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5 용서에 대한 오해 / 마18:15~18, 21~35

20170115 용서에 대한 오해 / 마18:15~18, 21~35

마 18:15-18, 21-35/용서에 대한 오해

170115 주일설교

영화 밀양

2007년 한국사회와 기독교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가 한 편 개봉했습니다. 밀양입니다. 줄거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어린 아들 준이만을 데리고 외롭게 사는 여자 신애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를 옵니다. 납치범 도섭은 그녀가 부자인 줄 알고 준이를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다 그만 아이를 죽게 만들고 감옥에 갇힙니다. 정신나간 여자처럼 아들을 찾다가 의지할 데가 없어진 신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네의 작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교우들은 신애에게 이제 그만 납치범을 용서하라고 권하고 신애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도소로 향합니다. 면회 온 신애 앞에 도섭은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안한 얼굴로 나와서 자신은 교도소에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온 신애가 자신이 용서를 안 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았냐며 오열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한국교회를 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용서, 한국교인들이 이해하는 용서가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이 납치범 도섭이 이해한 용서에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마 5:23-24을 보십시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의 용서를 원하거든 네 형제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납치범 준섭은 마땅히 온 힘을 다해 신애에게 용서를 구하고 죄값을 갚으려는 노력을 기울었어야 했는데 혼자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럴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이웃과의 화해 없이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식의 용서에 대한 이해는 거룩한 삶과 구원이 별개의 것이라고 가르쳤던 초대교회의 이단인 영지주의식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거짓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피해자에게는 사과도 않은 채 자신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유명목사가 나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부정을 저지르고도 회개도 없이 떳떳이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기업인 장로, 정치인 집사, 권사들이 가득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 당신들의 그 잘난 용서라는 것이 이와같은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의 시선을 영화 밀양은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참된 조건

한국교회가 가진 용서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은 잘 드러내 줍니다. 21-22절은 교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유명한 구절입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용서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에는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덧붙이신 비유에는 그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이의 자세가 나옵니다. 26절과 29절을 보십시오.

(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죄를 범한 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간절히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참되게 회개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죄인에게 회개를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 1:15) (예수께서)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회개는 용서의 전제조건입니다. 회개 없는 용서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용서라는 이단적 가르침이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주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죄값을 치르지 않는데도 용서해 주시지 않나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그 죄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에게는 그 예수님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무조건 주시는 용서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가르침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

최근 어느 교우가 제게 ‘교회에 죄를 범한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랑으로 용서해 주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는 참된 용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 하는 용서는 마치 배불러 물 한 모금도 싫다는 이에게 빵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그 빵은 버려질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 하는 용서란 마치 강도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강도가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도와줄 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 하는 용서란 사과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사과 뿐 아니라 박스 안에 있는 모든 사과를 썩게 만들어 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 용서가 불가능한 이유를 다시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회개하지 않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그 죄인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그가 훈계와 징계를 통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그 자신이 멸망하게 됩니다. 둘째, 회개하지 않는 이가 용인되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이 죄를 지을 용기를 얻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도 멸망하게 만듭니다. 셋째, 회개하지 않는 이가 용인되는 것을 보고 의를 행하는 이들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불공정과 부패가 정직하게 일하는 이의 근로의욕을 빼앗는 것처럼 죄를 짓고도 용인되는 것을 보면 의인들이 희생을 감당하며 의를 행할 의욕을 잃게 됩니다. 요약하면 회개하지 않는 이를 용납하는 것은 사랑도 아니며 공의를 무너뜨리는 불의를 뿐이고 결국 공동체를 멸망하게 만드는 죄악에 대한 동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하지 않는 이의 문제를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인 15-18절을 보십시오.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죄인을 존중해서 조용히 개인적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증인을 데리고 가서라도 회개를 권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권위로 공개적으로 회개토록 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출교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 치리에 하늘의 권위를 더하십니다.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게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땅에서 죄인들에게 행하는 교회의 치리는 곧 하늘의 권위를 가진 것이요, 하늘에서도 그대로 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단호하게 죄에 대해 대처하라고 가르치십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전체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지키는 길

오늘 본문의 앞 문맥인 6-9절을 보십시오.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리라.

누구든지 공동체 안의 다른 지체들을 죄 짓도록 만드는 것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이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고 손과 발과 눈은 지체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 죄를 짓는 지체가 있고 그가 다른 이들까지 죄를 짓게 만든다면 그를 교회에서 내쫓아서 교회 전체를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 전체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복음이 교회에 던지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희생한 사랑과 용서는 무책임과 방조에 다름 아닙니다. 이 사실을 가르치지 않고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소개되는 심판의 하나님을 낯설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모두 선포하고 있고 우리는 달콤한 사랑의 하나님만 골라내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대가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 부끄럽고 처참한 현실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은 없고 거룩을 위한 희생도 없으며 무조건적인 관용과 방종을 사랑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합리화합니다. 교회 밖에서조차 부끄러운 일을 교회 안에서 저지르면서도 조금의 수치도 없습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사회의 짐과 걱정거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제라도 진리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용서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입니다.

참된 용서는 참된 회개를 요구합니다. 회개 없는 삶은 자신과 공동체를 모두 멸망시키는 악입니다. 교회는 회개와 순종 위에 새롭게 세워져야 합니다. 참된 회개로 참된 용서를 경험하시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회복하시는 성도 여러분과 뉴저지장로교회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