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5 자유에 관한 진실 / 롬6:15~23

20160515 자유에 관한 진실 / 롬6:15~23

롬 6:15-23/자유에 관한 진실

160515 주일설교

 자유를 감당하지 못 하는 이들

1994년 개봉된, 탈옥을 소재로 한 ‘쇼생크탈출’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에피스드 중 종신형을 선고받고 50년을 감옥에서 보낸 브룩스라는 노인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5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가석방 허락을 받아 감옥문을 나섭니다. 브룩스 노인은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감당하지 못 합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살며 마켓 직원으로 일하는데 기상시간, 식사시간, 메뉴, 취침시간까지 모두 간수가 정해주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거저 받아 쓰고 화장실 가는 것도 간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죄수의 삶을 50년 동안 살다보니 간수의 지시와 허락 없이 모든 것을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고 감옥에서는 거저 받아쓰던 생필품을 이제는 자신이 일해서 구해야하는 생활을 적응하지 못 합니다. 마켓 매니저가 화장실 가는 것은 자신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고 누차 알려주지만 그는 권위 있는 누군가의 허락없이는 화장실 가는 것도 불안해 쩔쩔 맵니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한 그는 결국 감옥으로 돌아가기 작정하고 인질극을 벌이는데 이마저 뜻대로 안 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삶을 마감합니다.

1941년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독일 국민들이 왜 혁명을 통해 쟁취한 바이마르공화국을 포기하고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자유 대신 복종을 스스로 선택했는지를 연구하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역작을 발표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은 선택과 책임이 따르는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해 스스로 파시즘 같은 억압의 체제 속으로 도피한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마냥 좋은 것 같지만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고 구속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고 죄의 노예상태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인용하고 그에 대해 답도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눅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율법에서 자유로워졌고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니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괜찮은 것이냐 하고 도전하는 이들에게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런 질문은 자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자유에 관한 진실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자유란 구속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16)

자유에 관한 첫 번째 진실은 자유란 어떤 구속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룩스 노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온갖 구속이 가득한 감옥에서 자유로운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아무런 구속이 없는 상태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맞이한 세상은 선택과 책임이라는 새로운 법 아래 구속되는 세상입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법에든 구속되어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활은 국가의 법에 구속을 받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법, 미국 와서는 미국법의 구속을 받습니다. 우리의 움직임은 물리법칙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중력과 상대성 이론에서 벗어나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존은 생물학적 법칙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출생과 성장과 노화와 죽음이라는 법칙의 구속을 받지 않은 채 이 생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공상태란 없듯이 아무런 구속이 없는 상태로서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영적 세계에서 인간은 그 무엇엔가에 순종하고 그것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의 존재방식입니다. 그 어떤 것의 다스림도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that I am.’이라고 하신 창조주밖에 없습니다.

순종의 대상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죄와 의가 그것입니다. 죄에게 종이 되지 않는 길은 의에게 순종하는 것 뿐 입니다. 의에게 종이 되지 않으려고 하면 자동으로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의의 종도, 죄의 종도 되기 싫어, 나는 그냥 자유로운 나일 뿐이야.’ 이 말은 마치 ‘나는 살기도 싫고 죽기도 싫어.’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살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지 않은 것은 산 것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다른 상태가 없듯이 죄의 종과 의의 종 사이에 다른 상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죄의 종이 될지 의의 종이 될지의 선택만 남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합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의의 종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참된 자유는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17-18)

자유에 관한 두 번째 진실은, 그러므로 참된 자유란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의 영적 상태는 죄의 종이던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자유의 상태입니다. 똑같은 종노릇인데 죄의 종노릇과 의의 종노릇은 어떻게 다릅니까? 죄의 종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의를 이루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더 많은 죄만 만들 뿐입니다. 참된 의를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의의 종은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참된 의를 행할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행해야 하고 행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참 자유입니다.

비유하자면 죄의 종노릇은 이와 같습니다. 율법이라는 대장이 와서 권총 한 자루, 인간의 굳은 의지라고 적힌 탄창 하나를 던져주고는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욕망이라는 적군을 물리치고 거룩이라는 진지를 사수하라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 정도 진지도 못 지키면서 네가 군인이냐고 혹독하게 비난을 해대지만 눈물을 흘리며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적을 물리칠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결국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장이 두려워 총쏘는 흉내만 낼 뿐입니다.

의의 종노릇은 어떤 것입니까? 대장되신 그리스도께서 M60 자동 기관총에 무한대로 발사되는 은혜라는 탄창을 채워 주고 구름같이 허다한 군대를 좌우에 붙혀주고 하늘에서는 성령 제트기의 폭격과 후방에서는 천사들이 쏘아대는 포대의 포격지원을 해주며 적을 물리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일제히 수십만 발의 총탄과 포탄과 폭격이 밀려오는 적군을 집중타격하며 괴멸시킵니다. 총쏘기가 서툴면 즉시 말씀의 교관이 옆에서 도와줍니다. 총알이 부족하면 기도의 공병대가 달려워 탄창을 채워줍니다. 전투가 지치고 용기가 꺾이면 예배와 성례의 장교가 달려와 용기를 북돋우어 줍니다. 팔이 피곤하고 다리가 후들거리면 곁에서 함께 싸우는 거룩한 성도인 전우들이 어깨동무하고 일으켜 줍니다. 그리고 대장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매고 앞장 서셔서 적의 주력군을 괴멸시키십니다.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났습니다. 나는 남아있는 잔당들을 확인사살하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의의 종이 되어 죄를 물리치고 원하는 의를 행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자유가 여러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의 승리를 날마다 경험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참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19-23)

자유에 관한 세 번째 진실은, 참 자유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지키는 것은 마치 상류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팔젖기를 멈추면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류로 떠내려 가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의의 종이 되려는 싸움이 쉽지 않은 것이기에 피로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라리 죄의 종노릇하던 때로 도피하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어차피 죄의 종이나 의의 종이나 결국 종노릇인데 아무 종노릇이나 하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고기를 마음껏 못 먹게 되자 이집트에서는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었다며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그런 유혹을 받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눅 11: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눅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었으나 의의 종으로 순종의 삶을 살지 않아서 다시 죄의 종노릇하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전보다 더 심한 영적 몰락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20-21절입니다.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죄의 종이었던 때를 생각해 보라, 그 때는 의를 행할 능력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가 아니었느냐,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이냐, 부끄러운 일이며 멸망으로 끝나는 삶이다, 어떻게 그런 삶을 그리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이제 성도들이 가게 된 의의 종노릇은 어떤 삶입니까? 22-23절입니다.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는 우리 삶에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삶은 멸망의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의의 종노릇하는 삶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옛 삶으로 되돌아갈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고기와 떡을 먹으려고 노예 생활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입니까! 올림픽 면류관 하나 얻으려고도 그토록 절제해서 체중을 관리하고 오랜 시간 훈련하여 근육을 단련하는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려고 의의 종노릇하는 것이 비록 쉽지 않다고는 하나 어찌 감당치 못 할 어려움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 아래 살아가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되는 것입니까! 의의 종노릇이 어렵다고 죄의 종노릇을 하러 돌아가겠습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영생이니 오직 영생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