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9 베데스다 / 요5:1~9 / 김소명 목사

20170319 베데스다 / 요5:1~9 / 김소명 목사

베데스다

요한복음 5장 1절-9절

오늘 이 시간 베데스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경쟁 만능주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현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는 강한 신념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누구 입니까? 경쟁에 대하여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한국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심슨 가족Simson Family이라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보면, 한국 사람들을 소재로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아들 바트Bart에 관한 문제로 심슨 부부가 학교에 방문합니다. 학교 선생님은 그 동안 바트가 하지 않은 엄청난 양의 숙제를 책상 위에 쌓아 놓습니다. 엄마 마지 심슨은 어떻게 아이가 이 많은 숙제를 할 수 있느냐며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반해, 아빠 호머 심슨은 더 많은 숙제를 내 달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I want him to be Korean by the time he’s done!” 그러니까 내 아들이 이 엄청난 숙제를 다 마쳤을 때쯤 에 한국 사람이 돼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한국 교육이 얼마나 아이들을 극심한 경쟁 사회로 내 몰고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좀 덜해졌다고는 하지만 올림픽 시즌이 되면 한국 사람들은 오직 무엇에만 관심을 둡니까? 누가 금메달을 딸 것인가? 그리고 금메달을 몇 개나 딸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언론사들이 또한 이를 부추기죠. 그래서 뉴스 제목을 보면 “리오 올림픽 골드 데이를 사수하라!”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가장 최근에 열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올림픽 시즌에 어떤 한 언론사가 사용한 뉴스 제목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에 너무나도 자주 노출이 돼서, 이것이 무슨 대수인가 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이 얼마나 살벌하고 자극적인 표현인지 모릅니다.

사수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는 전쟁에서나 쓰는 용어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제목을 조금 확대해서 해석해 보면 어떤 의미입니까? 목숨보다 뭐가 더 중요하다? 일등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언론사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이런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 경향도 있지만, 이런 표현을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그 사회가 극심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 일 것입니다.

요즘은 제가 텔레비전을 잘 안보지만, 한국에서 있었을 때만 해도 주일 사역을 마치면 꼭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으면서 시청했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개그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인데요, 그 중에 한 코너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코너의 제목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습니다.

