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5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 행11:19~26 / 김소명 목사

20170305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 행11:19~26 / 김소명 목사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사도행전 11장 19절-26절

오늘 이 시간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순절의 의미]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에 앞선40일의 기간을 말합니다. 한자로 넉 사자에 열 순자를 쓰는데, 말 그대로 40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은 그리스도인들이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사역, 특별히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귀한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많고 많은 날 중에서 40일일까요? 40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기 기간을 사순절이 부르며 말씀,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고난, 그리고 부활을 향한 거룩한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셨거나, 성경을 자주 묵상해 보신 보셨던 분들은, 이 40이라는 숫자가 별로 낯설지 않으실 것입니다. 40이라는 숫자는 구약에서부터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7장 12절을 보십시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이는 노아 홍수 때의 기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실 때에, 사십 주야에 걸쳐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물론 원래 의미대로 40일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심판하셨다, 이 땅에 죄악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어디에 나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몇 년 동안 광야 학교에서 훈련을 받습니까? 여기서도 40이라는 숫자가 등장을 하는데요, 자그마치 40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세상에 종 노릇하고, 죄의 종 노릇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 몇 년을 훈련시키신 것입니까? 40년 동안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완전히 변화되었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40이라는 숫자는 또 어디에 등장합니까? 마태복음 4장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감당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이렇듯 이전에 있던 모든 죄악의 일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완전히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렇게 거룩한 주일에 주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직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 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복되고, 존귀한 자로 창조하셨고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축복입니다. 잃어버린 거룩을 회복하고, 축복을 회복을 회복하고, 다시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존귀한 자로 설 수 있는, 그 은혜를 회복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함으로 축복의 백성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그렇다면 이 사순절에 기간 동안 우리가 주님 안에서 변화하고 회복되야 하는데, 무엇을 변화시키고 또 무엇이 회복되고, 무엇이 새로워 져야 할까요? 저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교회 공동체가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십자가 앞에서 회복되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문제 많은 초대 교회들]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곳이 주님의 몸 된 곳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필요 없는 완벽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안됩니다.”라고 고백하는 죄인들이 은혜를 사모하여 모인 곳이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사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끄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복음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책들이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바울이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교회들을 향하여 편지를 썼을까요? 물론 당시의 교회들이 잘하는 점을 격려하고 칭찬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이 교회가 하도 시끄럽고, 그 소식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바울에게 까지 들리니까, 너무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어서 쓴 편지가 바로 바울이 남긴 서신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후서는 왜 쓴 것입니까?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너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어서 쓴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왜 쓴 것입니까?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갈라디아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워 놨더니, 그 곳에 이단이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것이다.”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바울이 쓴 교회를 향한 대부분의 편지가 이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초대 교회들이 주님 안에서 놀랍게 성장하고 부흥하며, 당시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뉴저지 장로 교회가 이런 주님 안에서 놀랍게 쓰임 받고, 복음 안에서 하나되고, 세상은 줄 수도 알 수 도 없는 놀라운 평안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안디옥 교회]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는 특별히 안디옥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운데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왜 중요합니까? 안디옥 교회는 초대 교회 역사에서 저수지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저수지가 물을 모든 곳에 공급해 주는 것과 같이,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복음을 여러 곳에 전파하는 모태 교회로서의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안디옥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디서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까? 바로 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는 초대 교회 역사에서 젖줄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 없고 성령의 역사에서 가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안디옥 교회가 없었다고 상상을 해 본다면, 갈라디아 교회들을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과 고린도 교회를 포함한 유럽 땅에 교회들이 온전히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로마 제국 안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며, 어쩌면 복음의 확장이 많이 지연되어, 지금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더디 전해졌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우리에게도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교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너무 나도 귀한 일을 감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과연 어떤 과정 세워지고 성장했을까요? 안디옥 교회는 아주 평안한 가운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무런 문제와 염려와 걱정없이 성장하고 부흥한 교회였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과 극심한 박해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도, 그것을 묵묵히 이겨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전하고 선포한 참으로 주님께 쓰임 받은 복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안디옥 교회는 몇가지 특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중심의 교회]

