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1 그럴 수 없느니라 / 롬6:1~11

20160501 그럴 수 없느니라 / 롬6:1~11

롬 6:1-11/죽음과 생명 사이

160501 주일설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느냐

한국에서 23년 전에 큰 성공을 거둔 투캅스라는 코미디 액션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열다섯 살 때인가요? 아마… 아무튼…) 영화배우 안성기 씨가 부패한 경찰 역을 맡았는데, 그는 주중에는 온갖 부패한 짓을 가리지 않고 하다가도 주일만 되면 교회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고 예배가 끝나면 만면에 웃음을 띄고 ‘역시 주님의 은혜가 커’하는 독백을 하며 교회를 나옵니다. 지금은 한국사회의 트랜드가 되어버린 대중문화의 개신교때리기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장면은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가 항상 직면해온 도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무조건 은혜면 다 되냐는 도전인데 즉 기독교의 복음에 의하면 인간이 무슨 죄를 짓든지 은혜로 다 용서받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투캅스에 등장하는 형사처럼 내 마음대로 죄지으며 살다가 주일에 가서 회개만 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의 로마서 여행을 잠깐 정리합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인류의 죄를 고발합니다. 3-4장에서는 죄인인 인류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선포합니다. 5장에서는 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제 6-7장에서는 이 복음에 대한 도전에 답을 제시합니다. 2장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우리도 3-4주 정도에 나누어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문맥에서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5:20입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이 들어옴으로써 이전에는 죄인 줄 몰랐던 것을 죄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율법 때문에 죄가 넘쳐났지만 그만큼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은혜도 넘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적대자들이 비아냥대며 공격하기를 ‘그래? 그렇다면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는 길은 죄를 더욱 짓는 길이겠구만.’하는 것입니다. 그 도전을 1절에서 언급합니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어떤 부자가 자신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면제해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100불 빚진 사람의 빚을 없던 것으로 해준다면 워낙 부자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100만 불의 빚을 탕감해 준다면 아마 신문에 나고 인터뷰를 하고 감사패를 받게 되겠지요. 빚이 클수록 면제해 준 부자의 너그러움은 더욱 칭찬을 받습니다. 같은 원리로 큰 죄인일수록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더 드러내시기 위해 더 큰 죄를 짖자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투캅스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나 크다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겠네, 기왕이면 내 맘대로 죄 지으면 살다가 주일에 회개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도전도 가능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논리로 기독교의 복음을 비난하는 이들을 어렵잖게 만납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2-7절)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참된 그리스도인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자연적 상태는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가 그 본성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던 이가 죽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을 줄을 알지 못하느뇨

바로 세례라는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하는 사건입니다. 이 연합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뿐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도 경험합니다. 4-5절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살아나심도 성도가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이자 죄의 종이었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자녀이자 의의 종인 새사람으로 부활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육식동물인 늑대가 죽고 초식동물인 양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즐기던 고기를 이제는 줘도 못 먹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종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거나 은혜를 믿고 죄를 마음대로 짓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기 이전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영의 일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따라나옵니다. 첫째, 이 죽음과 부활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왜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답하자면, 이 일이 세례 때에 일어났고 우리의 영-spirit에서 일어났습니다. 영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 합니다. 영에서 일어난 일은 그 증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영에서 일어나는 일은 육으로 즉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 중 하나였던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놀라운-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영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치 바람을 그 소리를 들어 알 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하듯 그 증상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이 죽음과 영의 부활도 뒤따라오는 증상 즉 우울과 침체와 낙심 혹은 용기와 소망과 기쁨 등을 통해서 역으로 이해할 수만 있습니다. 마치 우리 몸 안에 암덩어리가 자라도 통증이 오고 살이 빠지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알지 못 하고 면역체계가 작동해서 암덩어리를 죽여가도 밥맛이 돌아오고 살이 찌고 근육에 힘이 붙는 등 호전되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알지 못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계속되는 전투

둘째, 죄의 종된 옛사람이 죽고 의의 종된 내가 살아났다면 왜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의를 행하기 어려운 우리의 모습은 왜입니까? 이 주제는 7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지만 여기서 미리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죽긴 죽었으나 완전히 죽지 않았고 살긴 살았으나 완전히 살지 않았습니다. 이 죽음과 살아남의 완성은 미래의 일입니다. 5절과 8절입니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두 구절 모두 장차 될 일을 확신하고 믿고 있습니다. 죽음과 살아남은 모두 우리 영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영어로 설명하자면 already, but not yet 입니다. 회장님 아들이 회사에 들어와 후계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받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상속하지 않았습니다. 새대통령이 선출되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승계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전히 넘겨받지는 않았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세례 이전에는 우리의 영 안에는 옛사람만 가득했는데 이제 새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죄의 군대만 가득했는데 이제 의의 군대가 침공을 시작했고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습니다. 골고다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죄의 군대가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옛사람과 아직 완전히 살지 않은 새사람이 공존하며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의의 편에 서라 

이렇게 다툼이 계속되는 과도기를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미 승리한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6-7절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 목적은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죄밖에는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와 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생명이 완성될 그 날에는 오직 의만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완성의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죄와 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지만 법적으로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서 의롭다고 선고를 받았습니다. 7절입니다.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이렇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십자가의 공로로 이미 의롭다고 선고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죄의 권세와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의의 권세의 끊임없는 다툼 속에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점령군 의의 군대에 협조하는 것입니다. 2차 대전 중에 프랑스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밀고 들어와 그 곳 주민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이오?’ ‘아,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독일군도 여전히 이 나라에 남아 있으니 반은 독일군 편이고 반은 연합군 편입니다.’ 그러면 연합군이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아, 이 사람은 독일군 편이군. 감옥에 넣어.’ 반이 독일군 편이라는 말은 언제 연합군의 적으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 때 연합군이 믿을 수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나는 연합군 편이오. 아직 우리나라 프랑스에 독일군이 남아있지만 나는 다시는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겠소. 오로지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서만 싸우겠소.’ 그래야 연합군이 믿을 수 있는 연합군 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이 점을 명확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하고 오로지 연합군 편에 서는 것처럼 아직 죄와 싸우고 있지만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의의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만이 완전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의 편에 서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