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07 성도가 거하는 곳 / 요15:1~11

20160207 성도가 거하는 곳 / 요15:1~11

요 15:1-11/우리가 거하는 곳

 

160207 주일설교

 무의미한 삶

유투브에서 어렵지않게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사이의 논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 변증가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박사와 신무신론자 언론인으로 불렸던 크리스토퍼 히친스와의 논쟁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토론이 벌어진 대학 강당에서 한 학생이 일어나서 무신론자인 히친스에게 질문하기를,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주는 신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합니다. 히친스는 답하기를 신이 없이도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자신은 자신의 자유를 찾고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자유를 찾아주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크레이그 박사는 존재에 대한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가 있는데 신이 없다면 객관적 의미는 찾을 수가 없고 히친스처럼 주관적 의미만 찾을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 중 객관적 의미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인간은 죽어서 소멸될 뿐이고 우주도 과학이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무한히 팽창하고 점점 차가워져 결국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든 결과는 똑같기 때문에 현재 삶의 객관적 의미란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주관적 의미는 히친스처럼 객관적 의미를 찾을 수 없기게 결국 각자가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인데 이것은 일종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유를 증진하고 한 시즌 최고 홈런 기록을 깨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든 않든 결과는 똑같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진정한 삶의 의미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미란 행위나 존재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열심히 살려는 행위가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못 한다면 그 행위에 무슨 중요성이나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이것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공부를 하든 안 하든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 학교를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봉건시대처럼 여러분의 자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귀족들이 다니는 좋은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고 좋은 보수가 보장되는 직장에도 취업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자녀들은 열심히 공부하려 하지 않겠지요. 그럼에도 여러분은 자녀에게 ‘어차피 대학 진학은 어렵지만 수학을 만점 받는 경험을 한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니, 그러니 공부해 보렴’이라고 격려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 위로와 의미부여가 과연 격려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

바로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인간이 봉착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든 않든 결과는 똑같습니다. 절제하든 않든 우리는 다 소멸됩니다. 즐겁게 살든 괴롭게 살든 다 죽고 사라집니다. 돈을 벌든 못 벌든 빈 손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들의 모든 노력이 아무런 차이도,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서 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돈도 벌고 좋은 직업도 갖고 결혼해서 다복하게 살고 즐겁게 파티하면서 잘 사는 사람 많습니다. 예술작품도 만들고 스포츠선수로 성공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살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이 하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든 안 살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 순간에는 그 행위들이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수고의 결과로 승진을 하고 비지니스에 성공하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보람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런 삶의 기쁨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일반은총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의 그런 행위들은 아무런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지 못 한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는 점은 변함 없습니다. 목적을 상실한 삶이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존재목적은 존재의 근원이자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 안에서 존재의 완성을 경험하고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지 않고 쌀통으로 쓰는 것과 같고 항공기 조종사 자격증으로 놀이터의 유아용 기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안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나 잘 못 쓰여지고 있고 무의미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유아용 기차를 운전하는데 항공기 조종사 자격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자격증 따려고 들인 시간과 수고와 돈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창조의 목적을 이루며 사는 것이 아니기에 결과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안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목적을 발견한 삶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멋있고 훌륭하고 위대해 보이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삶이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무의미와 허무의 수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은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셔서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도록 가꾸십니다. 가지 된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어서 농부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는 길은 포도나무에 굳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가 땅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여 가지에 공급하고 저절로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10절입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즉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요약하시면서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웃뿐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삶으로 주님 안에 거할 때 인간은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주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입니다.

 

사랑은 의무냐, 특권이냐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닐까요? 앞에서 인용한 강연에서 히친스에게 질문한 학생이 크레이그 박사에게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이 질문에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종속된 노예와 같은 존재냐는 의혹과 부담의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크레이그 박사는 그 학생의 의혹을 의식한 듯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인용하며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섬길 때 오히려 참된 기쁨과 만족을 느끼며 자아의 완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연인을 섬기는 것을 의무로 여기지 않고 특권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점을 예수님께서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11절입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종종 그것을 특권이 아닌 의무로 여기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리사가 미각을 상실하고 음악가가 청각을 상실하고 미술가가 시각을 상실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이 스스로 그 능력을 회복할 수 없기에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옵니다. 4절입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처음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것도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도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엄청난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사랑은 특권입니다. 다시 한 번 비유컨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는 연인을 위해 온갖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 않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 아닌지, 거한다면 얼마나 가깝게 거하는지 아니면 데면데면 그저 얼굴만 알고 지내는지 이 질문의 답이 가르쳐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가깝이 주님과 거하십니까?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