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9:19-29/자유로우신 하나님
160904 주일설교
왜 심판하느냐
맨하탄의 회의적인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인다고 하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로 꼽히는 리더머처지가 있습니다. 21세기의 C.S.루이스로 불리는 이 교회의 팀 켈러 목사가 쓴 ‘살아있는 신’이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이 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목사를 만나 질문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팀 켈러 목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개념이 기분이 나빠요.’라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받고 팀 목사는 되묻기를 ‘그렇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란 개념은 왜 기분나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어리둥절해서 그 개념을 왜 기분 나빠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팀 목사는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진노, 심판, 지옥이라는 개념에 거부감을 가지고 사랑, 용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좋아하는 것이 현대서구사회의 문화적 태도라고 하자 그녀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와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참고하면 전통적인 인습의 굴레가 강한 사회 즉 중세나 근대사회 혹은 현대에도 인도, 이슬람사회를 비롯한 많은 제 3세계는 그 반대입니다. 명예와 정의를 존중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반드시 복수하는 것을 명예롭고 옳은 일로 여기고 용서, 이해, 사랑 따위는 나약하고 비겁한 이들의 자기변명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명예가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이라는 행위가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기사를 보고 중세나 근대를 다룬 소설을 보면 원한이나 모욕을 풀기 위해 칼이나 총으로 목숨을 걸고 내걸고 싸우는 결투이야기를 자주 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나 지옥이라는 개념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대신 무한한 용서, 위로, 사랑의 하나님이란 개념을 의아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설명과 함께 팀 켈러 목사는 그녀에게 ‘현대서구문화가 제 3세계나 전통문화에 비해 우월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습니다. 서구지성인들의 전형적인 태도 중 하나가 문화우월주의를 경멸하고 문화상대주의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팀 목사가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일수밖에 없는 서구문화가 어째서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지요?’ 이런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침묵으로 답합니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사실은 현대인이 진리를 판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이라는 것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문화적 입장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 기준으로 절대적 기준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 일화가 좀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솝우화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장사를 하는 어떤 형제가 배에 값비싼 상품들을 싣고 강을 올라가다다 동생이 실수로 금으로 된 잔을 강물에 빠뜨렸습니다. ‘형, 걱정마. 내가 어디 빠뜨렸는지 표시해 뒀어. 짐을 옮겨놓고 돌아와서 건지자.’ ‘그래 잘했다. 어떻게 표시해두었니?’ ‘응, 잔을 빠뜨린 뱃머리에 연필로 진하게 표시를 해 두었어.’ ‘역시 내 동생이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유머감각 가득한 이야기가 지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빠뜨린 즉시 강가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 표시를 해두었다면 그나마 찾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계속 움직이는 뱃머리에 표시해 둔 것으로 잔을 빠뜨린 장소를 어떻게 표시할 수 있습니까?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야지 움직이는 것으로 기준으로 삼아서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냐는 것이지요.
불공평한 것 아니냐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은 현대인뿐만 아닌 듯 합니다. 팀 켈러 목사가 맨하탄의 젊은이들에게 들은 말을 사도 바울도 듣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심판)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문제를 좀 더 다룹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심판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자격 없는 죄인이 무한한 긍휼과 택하심으로 인해 거저 구원을 누리는 일 뿐 아니라 악한 죄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되는 일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도전을 차례로 받아들여 다룹니다.
먼저 지난 주에는 죄인을 거저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 아니냐는 도전이었습니다. 공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앞선 일화를 참고한다면 전통사회에서 도전할 만한 주제입니다. 14절에 그 도전이 나왔었는데요, 바울은 그에 대해 긍휼은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대가가 아니라 거저주시는 선물로써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그 긍휼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든 감히 받는 이들이 하나님을 향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악인의 완고함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신다면 결국 악인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래놓고 심판하신다면 악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19절의 도전의 의미입니다. 역시 일화를 참고한다면 현대서구사회에서 제기할 법한 주제인데요, 이 도전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음주운전사고를 낸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근거로, 피해자가 많이 다쳤지만 그가 재활을 하면서 전에는 무심했던 건강에 관심을 가져서 결과적으로는 사고 전보다 더 건강해졌으니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에게 유익을 끼친 것이라는 점을 드는 꼴입니다. 언뜻 들어도 이 논리가 얼마나 괘변인지 알 수 있는데요, 하나님을 향해 심판의 부당함을 항변하는 것이 역시 얼마나 억지요, 괘변인지를 보여줍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에 답합니까? 이사야서 64장의 토기장이의 비유를 가져와 답합니다. 21-22절입니다.
(롬 9:21)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롬 9:22)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흙으로 무엇을 만들지는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흙이 토기장이에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인간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우신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욕심이라는 폭풍우에 이끌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배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풍랑에도 요동치 않는 견고한 등대이십니다. 배가 등대를 보고 길을 찾아야지, 등대가 배를 보고 자리를 옮겨주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에게 하는 도전은 등대를 보고 길찾기가 싫으니 등대가 여기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옮겨와서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얼토당토않는 요구입니다.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악의 길을 가는 이들이 맞이하는 심판은 그들이 스스로 택한 길이요, 그들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받아서는 안 되는 심판을 잔인한 신이 화가 나서 쏟아붓는 것으로 왜곡합니다만 그것은 앞서 음주운전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괘변일 뿐입니다.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부류에는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신을 향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부류, 아니면 결국 신으로부터 ‘그래, 네 뜻대로 되리라’라는 말을 듣는 부류. 지옥에 떨어진 인간은 예외없이 스스로 지옥을 택한 것…’
관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을 지옥으로 밀어넣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려는 인간을 향해 팔을 벌리고 구원의 길로 끊임없이 부르고 계시는 분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로심으로 관용하시고’
진노의 그릇, 심판의 길을 가는 영혼을 향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래 참고 관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미워하시고 심판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면 왜 참으며 왜 관용하십니까? 죄를 짓자마자 ‘오냐, 기다렸다. 받아라, 심판을!’하고 멸망시켜 버리고 마시지.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긍휼의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인간이 몸을 던지는 벼랑입니다.
그럼 성경의 등장하는 수많은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간절히 부르짖으시는 경고입니다. 방탕한 자녀를 향해 부모가 애닮게 소리치는 외침입니다. ‘야, 이놈아, 그러다 너 망한다. 후회한다. 죽고 싶냐?’ 그 말은 내가 너를 망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가면 망하니 돌아오라는 외침인 것입니다. 십계명의 경고, 선지자들의 혹독한 심판의 예고, 예수님의 바리새인들을 향한 꾸지람, 사도들의 심판의 선고 역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뉘우치고 돌아오라는 호소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 앞에서도,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도 인간은 아무 할 말이 없고 그저 무한한 긍휼에 감격할 뿐이요, 간절한 사랑의 경고 앞에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구원은 자격도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알게 하고자 하나님이 작정하심으로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진실을 깨닫게 된 인간의 겸손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 자비와 섭리 앞에서 할 말을 잃는 것입니다. 아무 할 말이 없어 그저 영원히 찬양과 경배만 올려드리고자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광활무궁한 저 우주의 한 구석 먼지만도 못 한 그랜드캐년 앞에서도 억 하고 할 말을 잃는다면 창조주 그 분의 영광을 감히 마주할 때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으며 어찌 똑바로 서서 그 분을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영원히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겸손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