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장/썬다 싱과 마하트마 간디
160522 주일설교
썬다 싱과 간디
1889년 인도의 펀잡주에서 썬다 싱이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열렬한 힌두교도 집안의 자녀답게 그는 신실한 힌두교도로 자라났습니다. 학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학한 장로교 소학교에서도 기독교인들에게 적개심을 가졌고 성경을 읽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고 얻은 성경을 친구들 앞에서 불태우기도 하였습니다. 형과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조숙했던 썬다 싱은 힌두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합니다. 자신이 찢어버렸던 성경의 한 구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읽고 놀라기는 하였으나 기독교인이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 하였습니다. 허무와 괴로움을 견디다 못 한 그는 마침내 날이 밝는 대로 철길에 누워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최후의 기도를 신에게 드립니다. 밤새 기도하던 그의 방이 새벽 4시 30분쯤 강렬한 빛에 휘감기는데 그 빛 가운데 나타난 신의 음성은 뜻밖에도 그가 기다렸던 힌두교의 신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모욕하고 공격했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평화와 확신 가운데서 기독교인이 되어 일생토록 인도에 복음을 전한 기독교 전도자요, 사상가로 세계 3대 기독교 신비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또한 타고르와 간디와 더불어 인도가 낳은 위대한 세 명의 성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또 한 사람의 3대 성자로 꼽히는 마하트마 간디는 썬다 싱보다 꼭 20년 먼저인1869년에 태어납니다. 그 역시 힌두교도였지만 썬다 싱과 달리 영국의 유학생으로 생활하며 기독교 선교사들과 친분을 맺고 교회도 여러 차례 방문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가장 위대한 가르침으로 꼽기도 했지만 결국 기독교인이 되지 못 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의 다원주의 사상 때문이라거나 당시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교회 분위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적어도 썬다 싱보다는 훨씬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접촉을 가졌음에도 기독교인이 되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왜 썬다 싱은 기독교인이 되고 간디는 되지 않은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만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되는데 어떤 이들은 결국 교회를 떠나갑니다. 이 두 부류를 갈라놓은 갈림길은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반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한 가지 깨달음의 유무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의지와 행위의 분열
로마서 7장은 앞에서도 좀 다룬 적이 있는, 인간이 겪는 의지와 행위의 분열 문제를 다룹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 선을 행하는 대신 실제로는 악한 일을 합니다. 더 좋은 아빠가 되기를 원하는 한 남자가 실제로는 술과 도박과 게으름에 중독되어 살아갑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을 올리기를 원하는 학생이 게임을 하며 밤을 새다가 후회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런 의지와 행위의 분열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율법 아래 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런 분열이 기독교인의 삶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 학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인의 삶에서도 이런 분열이 일부 남아있을 수 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6장에서 바울이 기독교인이 죄에 대해 죽었음을 강조하고 8장에서 역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을 고려하면 사망의 몸에 갇혀 있다고 탄식하는 7장을 거듭난 기독교인의 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오늘날 많은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이 분열상태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 율법 아래 사는 삶을 가리킨다면 구체적으로 누구를 예로 든 것이냐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류 일반입니다. 앞서 묘사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율법 혹은 계명대로 살려고 애쓰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 하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바울과 같은 훈련받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엘리트 바리새인으로 어려서부터 철저한 율법교육을 받은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배운 대로 거의 다 지키며 살았습니다. 빌 3장에서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바울은 율법대로 다 지켰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선을 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열심 때문에 그는 교회를 핍박함으로 악을 행합니다. 이런 의도지 않은 결과를 율법, 계명, 수행, 선행을 부지런히 하려는 이들이 결국 마주치게 됩니다. 2주 전 율법이 인간을 속인다는 말씀을 드리며 강조했던 것처럼 누더기같은 인간의 의는 결코 보석같은 하나님의 의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의에 이르려는 시도는 그 의도와 달리 악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합니다. 천지사방이 눈밭이어서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으로는 사망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열의 원인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인간은 이런 분열을 겪습니까? 사람들이 지키려는 율법이나 계명 그 자체에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까? 율법이 법 아래 사는 이들을 속인다고 했으니 율법이 문제인 것이로군요. 바울은 아니라고 합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본연의 역할을 잘 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정에서 쓰는 물품을 인터넷으로 가끔 쇼핑을 합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inch가 익숙하지도 않고해서 눈대중으로 창문사이즈와 사진의 커튼 길이를 재서 주문을 합니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는데…’ 어떻게 될까요? 백이면 백 감으로 주문한 제품은 사이즈가 맞지 않아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줄자로 정확히 재어보고 주문을 합니다. 이제야 맞는 사이즈가 옵니다. 줄자가 없을 때는 저의 감을 의지해야 했는데 거의다 틀립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데 거의다 틀립니다. 판단의 기준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 이미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의가 그 참된 의의 기준에 얼마나 한참 못 미치는지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무엇이 문제라는 말입니까? 그 율법을 악용하는 죄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롬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롬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 7:17) 이제는 그것(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가 계명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고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죄는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창 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란 롬 5장에서 설명된 것으로 아담의 반항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들어와 모든 인간이 품고 태어나 살아가게 된 그 원죄를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이의 생각과 행위는 원하든 원하지않든 실제 하나님께는 적대적이 됩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우리 인간이 이 계명에 대한 적대감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아무런 적대감이 없는데요?’ 이렇게 생각할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인생의 배가 떠있는 강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19세기 독일철학자 니체는 그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기독교로 대표되는 과거의 모든 도덕과 가치를 파괴하고 인간 스스로 새로운 도덕과 가치를 창조해내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가치기준을 스스로 정하기를 원합니다. 도덕도 가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상대주의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 누가 무슨 주장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든 그를 어떻게 판단할 것입니까?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에서 자아실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아실현이란 무엇입니까? 근사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단순하게 요약하면 내가 살고 싶은데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트랜드에 가장 민감한 광고는 그런 사람들의 욕망을 예리하게 간파하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뭐야? 너 자신이 되어라, 네가 살고 싶은데로 살아라.’ 자아를 하나님 대신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적대감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 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 하도록 만듭니다. 자아숭배의 이 욕망이 죄입니다. 이 죄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우리는 도저히 그것을 제어하지 못 합니다. 오히려 그 죄로부터 제어를 당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기 원하면서도 악을 생산하는 악의 공장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
이런 인간 현실에 대한 깨달음이야 말로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입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 하면 자아를 숭배하는 삶을 삽니다. 자아를 의지하는 종교생활을 합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삽니다. 반면 이 깨달음에 이르면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24절입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이고 우리는 사망의 몸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건져줄 이를 필요로 합니다. 이 부르짖음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꾸짖으시면서 자기 죄를 슬퍼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구원에 더 가깝다고 선언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실패와 절망적 상황을 깨달은 이들은 주님께 호소합니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눅 23:42) (우편 강도가)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오늘 참 믿음의 길에 접어드는 이와 진리의 변두리를 맴돌다 떠나가는 이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깨달음입니다. 자신의 절망적 상태를 깨닫고 주님께 손을 내미느냐 그렇지 못 하느냐인 것입니다. 오늘 이 갈림길 앞에 서계신 분들이 여러분 중에 계시지 않은지요? 여러분의 걸음이 생명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