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믿음으로 / 요 4:43~54

더 깊은 믿음으로 / 요 4:43~54

요 4:43-54/더 깊은 믿음으로

210221 주일설교/왕의신하치유
막막하고 답답한데 
한국의 두레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던 때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구장 권사님이 어느 날 그러시는 겁니다. “목사님, 죄송해요.” “뭐가요?” “저 지난 주에 점보러 갔었어요.” “네? 교구장님이 점보러 다니시면 어떡해요?” “아, 하도 답답해서요.” “뭐가 그리 답답하시던가요?” “점쟁이에게 가면 눈에 보이는 부적이라도 떡하니 써주면서, 걱정마, 이거 붙여두면 액운이 물러가, 라고 하잖아요. 그거라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데 목사님에게 가면 성경구절 읽어주고 힘 냅시다, 기도합시다. 그러시니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여전히 답답하잖아요.” “그래, 점보니 속이 시원하시던가요?” “아유, 가보니까 별 거 없더라고요. 괜히 갔어요.” 이런 기독교인들 때문인지 예전에 어느 목회자는 어느 기독신문칼럼에서 주장하기를, 교회에서도 무속인들처럼 예언기도를 많이 해줘서 점보러 다니는 교인들을 붙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에는 한 때 소위 용한 목사님들이 활동하곤 하셨습니다. 제가 일반대학을 다니며 진로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려니까 당시 이미 신학교를 다니던 어느 전도사 친구가 저를 용하다는 목사님께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보자고 데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이 권사님처럼 답답해서 점이라도 보고 가고 싶은 분들이 적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판데믹으로 경제적으로도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정서적으로도 지치고 답답해서 ‘주님, 좀 살려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어도 눈에 보이는 무슨 확실한 응답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교회를 가도 목사는 성경말씀이나 읽어주고 믿으라고 하고… 답답한 성도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칼럼의 주장처럼 교회에서도 예언기도하고 부적은 비슷한 것이라도 좀 쥐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막막하고 답답한 성도들이 붙들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한 아버지에게서 그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땅치않으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마리아땅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난 것을 계기로 수가성에서 이틀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이동하십니다. 갈릴리에서도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과 혼인잔치가 있었던 가나에 차례로 머무십니다. 45절을 보면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그 환영이란 회당에서의 만남입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이 가나로 옮기시자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온 일부러 예수님을 찾아 가나까지 온 왕의 신하가 아들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이 때 왕은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 사람들의 행동에 다소 냉소적이셨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요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고향사람들의 이 환영이나 고위관리의 간청이 대수로운 일도 아니고 마땅치 않다는 뉘앙스입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그들의 환영이나 간청이 모두 당신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 이유는 이런 반응이 모두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필요해서였기 때문입니다. 45절과 48절을 보십시오. 
(요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증거로 생기는 믿음 
예수님은 표적, 기사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가지는 믿음을 마땅치 않게 여기셨습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눅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눅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왜 표적, 기사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로인한 믿음을 마땅치 않아 하셨을까요? 그것은 불량식품처럼 건강치 못 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난 주에 살펴본 수가성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여자가 전해 준 말에 놀라서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깨닫는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놀람이 주는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놀람이 주는 믿음은 그 놀람의 사건이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사라집니다. 
비유하자면 믿음은 사랑과 같습니다. 명품을 선물하는 남자와 예쁜 여자에게 누구나 먼저 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분명 호감의 이유가 되지만 그 호감은 곧 남자의 선물과 상관없이 또 여자의 젊음과 상관없이 한 인격을 향한 애정과 책임과 성실함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이렇게 성장하지 못 하고 처음 호감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물욕과 정욕에 불과합니다. 명품과 젊음이 사라지면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도 함께 사라집니다.
믿음 역시 표적, 기사, 기적, 기도응답 같은 충격을 주는 요소에 의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있서는 안 되고 예수님 그 분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과 충성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짜 믿음입니다. 그럼 무엇이 그런 믿음의 성장을 가져다 줄까요? 수가성 사람들에게서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동거함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음이었습니다. 지난 주 설교가 기억나시지요? 오늘 본문의 왕의신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가르쳐줍니다. 이 고위관리가 예수님에 간청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의 요구는 아들이 죽기 전에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즉 ‘자신과 함께 내려가서’ 병세를 보고 안수하여 고쳐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고 예수님이 아이에게 안수하여 명하시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답을 주셨습니다. 50절입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혼자 가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가버나움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내가 네 아들을 이미 고쳤으니 갈 필요 없다. 정말입니까? 정말이니 내 말을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관리의 요구와 예수님의 응답이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내려가겠다는 관리의 기대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가지는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의 동행,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 모두 눈에 보이는 증거에 기대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흔히 마주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눈에 보여? 증명해 봐, 그럼 믿지.’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확신한 답을 좀 주시면 좋겠어요. 무작정 기도하려니 답답하고 막막해요.’ 비기독교인 뿐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도 보이는 증거에 기대는 믿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실상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증거가 있는데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그건 그냥 아는 것이지요. 도둑질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cctv가 있으면 그가 도둑이라는 것을 애써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압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도 아닌데 믿음이라 부르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에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진짜 믿음을 요구합니다. ‘내가 같이 가야 마음이 놓이지? 아니, 내가 말만 해도 된다. 나를 정말 믿는다면 내 말을 믿고 너 혼자 가라.’ 예수님은 그가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한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의 도약
이제 관리는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동행해 주시도록 떼를 쓰며 더 버틸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혼자 내려갈 것인가? 쉬워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모험이었습니다. 애초 자신이 가졌던 계획과 기대를 버려야 했습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못 합니다. 또 그가 믿고 혼자 내려갔더니 아이가 여전히 아프면 어떡합니까? 고위관리가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내팽개치고 젊은 랍비에게 간청할 정도로 아이를 사랑한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 괴로움과 죄책감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때 물러서지 말고 그 랍비에게 끝까지 간청해서 어떻게든 데려와야만 했어… 다시 데리러 간다면 가나로 올라가는데 하룻길, 내려오는데 하룻길이 걸릴텐데 이틀을 더 아이가 앓아야 하고 그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정말 모험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무 것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데 주님의 약속만 믿고 여러분의 인생과 자녀과 가정과 일터의 미래를 확신하고 마음을 놓고 편안히 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 관리는 어떤 선택을 하나요? 50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는 믿고 ‘평안히’ 갔습니다. 그는 순종을 선택합니다. 보이는 증거가 없는데 들리는 말씀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 순간 그의 믿음이 도약합니다. 증거를 의지하는 믿음에서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의 도약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순종을 통해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순간 그의 믿음이 도약하고 구원의 약속은 현실이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의 믿음이 도약하고 강물은 갈라집니다. 한나가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일어서 평안히 돌아가는 순간 그녀의 믿음이 도약하고 사무엘은 잉태됩니다. 예수님은 그 관리가 이런 믿음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동거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더불어 믿음을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더 좋은 구원
그가 순종의 믿음으로 도약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51-52절입니다. 
(요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요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오후 1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요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첫째 결과는 구원입니다. 그의 아들이 치유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던 중 길에서 종들을 만나서 듣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그가 원했던 것보다 더 좋은 구원입니다. 열이 떨어지기 시작한 때가 어제 일곱시 즉 오후 1시라고 했습니다. 오늘 종들을 만난 시점이 아침 일찍이라고 가정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던 중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버나움에 도착하지 못 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 말은 자신의 바람대로 예수님을 모시고 내려갔더라면 하루를 넘긴 지금까지도 그의 아들은 여전히 앓고 있어야 했고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혼자 떠났더니 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점, 전날 오후에 이미 열이 떨어져 살아났습니다. 그의 바람보다 더 빨리 치유가 된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항상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구원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엡 3:20)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공동번역)
 