첫째, 안디옥 교회는 Jesus Centered Church예수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다음 20절,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두 구절이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고난 가운데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 교회의 7명의 집사 중에 한 사람으로 세워진 귀한 믿음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 일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19절에 등장하는 베니게는 일반 역사에서는 페니키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역이었는데, 가나안 땅 북쪽에 있는 이방 지역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스라엘을 땅을 떠나 이방 땅까지 가야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구브로는 일반 역사에서는 키브로스라는 곳으로서 좀 더 멀리 떨어진 서쪽에 위치한 섬을 말합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그보다 훨씬 더 북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도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를 피해서 아주 멀리까지 뿔뿔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지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자의 신세로 멀리 이방 땅까지 쫓겨나게 된 그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무슨 소망이 있으며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고난을 당하였으니 낙심하여 다시는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교회 다니다가 상처받아 예수를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쩌면 극심한 박해로 인해 예수의 “예”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서로 치고 박고 싸웠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 말해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원망의 대상을 찾습니다. 쉽게 말해 “너 때문에 우리가 망한거야!”라고 소리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에 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 사람. 괜히 옆에 있다가 욕 얻어 먹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박해로 인해 분쟁과 다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또 그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다는 것은 꿈에서 라도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망해도 쫄딱 망한 줄 알았던 그곳에서, 놀라운 하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까? 물론 21절에 기록된 것처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까요? 안디옥까지 도망을 갔던 그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불쌍한 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앞서 말씀 드린대로 누군가를 원망습니까?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했습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이렇게 어렵을 당하게 된 것은 너 때문야! 아니야 너 때문야! 서로가 서로에게 분노하며 다투었습니까? 아닙니다. 19절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말씀을 전했는데” 또 20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주 예수를 전파하니”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오직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를 전하였으며 오직 주님께만 집중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회복됩니까? 어떤 교회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부흥합니까? 예수님께 집중하면 교회는 삽니다. 아니 예수님께 집중하는 교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말씀을 붙잡고, 어려운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며, 주님께 집중하는 공동체만이 놀라운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집중해야 내 옆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봐야 의로우신 주님의 손길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손길을 붙잡아야 내가 고난 속에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고난이며 어려움이 어려움입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곳에 주저 앉아 있으면 망하게 됩니다. 실패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든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든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 하신 분 그분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의지하며 그 분이 내미신 손길을 붙잡는 방법 밖에 없는 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뉴저지 장로 교회 가운데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 드립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한 교회]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세운 교회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누가 세웠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안디옥 교회는 박해를 피해 도망온 사람들 중에 몇 몇의 희생과 헌신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대로 안디옥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잘 되고, 조금이라도 그 일에 발을 담근 사람이면서, 보통은 자기를 자랑하고 들어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함께 “누가”라는 사람이 썼는데, 그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는 안디옥 교회의 숟가락 개수가 몇개인 것 까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안디옥 교회를 어떤 사람들이 세웠는지 몰랐겠습니까? 누가 가장 많이 희생하고, 누가 가장 많이 헌신하고, 누가 가장 많이 땀흘리며 봉사했는지, 누구보다 ‘누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귀한 헌신자들의 이름을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 그 이름들을, 누가는 왜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것이 상당히 의도적이었다고 보는데요, 그것은 그 당사자들이 자기의 이름이 들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통해서 특별히 주님의 일 가운데서 자기의 이름이 들어 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질로 교회에 헌신합니다. 그 물질을 누가 주신 것입니까? 시간으로 주님의 일에 헌신합니까? 그 시간을 누가 주신 것입니까?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 재능을 누가 주신 것입니까? 자기를 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 일까요? 남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때로는 그 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주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묵묵히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나를 위해 낮고 천한 이 땅까지 오셨는데, 그리고 정말 무지랭이 같은 죽어 마땅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의 은혜, 나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주시고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 못할 것이 무엇이며, 또 내가 무엇을 한들 주님의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있겠습니까?

