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 선한 싸움을 싸워라 / 막10:46~52 / 김소명 목사

20170423 선한 싸움을 싸워라 / 막10:46~52 / 김소명 목사

선한 싸움을 싸워라

막 10:46-52

 

[선한 싸움과 악한 싸움]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싸움은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큰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고양이 두 마리가 고기 한 덩이를 가지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원숭이가 그 모습을 보고 자기가 재판관이 되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고양이들은 흔쾌히 승낙했고, 고기 덩어리를 그 원숭이 앞에 놓았습니다. 원숭이는 그 고깃덩어리를 둘로 잘라서 하나씩 고양이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것이 작다고 생각한 한 고양이가 원숭이에게 따지자, 원숭이는 더 커 보이는 상대편 고양이의 고기 덩어리를 한 입 배어 먹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고양이가 자기 것이 더 작다고 따졌습니다. 원숭이가 이번에 반대편 고양이의 고기를 한 입 물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계속하니 고기가 양쪽 다 아주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들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결국 고기를 다 먹은 원숭이는 도망치듯 사라졌습니다. 이제야 고양이들이 자기들이 속은 것을 알았고, 후회를 하였지만, 이미 고기는 없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잠언 20장 3절 말씀에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다툼은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고,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기에 결코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감당해야 할 싸움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때로는 감당해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특별히 구분하여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싸움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싸움입니다. 그것을 우리를 멍들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싸움은 악한 싸움이요, 언제나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와는 구별된 무엇이 있다? 선한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한 싸움은 어떤 것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12절의 말씀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싸움이요, 그 싸움의 결과는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보면 선한 싸움을 감당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디매오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한 싸움을 감당했고, 그 상급으로 주님의 치유와 회복, 축복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믿음 안에 감당해야 할 싸움이 있다]

오늘 우리가 먼저 받아야 할 것은 은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감당해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한다고 모든 일이 다 잘 풀리던가요?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더 큰 상처를 경험적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내가 이 일을 아예 맡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상처를 받지도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주님이 부르신 은혜의 자리에서 잠시 한 발짝 물러나 계신 분이 혹시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도 분명히 감당해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46절에 바디매오라는 자가 누구인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도시에 제자들과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거리로 몰려 나왔습니다. 그때 그 길가에 누가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까? 46절에 기록된 표현대로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이 짤막한 구절이 그가 어떤 자였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디매오가 그의 실제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는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어떻게 부르십니까?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몬 앞에 부르신 이 “바요나”는 베드로의 First Name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Nick Name도 아닙니다. 그냥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디매오도 실제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부모가 그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이름이 있기는 한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고, 그로 인해 남에게 구걸하는 거렁뱅이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가 바디매오라 불리게 된 것은 매일 길거리에 나와 앉아 있기는 하니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야 할 때, 길을 비키라고 하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받아가라고 할 때, 그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디매오의 아들”, “디매오의 아들” 부르다가 그것이 그의 이름처럼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디매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까? 그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날도 바디매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거리 이곳 저곳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온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바디매오는 어떤 이름을 듣게 됩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예수는 그가 구걸하면서 수없이 들어온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나사렛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고, 무엇보다 엄청난 기적들이 많이 행하셨다는 사실을, 바디매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도 고치셨다는 것입니까? 자기와 같이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도 치유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디매오가 얼마나 주님을 만나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는 주님의 찾아 나설 처지가 못 되었으니 그냥 주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라는 이름이 바디매오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바로 자기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자도 많이 고치시고, 시각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셨다는데, 나도 주님 앞에 나아가면, 어두움에 갇힌 나의 인생이 변화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을 당연히 품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평생 색맹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에 관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을 볼 수 있지만, 사물의 색깔은 제대로 구별할 수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어떤 상자를 선물로 받고 그것을 뜯어 봅니다. 그 안에는 색맹인 사람들이 색깔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경이 있었습니다. 그 안경을 눈에 가져다 댄 순간, 안경을 제대로 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사물에 색깔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던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파란색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봅니다. 자기의 모자를 벗어 색깔을 확인한 순간, 다시 한번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수리지 못하고 다시 얼굴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색깔을 처음 본 자의 감격이 이와 같은데, 시각 장애인이 앞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그러니 자기를 치유해 주실 수 있는 예수가 그 앞에 있다는 소릴 듣고, 바디매오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47절을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구절들이 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 다음 6절 말씀,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니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를 누구로 고백한 것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한 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누가 했다고요? 앞을 보지 못하고 평생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거지 바디매오가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에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재산, 학력, 출신, 성별, 인종, 과거 이런 것들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외에 다른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한 목사님이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그 대학을 둘러보고 나서 채플실에 앉아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죠. “주님 왜 저에게는 이런 좋은 대학을 다닐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따지듯 물으니까 주님께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종아! 나도 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느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는데 큰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바디매오처럼 듣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고백하기면 하면 구원받고 축복받다 수지 맞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48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주를 만나기 원했으나, 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를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8장 3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여기서 말하는 앞서가는 자들은 물론 물리적으로 바디매오에 앞에 서서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자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는 바디매오보다 먼저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누구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바디매오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믿음에 앞선 자들이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상처받는 다고 너무 당황해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믿음 안에서 앞서 있는 자가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너무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 감당함에 있어서도, 뜻하지 않는 다툼과 싸움의 문제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믿음 안에서도 우리가 감당해야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상처받았다고 그냥 주저 앉아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하여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한판 붙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할 두번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이야기에서 바디매오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바디매오를 방해한 앞선 자들이었을까요? 만약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가 자기에게 잠잠하라고 한 자들을 들이 받았다면, 그것은 앞선 자들도 망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디매오 자신도 망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쳤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싸움이 바로 악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디매오는 누구와 싸워야 했고, 또 실제 바디매오는 누구와 싸웠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그 모습이 당장 눈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묵상해 보면, 바디매오가 누구와 싸웠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바디매오는 누구와 싸운 것입니까? 바로 자신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분노, 억울함, 수치심, 상처, 패배의식, 자기 안에 있는 치유되지 않은 죄악의 마음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앞선 자들이 바디매오에게 잠잠하라고 했을 때, 바디매오는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처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시각 장애인으로 사는 것도 서러운데,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자들의 모습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시각 장애인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드는 마음이 억울함이었을 것이고, 그 동안의 상처와 그로 인한 패배 의식이 아마 바디매오를 짓눌렀을 것입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포자기하거나, 다른 하나는 자기를 방해하는 자들을 들이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어떤 길입니까? 망하는 길입니다. 악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다행이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군인지 분명히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유영만이라는 사람이 쓴 ‘청춘경영”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위대한 경쟁일수록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다. 경쟁을 통한 성취도 남보다라는 바깥의 기준보다 전보다라는 안의 기준에 비추어 본 평가가 소중하다. 아무리 남보다 잘해도 전보다 못하면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 전보다 잘하려는 노력이 전보다 나은 자기 자신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여러분! 언제나 위대한 싸움은 자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위대한 인물일수록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여호수아는 아주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됩니다. 그것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감당하지 못한 가나안 땅 정복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싸움은 무엇입니까? 외부적으로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일까요? 아니면 내부적으로 이스라엘 족속 안에서 자기의 말을 잘 따라 주지 않은 것 같은 자들과의 싸움이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감당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싸움은 바로 여호수아 안에 있는 두려움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내가 이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과연 모세도 감당하지 못했던 가나안 땅 정복을 완수할 수 있을까? 혹시 내가 실수하여 이 민족 전체가 큰 위기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을 때도, 수많은 내부의 반대세력이 모세를 힘들게 했는데 내가 이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여호수아를 뒤덮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여호수아 1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앞선 6절과 7절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는 표현이 두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싸움이 바로 여호수아 본인 안에 있는 두려움과의 싸움임을 우리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누구와의 싸움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셨지요. 마태복음 4장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감당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십니다.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한 성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사단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이 믿음 안에서 평생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은 육신의 정욕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라는 것은 쇼를 하라는 것이니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사단에게 절을 하며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은 안목(보는 것)의 정욕입니다. 그런데 광야 한 가운데 거룩한 성은 어디에 있으며, 높은 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포함하여 이 모든 것이 결국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16장 32절 말씀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주님께 집중할 때 승리한다]