더 견고한 믿음
말씀만 의지하여 순종의 믿음으로 도약한 둘째 결과는 더 견고한 믿음입니다. 53절을 보십시오. 
(요 4: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그가 믿은 결과 그 자신과 그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온 가족이 다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순종의 믿음이 그를 전도자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비유하자면 제가 어릴 때 외가에서 봤던 우물에 설치된 작두펌프와 같습니다. 작두펌프로 우물에서 물을 얻으려면 먼저 펌프 위에 마중물을 한두 바가지 부어야 합니다. 마중물이 펌프내의 공기를 밀어내어 진공상태를 만들어야 펌프질의 힘이 전달되어 깊은 우물 속에 물이 끌려올라옵니다. 순종의 믿음을 마중물로 부어 우리 안의 불신앙을 밀어내고 영적 진공상태를 만들어야 성령님이 주시는 더욱 견고한 믿음이 솟구쳐 나옵니다. 
정리하자면 그의 믿음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쳤습니다. 1단계는 처음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그 때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사실 없고 기적만을 바라는 수준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라기보다는 절박함에 가깝습니다. 2단계는 그의 바람과 달리 ‘믿고 혼자 돌아가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는 믿음의 모험을 하도록 초청받습니다.그 초청에 응답한 그는 순종의 모험을 통해 기적을 바라는 믿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도약하였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마지막 3단계는 순종의 결과 주님의 구원을 체험한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전도하는 믿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증거를 봐야만 하는 믿음에서 증거가 없어도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의 도약은 예수님을 구주로 경험하게 만들고 우리를 전도자로 만듭니다. 이 순종하는 믿음은 수가성 사람들이 보여준 예수님과 동거하는 믿음,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믿음과 더불어 우리를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이 왕의신하처럼 절박한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증거와 기적이 필요하신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를 믿음의 모험으로 초청하십니다. 왕의신하를 바라보시던 그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반드시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의 마중물을 부어 더 깊은 믿음으로 도약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