 자신을 여기 버려둔 가족들, 화려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부유한 이들과 세상을 끊임없이 욕하고 저주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적응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38년은 무엇에든 적응하기 충분히 긴 세월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 적응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눈에는 ‘그가 어쩌면 낫기를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할 만한 무엇인가가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태는 치유에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방문했을 때 벌어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마 13:58) 그들(나사렛 사람)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환자, 책임을 부정하는 환자는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고치기 어렵듯이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은혜를 베풀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넣어주는 이가 없나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상식적인 답이라면 ‘네, 낫기를 원합니다. 할 수 있으면 저를 어서 속히 고쳐주십시오.’라고 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결로 대답합니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답은 두 가지 점에서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첫째 헛된 전설에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둘째 자신이 처지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사실 그가 이런 처지에 놓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모든 불행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병은 분명히 죄 때문입니다. 그는 38년 동안의 불행에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는 못 한 채 남탓만 해왔던 것이빈다. 그는 연못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죄를 해결해야 하고 남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명하셨습니까? 8절입니다.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무슨 뜻입니까? 첫째, ‘네 문제는 연못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누가 해결해 줍니까? ‘내가 해결해 준다. 너의 죄를 해결해 줄 이는 나 밖에 없다’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둘째, ‘누가 넣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일어나서 가라. 네 문제는 네 잘못이지 너를 도와주지 않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연못을 의지하지도 말고 남탓 하지도 말고 너를 용서도 하고 치유도 할 내 말을 듣고 순종하여 일어서서 가라’하시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에게 선포된 것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이들도 들어야 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 답을 얻기 위해 38년이란 수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 수많은 치유사례가 나오지만 투병기간을 이렇게 명시한 예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38년은 공교롭게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한 시간과 일치합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스라엘은 왜 38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합니까? 가데스바네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네, 여러분도 알다시피 12명의 정탐꾼이 돌아와 한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이 겁에 질며 울며불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들어갔어야 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 하고 광야를 38년이나 더 방황하여 광야생활 40년을 채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군대를 의지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과 지도자들의 탓을 한 대가입니다. 지금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곧 구약의 어리석었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적으로 연못가에 누워 헛된 꿈을 꾸며 남탓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 수많은 영적인 병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희망은 연못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분명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과 그 사이의 대화와 교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병자의 만남이 이 짧은 세 문장으로 끝났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그의 영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치유되었습니다. 더 이상 연못이 움직이기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누군가 그를 넣어주기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자리를 들고 일어서 걸어갔습니다. 38년 동안 불가능했던 치유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38년된 병자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사회적 기업인 희년은행에서 도시서민, 경제적 약자를 돕는 가계부채전문상담사로 사역하는 서경준 집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수십 년을 고통과 절망의 연못가에 누워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섯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하루도 빠지지 않는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가난에 늘 괴롭고 우울하게 살았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한 번은 가족들이 살려면 아버지가 없어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버지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며 유서를 써놓은 적도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자신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과 주식투자에 모두 실패하여 큰 빚을 졌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늘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를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직장상사가 여러 차례 그를 전도했습니다. 그를 따라 교회를 나간 첫 주일 목사님이 설교하시기를 ‘하나님은 한 번도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늘 버림받은 인생이라 생각했던 그는 그 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원망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절망의 연못가를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이 아버지 때문이라며 늘 쏟아놓던 원망의 자리를 걷어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스스로 못 견디겠다며 정신병원에 들어가셨습니다. 면회를 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경준아,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니?’하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 순간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힘겨운 일제시대 태어나 6.25 전쟁을 겪으며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달려오신 76년 평생에 사랑이란 것을 받아보지 못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랑과 전도를 받고 생애 마지막 몇 년을 늘 성경책과 찬송가를 손에 들고 주님을 섬기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돈의 연못이 한 번 움직이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란 헛된 희망을 버렸습니다. 검소하게 생활하며 빚을 모두 갚고 스스로 수입이 더 작은 사회적 기업인 희년은행에 옮겨 도시서민, 경제적 약자, 미자립젊은이들을 돕는 가계부채전문상담사로 사역하며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 38년째 연못가에 누워있는 이는 없으신지요? 38년 된 죄, 38년 된 중독, 38년 된 미움의 연못가에 누워있는 이는 없습니까? 38년 된 미련, 38년 된 고집, 38년 된 게으름의 거적을 뒤짚어쓰고 누워 있는 이는 없습니까? 연못물이 움직이듯 무슨 일이 일어날 때까지 마냥 미루고 기다리기만 하는 이들은 없습니까? 누군가 나를 물에 넣어주지 않기 때문이라며 탓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는 이는 없으신지요? 그 모든 절망과 어리석음은 오직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치유됩니다. 해결됩니다. 구원받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낙심과 절망의 연못을 떠나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