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4-21/안 믿겨지는 사람들
161002 주일설교
믿지 못 하는 사람들
목사로서 교회 안팎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믿고는 싶은데 안 믿겨 집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마 모르긴해도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서 저도 그래요, 하고 속으로 공감하실 분들도 적지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애정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낍니다. 믿으려 애쓰는 모습에 애정을, 의도대로 안 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럴 때면 목사가 대단한 영력이라도 있어서 단번에 믿을 수 있게 만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런 처지에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드리는 것과 왜 그런 것인지 원인을 알아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왜 믿으려고 하는데도 믿겨지지 않는 경험을 우리는 하는 것일까요? 그런 분들에게 오늘의 말씀이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본 10장 전반부에 이어집니다. 거기서 바울은 구원의 길에 대해 선포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이르는 길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린 길입니다. 특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유대인들의 불만이 이어집니다.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 중에서 믿고 주님을 부르는 이들이 교회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믿지도 부르지도 않습니다. 자, 그럼 그것은 누구 잘못입니까? 유대인들의 잘못인가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잘못인가요? 유대인들은 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 하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자, 그래, 우리는 바울 당신이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는 예수를 믿지도 부르지도 않는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냐? 우리는 이방인들조차 받는 구원을 정작 우리 유대인들은 받지 못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만약 바울 당신 말이 맞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를 주로 인정하지 못 하는 것이 우리 잘못이란 말이냐?’
이 도전은 현대인들이 ‘믿으려고 하지만 안 믿긴다, 안 믿겨서 못 믿는다는데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는 도전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믿기 위해 필요한 것들
그에 대한 바울의 답은 무엇입니까? 14절부터 이렇게 답합니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이렇게 말을 건내는 것입니다. ‘자, 그럼 유대인 당신들이 주님을 부르지 않는 것이 누구 책임인지 보자… 당신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믿지 못 하기 때문이지? 그럼 믿지 못 한 것은 못 들었기 때문이냐? 못 들었다면 전파하는 이가 없었느냐? 전파하는 이가 없었다면 보내신 분이 없어서 그런 것이냐? 정말 그러냐?
그럼 이사야 52:7에 기록된 이 말씀은 뭐냐? 여기 보면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전파자가 있다고 하지 않느냐? 전파자가 있다는 말은 그들을 보내신 이가 있다는 말이고, 또 동시에 그 전파한 소식을 들은 이가 있다는 말이 아니냐? 그럼 하나님은 보내신 이의 역할을 했고 선지자들은 전파자의 역할을 했고 그 소식을 너희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내신 하나님도 계시고 보냄받아 그 소식을 전한 선지자들도 있는데 그럼 뭐가 문제였냐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시 19:4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그 소식이 온 땅에 퍼졌는데 유대인들이 그걸 못 들었다고 핑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몰랐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19절입니다.
(롬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일에 알지 못 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롬 10: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신 32:21과 사 65:1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도 이미 수도없이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몰랐다고 발뺌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믿지 않은 사람들
여기까지의 바울의 선언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몇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그 전에 믿어야 하고 믿기 위해 들어야 하고 듣기 위해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전하는 자는 보내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이 사실은 다 갖춰졌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들은 보냄을 받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들은 것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습니까? 하나님도, 선지자도 필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들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았기에 주님을 부르지도 않았고 부르지 않았기에 구원도 누리지 못 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으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우리가 언제 안 믿었다는 거야? 우리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잘 믿는 사람이 있으며 나와보라고 그래.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울은 더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16-17절입니다.
(롬 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가야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믿지 않음의 의미는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암송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 말씀의 핵심 중의 핵심인 복음의 메시지는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 앞에 무릎 꿇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 전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모든 율법과 구약이 선포하는 것이 사실상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난 주에도 살펴본 것처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 전체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듣고 믿은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사랑을 드러내는 복음에는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왜곡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자신들의 복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있었음을 고발하는 책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전하라는 메시지에 불순종합니다. 자살을 시도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합니다. 물론 요나의 불순종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지만 요나를 통해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불순종이 낱낱이 고발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들으라
오늘 우리가 믿고 싶은데 안 믿겨진다고 할 때 깨달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하는 것이 혹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참된 하나님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메시지인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고 원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조합한 기독교의 하나님이요, 메시지는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듣고 믿어야 하는 것은 완전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의와 사랑이 드러나신 복음인데, 이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분의 종이 되어 그 분 앞에 엎드리기를 요구하는데 이 복음 앞에 쓰러지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우리가 상상하는 하나님, 우리가 듣고 싶은 말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모든 포장지를 벗어버리고 날 것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의 긍휼과 자비를 의지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고는 싶은데 자기를 부인하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예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한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영생을 간절히 얻기를 원했으나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할 의지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신들의 의를 포기하라는 주님의 복음에 순종하지는 않았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믿고 싶은데 안 믿겨진다고 할 때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안 믿겨진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부자 청년처럼 구원은 받고 싶은데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에는 순종이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자신의 의를 여전히 세우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장되고 왜곡되고 꾸며진 말씀 파편들이 아니라 참되고 살아있고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죄와 악을 드러내고 진실과 생명 앞으로 우리를 불러내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꿇어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도 않고 십자가를 지지도 않고 주님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믿으려는 안 믿겨진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하는 핑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런 우리들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롬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종일토록,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까지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