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9-16/이방인도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나
160117 주일설교 로마서13
백정 박성춘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는 박서양입니다. 그의 아버지 박성춘은 조선 말 백정이었습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의 백정의 지위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백정은 인구조사도 제외되고 거주지역도 제한되었습니다. 양반집 아이들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고 눈도 마주치면 안 되었습니다. 이름도 없었고 양반은 물론이고 상인들 집에 방문해도 마당에 무릎 꿇고 앉아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박성춘은 백정으로 태어나 백정의 딸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번은 허가 받지 않은 소를 잡아 주었다는 이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 때 포졸들을 막으려던 그의 아내가 육모 방망이에 맞아 죽고 며칠 후 둘째 아들까지 병으로 죽자 남은 아들이라도 백정으로 살지 않게 하려고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 교회의 무료학당에 보냈습니다. 후에 박성춘이 교회에 출석하자 양반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할 수 없다면 교회를 나가버렸습니다. 후에 그가 장로가 되자 양반 교인들은 또 다시 들고 일어나 이를 극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신분의 차별도 없다며 단호히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후에 선조 임금의 11대손인 이재형이 1914년 장로가 되어 한 교회 안에서 왕손과 백정이 함께 장로로 섬기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백정 신분을 벗고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습니다.
‘한국개신교 선교역사’의 저자 마르다 허틀리 여사는 조선백정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도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 예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최근 한국 기독교에 반대하는 소위 안티기독교도들의 주된 논리 중 하나는 기독교가 외래종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세계화 버전인데, 유대인들이 믿던, 유대인을 창시자로 섬기는 유대인의 종교를 왜 단군의 후손인 한국인들이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 입장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이해가 어려운 집단처럼 보입니다. 아니, 아브라함과 피 한 방울 섞인 적도 없는 이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자신들 유대인들에게 주신 약속을 마음대로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니 기가막히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신분과 행위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됩니다. 먼저 신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으로서의 택함입니다. 그리고 행함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신분만으로도 안 되고 행함만으로도 안 됩니다. 유대인의 신분을 가진 이가 율법을 충실히 지킬 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이런 유대인들 입장에서 이방인들은 선택받은 신분도 아니요, 율법을 지키며 살지도 않으니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누린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할례와 구원
오늘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로마서의 본문을 마주 대합니다. 방금 제기된 문제 그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첫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고 둘째 율법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라고 용감하게도 믿는 것입니까? 바울은 신분과 행위 두 측면을 오늘 본문에서 차례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신분의 문제를 9절에서부터 보십시오.
(롬 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유대인)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이방인)에게도냐…
이 복은 바로 앞의 6-8절이 설명하는 죄사함을 누리는 복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복은 그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 즉 자신들 유대인들만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 유대인들에게 복을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 12:2입니다.
(창 12:2) 내(여호와)가 너(아브라함)로 큰 민족(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봐라,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우리 유대인들에게 복의 약속을 주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의 약속이 유대인의 경계에 갖힐 수 없다는 점을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롬 4:9) …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아브라함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인정을 받은 시점이 언제입니까? 10절입니다.
(롬 4: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할례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대표적 표징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죄사함의 복을 누린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므로 할례와 이 복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곧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이냐, 아니냐가 이 복을 누리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1-12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롬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으로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복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증거로서 후에 주신 것이니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는 자라면 누구나 그 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롬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결론적으로 신분으로서의 유대민족은 죄사함과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처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율법과 구원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써 율법도 다룹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무슨 공로로 감히 의로움에 대해 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13절입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창 15장에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셨는데 히브리어에서 땅을 가리키는 단어 ‘에레츠’에는 대지, 지구, 세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약속은 온 세상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신약성경이 성도들에게 약속한 바입니다.
이 약속은 율법을 지킨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얼추 500여 년이 지난 후에나 그 후손들이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율법의 율자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의롭게 됨과 율법 사이에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율법은 왜 주신 것입니까? 15절에서 바울 사도는 다시 한 번 율법의 기능에 대해 상기시킵니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이 있는 곳에서는 인간의 범법이 드러난다! 즉 율법은 인간의 죄악상을 고발하려는 것이지 의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고 죄를 씻음받는 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롬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결국 아브라함은 육체적으로는 유대인의 조상이지만 영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여, 믿는 자들 모두의 조상이 됩니다.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함받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율법을 충실히 지킨다는 사실도 구원의 근거가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인 줄 믿습니다.
신분도 율법도 아닌 믿음
하나님이 믿음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삼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분을 구원의 길로 삼으셨다면 우리 대부분은 구원의 은혜를 도저히 맛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택함받은 민족도 아니요, 고귀한 혈통이나 지위나 지성을 가진 부모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 한 우리 대부분은 도무지 구원과 상관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율법준수를 구원의 길로 삼으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 율법을 다 지켜행할 도덕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도덕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인류 중에 있어서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곤 하지만 그들도 하늘에 닿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유하자면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이 점프하는 NBA농구선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의 점프력은 우리가 보기에 혀를 내두를 만 하지만 하늘에 닿지 못 하고 금방 땅으로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신분도 행위도 아닌 믿음을 구원의 길로 삼으셨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 구원의 길을 열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이런 자비로 하나님은 특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이방인에, 죄인인 우리마저도 이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찬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