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11-24/자랑하지 말라
161016 주일설교
자기중심적 신앙
한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신문의 사회면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돈암동 근처로 새로 놓이는 지하철 노선 개통계획이 발표되었는데 그 노선이 어느 교회 밑으로 지나가게 된 모양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교인들 십여 명이 부탄가스를 들고 지하철 공사장에 난입하여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하철 노선 때문에 아마도 교회를 옮겨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아무튼 그들은 ‘목숨걸고 성전사수 지하철공사 결사반대’라는 피켓을 들고 자신들을 끌어내려하면 부탄가스를 터뜨리겠다고 하며 노선을 교회 아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유치하며 또 자기중심적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를 옮기지 않기 위해 다른 집이나 건물을 옮기라는 주장이고 더구나 그 주장을 하는 방법이 부탄가스통을 들고 위협하는 것이라니요! 낯이 뜨거워서 기사를 끝까지 읽을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세기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말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한국교회의 성장사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없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를 저는 한국교회의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지면 나 중심의 세계관이 우리 중심의 세계관으로 더 나아가, 이웃 중심의 세계관으로 성장해 가야 하는데 신앙연수가 깊어지는데도 한국교회의 세계관은 오히려 나 중심의 세계관이 더 견고해지기만 했습니다. 잘 믿는 것은 내가 복을 더 받는 것으로 이해되고 한국교회는 이웃의 불편과 원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교세 늘리기, 건물 키우기, 타종교 정죄하기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 뿌리에는 자기중심적 신앙관이 놓여 있습니다. 이런 유아적 신앙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랑하지 말라
로마서 9장에서 11장의 중심소재는 유대인의 구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누리고 전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유대인들의 실패를 보면서 이방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무엇입니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이방인)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유대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일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을 감람나무 가지의 일부가 꺾여나간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방인들은 원래 야생 감람나무였는데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이란 우리가 선택받은 것이 우리 자신의 자격이나 공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된 것이라고 바울은 누누이 로마서에서 강조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뿌리란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믿음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지 우리가 믿음을 지켜서 복음에 거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우리를 택했다는 더 정확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선택과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실패한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자랑하게 됩니다. 그 자랑이 어떤 것인지 18-19절을 보십시오.
(롬 11:18)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나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들이 버림받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까! 자기중심적이라는 표현은 유아적인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교육학자들은 아기들은 세상과 자신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이 아프면 온 세상이 아프고 자신이 배부르면 온 세상이 즐겁다고 여기고 부모는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러다가 서너 살 정도 되면 세상과 자신이 사실은 분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좀 더 자라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철이 들면서는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주변 세계의 일부로서 공존하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 하고 사는지요! 그런 생각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자기중심적 생각은 대개 우리의 행함이 근거가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든 성경을 많이 읽든 혹은 봉사와 섬김을 많이 하든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 자부심에서 자랑이 나옵니다. 목소리가 커집니다. 주장이 많아집니다.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여깁니다. 다른 이들의 불편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자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한 자리에 내가 부름을 받았다면 이 때 주목받아야 할 것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름받은 나의 특별함을 주목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기까지 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하는 착각이자 자주 듣는 간증인지요! 내가 특별해서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분이셔서 나를 불러주신 것이지요! 초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구원의 모든 스팟라잇은 총감독이신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잠시 무대에 올랐다고 우리가 그 스팟라잇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위험한지를 지적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롬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그들이 꺾이고 너는 접붙임을 받은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이 꺾인 이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 너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네가 접붙임을 받은 것도 네가 믿었기 때문이지 그들보다 더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반대였다면 네가 꺾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높은 마음, 교만한 마음,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품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21절입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만약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교만과 자랑과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실패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심으로 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믿음을 떠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아래 머물면 즉 믿음으로 그 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 그 인자하심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사실로 인해서 교만하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더더욱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롬 11:23) 그들(유대인)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미 실패한 유대인조차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다시 믿음으로 돌아오면 그들에게 인자하심이 허락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선택받지 못 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셨다면 선택받았던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더 은혜를 누리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하나님의 준엄함을 압도합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인간의 불순종을 무력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결국 죄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 분의 인자하심 아래 놓여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신실함에 의지한다면 우리는 실패하고도 그것이 실패인지 모르고 금방 교만해지고 자랑하고 결국 믿음을 떠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엄하심 아래 놓이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의 인자가 우리를 붙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을 의지하는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를 멸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신앙을 가집니다. 형제, 자매를 비로소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요? 우리 자신의 자격과 공로를 의지하는 미련함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