한 개그맨이 술에 잔뜩 취해 아주 괴로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말 끝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렇게 괴롭고, 또 그래서 술에 잔뜩 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자기가 사는 세상이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유행어를 들으면서 얼마나 웃펐는지 모릅니다. “웃프다”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인데, 상황은 너무 웃긴데 생각해 보면 쓸쓸하거나 서글퍼지는 경우를 “웃기도 동시에 슬프다” 해서 웃프다고 표현합니다. 저는 그 코너가 참으로 웃펐습니다. 개그맨의 연기나 너무나도 익살스러워서 웃겼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고 있기에 슬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묵상해보면 이런 사회적인 현상이 오늘 날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보면,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한 가지 청을 합니다. 그 부탁을 오늘 말씀의 버전으로 하면 이런 표현입니다. “예수님 제 아들이 둘 있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때에 한 명은 1등 만들어 주시고 또 한 명은 2등 만들어 주십시오” 이 어머니의 요구는 자식들은 향한 한국 부모들이 갖고 있는 태도와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마태복음 20장 26절 앞 부분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경쟁을 강조하고, 그래서 일등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패배 의식에 사로 잡혀 불행을 넘어서 불쌍한 인생을 살게 하지만 주님의 공동체는 그렇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말씀하시죠. “(경쟁으로) 수고하고 (패배 의식의) 무거운 (인생의)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늘의 평안과 안식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 세상을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천국의 위로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참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평화가 우리 교회와 이 예배 가운데 강물처럼 흘러 넘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도 이런 경쟁 구조가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위치한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방문하셨을 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묵상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는 곳이고, 특별히 그 장소가 갖고 있는 이름의 뜻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 “베데스다”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베데스다라는 히브리어는 집을 의미하는  “벧”이라는 단어와 자비 혹은 은혜라는 뜻을 가진 “헤세드”라는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는 번역하면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습니까? 3절에 보면 그 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다섯 개의 행각, 그러니까 지붕은 있고 벽이 없는 그런 5개의 구조물에 수 많은 환자들,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자비를 간절히 소원하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베데스다라는 곳은 어떤 곳과 많이 닮아 있습니까?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사모하여 주의 자녀들이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그 모습이 무척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첫번째로 깨달아야 할 것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자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와서 하늘의 평안과 안식을, 주님의 충만한 자비를 누릴 수 있는 회복과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의 기간 동안 어떤 일을 감당 하셨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히니”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은 크게 세 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가르치시며 teaching 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파시며 Preaching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healing입니다. 주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를 “고치셨다”는 마지막의 표현으로 또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치신 것은 무지로부터 고치신 것이요, 전파하신 것은 죄로부터 고치신 것이요, 그리고 마지막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 고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이 땅에 목수, 고치는 자로 오셔서 우리의 정신을, 영혼을, 육신을 고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주님의 고치심,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 무지한 자들이, 죄인들이, 환자들이 모인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완벽함을 들어내고, 무엇인가를 자랑하며, 남과 싸워서 이기려고, 경쟁하려고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의 약함을 들어내고, 나의 상처와 아픔을 숨김없이 들어냄으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고, 그것을 기꺼이 품어 줄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환자를 심방하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마침 그 환자는 소화기관 쪽에 수술을 받은 환자였습니다. 소화기관에 수술을 받으면 가장 중요한 것이 방구를 꾸는 것입니다. 방구가 언제 나오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이 심방을 하셨을 때 그 환자 분이 방구를 꿨습니다. 방문하신 목사님도 즐겁고 또 환자와 가족들도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방귀를 뀌는 것이 얼마나 큰 실례입니까? 어떤 사람이 버스에 탔는데 너무나도 방귀를 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있으니까 꾹 참고 있었습니다. 마침 어디선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빠바바밤. 빠바바밤. 우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방구를 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음악 소리가 자기만 듣고 있는 이어폰에 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친해졌냐는 질문을 이렇게 물어 보기도 합니다. “너 그 사람과 방귀 텄냐?” 이 말은 “너 그 사람과 냄새 나고 불쾌하게 하는 방구를 마음대로 꿀 수 있는 그런 사이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냄새하고 불쾌한 일을 할지라도, 그와 다투지 않고 주님이 나를 용납하시고 용서해주신 것처럼, 기꺼이 받아 줄 수 있는 자비로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해 볼까요? 앞으로 제 옆에서 방구를 꾸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비의 집이 되어야 하는 베데스다 연못에 무엇이 없었습니까? 자비가 없었습니다. 자비의 집이라 불리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평안을 얻어야 하는 그곳에,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그 곳의 광경이 그리 행복하게 보이거나 평안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과 4절이 기록된 이상한 소문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곳은 간헐천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끔 밑에서부터 기포가 올라오면 물 표현이 움직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보면 어느 지역에 온천이 있는데 그곳에서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낫는다더라 하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베데스다라는 곳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추가되어 퍼져 있었는데, 누구만 병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입니까? 오직 한 사람,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경쟁에서 승리한 오직 한 사람만 몸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소문이었습니다. 이 헛된 소문이 내 옆에 있는 자를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아닌 경쟁과 다툼,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더 먼저 대접 받아야 하고, 내가 더 우선시 되어야 하고, 내가 더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과도한 경쟁의식이 교회를 경직 시키고 교회를 병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누가 나타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관심을 보이십니까? 38년된 병자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두번째 은혜를 발견합니다.

따라해 볼까요? 교회는 가장 약한 자를 우선시 해야 한다.

