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1 신앙의 길 / 요6:22~27,66~71

20160911 신앙의 길 / 요6:22~27,66~71

요 6:22-27, 66-71/신앙의 길

160911 주일예배

 몰려오는 이들

얼마 전에 젊은 개척교회 목사님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몇십 명 정도 되는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루는 60대 정도 되는 부부가 예배를 참석했기에 마치고 환영하는 자리를 가졌답니다. 그 새교우 말인즉 본인은 모교회의 장로인데 와서 보니 젊은 목사가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다며 본인이 교인 20명 정도를 데리고 올 수 있으니 대신 1년 후에는 본인을 이 교회 시무장로로 임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일꾼이 귀한 마당에 20명이나 되는 새교인을 데리고 온다니 처음엔 솔깃했답니다. 그러나 한 주간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봐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다음 주에 말씀드리기를 장로는 목사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투표를 통해 세우는 것이기에 자신이 어떤 약속도 드릴 수 없으며,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나 교인들을 무리지어 그 교회에서 데리고 오겠다는 것도 목사가 환영할 일도 아닌 듯 하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다음 주부터 안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교인 한 사람이 아쉬운 마당에 스무 명이나 오겠다는 것을 거절했으니 잘 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그 목사님이 말하자 듣고 있던 목사님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잘 했다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자, 이 목사님은 무슨 배짱으로 그런 제안을 거절한 것일까요? 또 다른 목사님들은 왜 그 목사님을 잘 했다고 격려해주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인 동시에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썩는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오병이어 기적 직후의 사건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본 무리들이 흥분하여서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주님은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무리들은 다음날 예수님이 거하시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까지 좇아가서 기어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까지 좇아온 이들이 몇인지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전날 모인 사람이 오천 명이니 이 날 좇아온 사람도 적지않은 무리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좇아오거나 교회에 등록하겠다고 찾아온다면 그 교회 목사는 얼마나 좋겠습니다. 두 손 들고 맨발로라도 달려나가 환영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냉담한 말투로 그들의 의도를 속된 말로 ‘까발리’십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이라는 헬라어 단어 ‘세메이온’은 어떤 인물이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표, 징후, 사인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볼티모어 25마일이란 표지판을 볼 때 우리는 볼티모어라는 도시와 그 도시까지 25마일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표적이란 일종의 교통표지판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 분이 무엇을 하실지를 드러내는 표지판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분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나는 너희에게 표적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주려는지 깨닫게 하기를 원했는데 너희는 그것을 깨닫지 못 하고 단지 배부르게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앞으로도 더욱더 배부르게 먹여주리라는 기대 때문에 나를 찾아왔구나.’가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기대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대와 달리 그들이 원한 것은 무엇인지를 다음 구절이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요 6:27) 썩을 (세상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하늘의)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이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것, 만족시키는 것들을 말합니다. 돈과 명성과 지위와 인기와 자존감과 대접받음과 정욕을 구하는 것이 세상의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세상 음식이 금방 썩어버리듯 이런 것들은 금방 사라지고야 마는 것들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의와 진리와 사랑과 같은 것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히 있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하늘의 양식입니다. 이것들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말 주고자 하는 것들은 바로 하늘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는 이들이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이어야 마땅합니다. 앞서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만난 이를 환여하지 못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신자가 아닌이상 마땅히 교회에 나오는 마음자세는 신앙과 섬김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세를 드러내고 지위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이들을 받아들이면 잠시는 교인이 늘어난 듯 하여 좋아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그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문제를 일으키고 큰 재앙을 교회에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한국교회 문제의 본질

바로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지난 세기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성장세를 기록했습니다. 오천 명의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오듯이 물밀 듯이 교회로 밀려왔는데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하였습니다. 이런 성장의 원인으로 학자들은 한국인 특유의 종교성, 부흥회, 성경공부에의 열정, 성령운동,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등 여러 요소를 꼽습니다.

그런 요소들 중에 잘살아보세, 할수있다로 대표되는 가난극복, 성공에의 욕망을 담은 기복적 요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복을 받아서 병고치고 부자되고 자녀도 잘 되고 잘 살게 될 거라는 기대를 안고 과거 불교와 무속신앙에 의지했듯 부유한 꿈의 나라,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구문물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에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특징 중 하나로 탈사회성, 몰역사성, 사회참여의 부재가 꼽히는 것입니다. 개인의 기복과 사회적 책임은 거의 대부분 서로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일운동을 하며 부자로 살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하며 출세를 꾀한다면 정신 나간 것 아닙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은 마땅히 이런 사람들의 마음 저변에 깔린 욕망을 분별하고 예수님이 하셨듯 그들에게 세상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쳤어야 했습니다만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떠나갈까봐 걱정하고 그들이 원하는 복을 약속함으로써 기독교를 기복종교화시켜 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규모의 교회 타이트을 잃지 않고 있는 순복음교회의 3박자 복음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즉 영혼구원, 만사형통, 육신건강을 예수 믿으면 다 준다는 것입니다. 육신건강과 만사형통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 섬기고 낮아지고 희생하는 삶을 의미하는 구원조차도 지옥행을 면제받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락을 누린다는 개인적 차원의 기복적 메시지로 변질시켜 전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들이 이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온갖 추문과 추락입니다. 전도도 안 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 하고 지름길로 빨리 온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훨씬 뒤로 밀려가고야 만 것입니다.

 

떠나가는 이들과 남는 제자들

진리는 결코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도 있지만 문맥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세상의 양식을 구하는 욕심 가득한 마음으로는 하늘의 양식을 구하지 못 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에게 예상을 하셨겠지만 그럼에도 큰 실망을 안겨줍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묻어나는 깊은 실망감을 느껴보십시오. 방금까지도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좇아오던 제자들이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으리라는 말씀에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고 가르치고 훈련시켜온 핵심제자들까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을 위로하고 큰 기쁨을 드리는 답을 합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의 고백은 참된 성도들의 만족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바로 영생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와서 이 영생의 말씀을 발견하고 이 양식을 먹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좇습니다. 더 이상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영생의 말씀을 먹고 사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을 발견하지 못 한 이들은 교회에서도 세상에서 처럼 썩는 양식을 구하며 삽니다.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하는 장소가 교회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떠나갑니다. 떠나갈 뿐 아니라 교회를 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감수하시면서까지 과감히 그들의 욕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썩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입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처럼 주님께 고백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