따라해 볼까요! 십자가는 충성을 다 한 후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내가 부르심에 응답하여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헌신하고 봉사 하되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그 중심에 세워진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뉴저지 장로 교회가 건강한 교회, 십자가 중심에 세워진 교회라고 자부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이 예배를 드릴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헌신하고 봉사 하는지 아십니까? 누군가는 아침에 나와 교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리를 정리합니다. 누군가는 방송실에 예배를 지원하고, 누군가는 통역을 하고, 누군가는 찬양을 하고, 누군가는 빵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운전을 하고, 누군가는 청소를 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주차 안내를 합니다. 누군가는 토요일 아침에 나와 히스패닉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는 주일 오후에 그들의 예배를 돕고 그들에게 맛있는 저녁을 대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힘들어 하는 지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누군가는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이 예배를 위해 아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일을 인해 무슨 대가를 바라거나 자기 이름을 들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땀을 흘리고 수고 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피흘려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허물을 덮어준 교회]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준 교회였습니다.

22절에 보면 교회가 놀랍게 부흥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까지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서 파송합니다. 그런 바나바는 23절과 24절에 보면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안디옥 교회를 잘 목양하고 안디옥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됩니다.

그런데 25절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바나바가 아직 바울로 불려지기 전인 “사울”을 만나기 위해 다소까지 가고 26절에 그를 데리고 와서 둘이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안디옥 교회가 얼마나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인지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바울을 모셔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교회는 성장하고 있고 또 자기가 목회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배우가 시상식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상을 받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 이유는 모든 스텝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자기는 숟가락만 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꼭 맞는 비유는 아닐 수 있지만,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가 오기 전부터 이미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였고, 어찌 보면 가만히 숟가락만 얹어도 모든 영광을 바나바 혼자 누릴 수 있었기에, 굳이 바울을 데려와서 그 영광을 나누어 가질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기 자신이 누릴 개인의 영광보다는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안디옥 교회를 섬기면 교회에 더욱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울에게 기꺼이 자기의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교회의 주도권은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넘어갑니다.

만약 바나바가 자기 자신 만을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탄생한 교회입니까? 그 교회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아름답게 헌신한 자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기에 바나바도 그 대열에 동참하였고, 안디옥 교회의 양보와 헌신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안디옥 교회가 바울을 받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19절로 돌아가 봅시다. 왜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도망을 오게 되었습니까?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필두로 한 박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가장 앞서서 이끈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예루살렘 교회를 극렬하게 박해했던 바울을, 과연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몰랐을까요?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들을 이 낯선 곳까지 오게 만든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박해자 사울이 안디옥 교회를 섬기겠다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그대로 품어 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어떻게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런 용서와 사랑이 가능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안디옥 교회의 중심에 서 있고 그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굳건히 서 있지 않고 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26절에 보면 그런 안디옥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를 붙잡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꺼이 헌신하며, 자기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자들까지도 사랑을 품었던 안디옥 교회의 모습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꿈꾸십니까? 우리 교회가 어떤 믿음의 공동체로 변화되고 회복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사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CCM사역자인 소리엘이 부른 복음성가의 제목입니다. 이 노래가 탄생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됐으면 좋겠어요”라는 주제로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성도님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었겠지요. 바로 그 내용들을 종합하여 가사로 만든 노래가 바로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찬양입니다. 그 가사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숨쉬는 교회 /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 믿음의 기도가 쌓이는 교회 /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 /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 성도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 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 /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뉴저지 장로 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같이 중심에 십자가를 세우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하며,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줌으로 말미암아 이 찬양의 가사처럼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변화되고 회복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