베데스다 연못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물이 동하였을 때 누가 가장 먼저 그 물이 들어가느냐 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덜 심각하거나 덜 아픈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거동이라도 할 수 있고, 손 발이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관심이 주어진 곳이 바로 당시의 베데스다 연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라면 세상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교회가 만약에 세상과 마찬가지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 대접받고, 인정받고, 높임을 받는다면 굳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관심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은 그 곳에서도 가장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38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무나도 병이 심각하여, 남들보다 먼저 그 연못 안으로 들어갈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극심한 절망 가운데 자그마치 38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주님의 관심이 교회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보다 먼저 온 어떤 집사님이 탕수육을 먹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속으로 그래도 내가 명색이 장로인데 저 사람보다는 더 맛있는 것 먹을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짜장면을 시켜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속이 상해서 “주님! 저 집사님은 탕수육 사주시면서 양장피를 사 주시지는 못할 망정 짜장면이 뭡니까? 하며 따지듯 물으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아무개 장로야 짜장면도 감사한 줄 알아야 너네 교회 목사는 지금 배달 나갔다!”

그 장로님이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속이 상해 있는데, 어느 날 천국에 큰 잔치가 벌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웬 잔치인가 봤더니, 어떤 목사님이 왔다고 천국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이 이번에 잘 걸렸던 싶어서 다시 한번 주님께 따지듯 물었다고 합니다. “주님! 주님도 결국 목사와 장로를 차별하시는 군요. 저에게는 짜장면 하나 사주시는 것으로 환영식을 퉁 치시더니, 목사가 천국에 왔다고 큰 잔치를 벌여 주시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그러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집사와 장로들은 천국에 자주 오지만, 이번에 너무 오랜 만에 목사가 천국에 와서 큰 잔치가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시더 랍니다.

이 두 재미난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뼈 있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천국은 낮은 자가 더 높임을 받는 곳이고 또 자기가 남보다 높다고, 우월하다고, 잘났고 똑똑하고, 더 대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이 오히려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어떤 분은 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손과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 군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아픈 곳이라고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가장 많은 관심을 둬야 하는 곳은 바로 아픈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자에게 가장 아픈 자에게 그것이 마음이든, 그것이 몸이든, 그것이 어떤 한 곳이든 교회는 가장 아파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 입니까? 가장 많은 관심과 가장 많은 배려와 가장 많은 섬김을 받아야 하다는 사람은 누구 입니까? 가정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은 갓난 아기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가장 관심을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는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중직자도 아닙니다. 바로 교회에 오늘 처음 나온 사람입니다.

무거운 세상 짐을 지고 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영혼을 주님은 지금 바라보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받아야 할 은혜는 이것입니다. 결국 주님 만이 우리의 소망 되신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주님이 그 38년 된 환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이 그 환자의 상황을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보다 그 38년된 환자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38년된 환자 안에는 아무런 소망도 실낱같은 희망도 전혀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7절에 기록된 그 환자의 대답을 보십시오. 그 속에 낙심과 탄식과 절망과 패배의식 등이 얼마나 짙게 배어 있습니까?

그럼에도 질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그 절망 가운데 탄식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그 주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주님의 눈길이 나로 향해 있음을,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두고 계시며,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그래서 나를 통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그 주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38년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기간 동안 나를 괴롭힌 고통이라 할 지라도, 비록 지금 나를 대적하는 자가 골리앗과 같이 내가 결코 이길 수 없는 기골이 장대한 자라 할지라도, 비록 지금 나의 앞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여리고 성과 같이 내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장벽이라 할지라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 일어날 수 있고, 주를 의지할 때 능히 무너뜨릴 수 있으며, 주님을 신뢰할 때 능히 승리할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연약한 자들이 주님의 자비와 구원을 사모하여 모여 있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능력은 오직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절망에서 자리에서 일어설 때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의 자비가, 은혜가, 기적이 교회와 우리 가정 가운데 흘러 넘칠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