그렇다면 이제 믿음 안에 싸움이 있으며, 그리고 그 싸움의 대상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것을 악한 싸움이 아난 선한 싸움으로, 패배하는 싸움이 아닌 승리하는 싸움으로, 망하는 싸움이 아닌 성장하고 성숙하는 싸움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다시 오늘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바디매오는 자기에게 잠잠하라 말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들과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누구에게 집중했을까요? 자기 안에 있는 연약함을 바라보며, 주님께 집중했습니다. 48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바디매오는 자기에게 잠잠하라 하는 자들에게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대적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향하여 더 크게 믿음으로 외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은혜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면 그 사람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 바라보며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면,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고 주님도 영광 받으십니다. 다른 사람과 싸우면 망합니다. 그도 망하고 나도 망합니다. 나와 싸워서 내 자아를 십자가 앞에서 죽이면 주님이 나를 살려 주십니다.

우리 나라 초대 교회 역사에 보면 김익두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때 입신양명을 꿈꾸기도 했던 그는 결국 그 모든 꿈이 좌절되어 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동네 깡패로 지냈습니다. 동네에서 온갖 망나니 짓은 다하고 돌아다녔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김익두 만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세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거리에서 스왈렌 선교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스왈렌 선교사님이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라고 말하자 그 전도지로 코를 풀면서 너나 믿고 너나 가라 했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스왈렌 선교사님이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한대 쥐어 박았을 텐데 여성이고 외국 사람이라 그냥 지나갔답니다.

문제는 그 저녁이었습니다. 이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눕기만 하면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습니다.”라는 소리가 자꾸 들리 더랍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스왈렌 선교사를 찾아가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묻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깡패 김익두는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 고향에 나타나자, 그가 정말 변화되었는지 시험하고자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었는데 화를 참지 못하고 김익두가 그를 논바닥에 매다 꽂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는 말이 김익두 죽었는 줄 알았는데 아직 안 죽었네! 그 말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여 놀랍게 쓰임 받은 주님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싸움은 더욱 치열해 집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은혜 안에서 완전히 변화되지 못한 나 자신이요, 아직 치유 받지 못한 내 안의 상처입니다. 그 싸움을 주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선한 싸움으로 이겨내십시오.

바울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8절 말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도 바울처럼 나를 쳐 주님께 복종함으로 선한 싸움을 감당할 때,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