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2 주님께 가는 길 / 마15:21~28 / 강용승 목사

20170312 주님께 가는 길 / 마15:21~28 / 강용승 목사

주님께 가는 길

마15:21-28

사순절을 맞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일상에서, 또는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떻게 주님께 나가고 은혜를 구하고 계십니까?

성공인생을 사셨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재산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교회에서도 이미 중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보다 주님을 만나야 하는 시기,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시기가 되어서, 고난과 고통 중에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심방을 온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제 내가 나으면 그동안 안 냈던 십일조 다 내겠습니다. 아니 그것도 부족하면 더 내겠습니다. 암튼 고쳐주시기만 하면 교회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깊은 절망의 한숨을 쉬며….  “장로님, 하나님께 더 고백할 것은 없습니까? 장로님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것 아니라 이 상황에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 그 장로님께서 그 이후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 은혜를 구하는 태도에 무엇인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이 여인은 자신의 딸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께 나온 여인이었는데, 그는 혈통적으로 이방인이었고, 지리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의 땅에 살고 있었으며, 또 그동안의 삶을 그렇게 이방인으로서, 우상숭배자로서 그렇게 하나님도 죄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여인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두로와 시돈 하면 가나안 중에서도 아주 영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곳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던 왕이 아합인데 그가 그렇게 영적으로 타락하고 악했던 이유는 사실 그의 부인에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었는데, 그의 고향이 바로 이 시돈이었습니다.

요세프스의 전해오는 글에 의하면 두로지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가장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이례적으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게 되었고, 이 여인은 예수님께 대단히 간절한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메시야적 칭호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군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부탁만 간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가운데에서 이분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두로와 시돈 방문전에 갈릴리 지역에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었고 거절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은 그에 따르지 않소 라고 비난. 아마 예수님도 이 이방 땅까지 와서 이스라엘 땅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메시아적 칭호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셨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처지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괴상한 표정과 소리로 주위 사람을 두렵게 하는 선을 넘어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해하는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몇번 소리지르다가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시는 길을 같이 가면서 계속 무리속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인의 소리에 예수님께서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보다못한 제자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이 말을 그 여자를 쫓아내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주님 이제 그만 원하는 대로 고쳐주시고 보내시는 게 어떻습니다. 계속 소리를 지르는데 너무 괴롭지 않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그 제자들의 말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네가 지금 나에게 뭔가를 간구할 자격이 있느냐 . 너는 이방인이지 않느냐.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너는 은혜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거절하심. 맞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비정하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보자면 새삼스러운 말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었고 유대 스승이 이방인 여자에게 뭔가 베푼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이 것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예수님도 사도들에게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6)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에게 먼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활이전에 예수님 사역의 큰 방향이었습니다.

이 때 이 여자는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고 더 과감한 행동을 합니다. 주님의 가시는 길을 가로막고 선 것입니다. 그 앞에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당시에 이러한 행동은 대단히 무례한 것이었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용납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마15:26)” 이 말씀은 그냥 “너는 개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야 참 예수님도 모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왠만하면 고쳐주시던가, 아닐거면 그냥 조용히 가시던가. 어떻게 간절히 간구하는 그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가.

지금까지 인간에게 가장 많은 유익을 끼친 동물 둘을 골라봐라 한다면 소와 개를 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소는 농기계가 발달하기 전까지 농사에 아주 필수적이었고 경제적인 가치도 아주 컸었죠. 개는 인간 가장 가까이에서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이 둘이 사람에 비유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칭찬하면서 이 사람은 정말 소 같은 사람이야 라고 하면, 성실과 충직을 나타내지만. 이 사람은 정말 개 같은 사람이야 라고 한다면, 온갖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도 개를 부정적으로 언급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

개는 더러운 동물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개다 라면 그 자체로 인격적인 모독이기도 하지만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너는 행악자이고 타락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로 여겼는데… 그들의 생각에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침묵하시다가 거절하시다가 급기야 이렇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라고 심하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여인이 스스로 이방인이고 우상 숭배자로서의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로 고쳐주셨다면…. 그는 딸 끌어안고 그냥 집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여인을 참된 은혜를 구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호의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언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 내가 자격 없는 자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때입니다. 언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까? 내가 죄인으로 주님의 피묻은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구나 라는 것을 참으로 발견할 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자라면, 참으로 은혜를 구하는 자라면 가장 먼저 해야할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님 저는 합당치 못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그러고 물러나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죄인들에게도 불의한 자들에게도 넘치도록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라는 믿음의 간구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라고 하셨을 때,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이 대답은 예수님도 조금은 당황할 만큼의 놀라운 대답이었고, 모든 시대를 넘어 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늘 논쟁을 하시고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번번히 그들의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방 백부장의 경우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처럼 칭찬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원어에 보면 더 잘 나타납니다. “Ὦ γύναι, μεγάλη σου ἡ πίστις·” 먼저는 감탄사 “오!”가 있고 “메갈레이” 라는 크고, 훌륭하고 심지어 위대한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사용하심. 공동번역에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라고 번역.

주님 앞에서 장한 믿음은, 자기의 자랑을 늘어 놓고 거들먹거리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예루살렘에, 유대 성전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한번도 칭찬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틀어 오직 이 여인만 그 믿음이 크고 장하다고 칭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그 딸로 치료해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찾아 왔는가!>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 생각하기를 여자는 울고 불고… 예수님께 간절히 나왔는데, 예수님은 그냥 그자리에서 매몰차게 대하시고 모진 말씀을 하셨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후 문맥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이야기 15장 1-20절에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게네사렛)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인 장면입니다. 그 논쟁 이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21절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사건 바로 이후에 29절은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수가에 이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에 가셔서 이 여인만 만나고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두로 시돈이 옆동네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갈릴리에서 20마일이 넘습니다. 그런데 포장된 도로도 아니예요… 가시밭길이고 돌짝밭이고 비탈길입니다. 낮에는 뙤악볕에 흙먼지가 이는 그 길은 걸어서 최소한 8시간을 가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동선에 따르면 그 먼 길을 가셨는데, 거기서 하신 일은 이 여자 하나를 만난 것 밖에는 없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그 먼 길을 그 여인 만나러 거기에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정작 예수님이 자기 하나를 만나시기 위해서 그 비탈길 돌짝밭을, 그 멀고 험한 길을 오셨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본문에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여인에게 얼마나 은혜주시기를 원하셨는지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며, 그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절히 간구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거절하고 매몰차게 대하셨다고 말합니다.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온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오셨죠. 예수님께서 그 먼 가시밭길을 비탈 길을 걸어 땀을 흘리며 오셨죠? 사실 그 여인은 그냥 그 지역에 살던 여자였잖아요. 그냥 그 지역에 그냥 그렇게 세상속에 살다가 예수님이 오신 소식을 듣고 그 앞에 나온거잖아요.

그럼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힘들게 나온 것입니까?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고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것만 생각합니다. 우리 생각만 합니다. 주님 제가 그렇게 간절히 주님께 왔잖아요. 주님 제가 정말 간절히 기도했잖아요. 주님, 주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주님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가 주님을 알기도 전부터 주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육체를 입고 오셨고,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고통과 피흘림의 장소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와 계십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15: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이제 우리는 그분을 찾아 갈릴리에  갈 필요도 하늘에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을 통하여 믿는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미 나와 함께 계신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의 삶을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함께하심 예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히 그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묵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말씀하심으로 함께 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매일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