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 일어난 부흥
사도행전 2:36-47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2017년 우리 교회의 표어
2017년 한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부흥을 준비하는 교회”입니다.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올 해 첫 주일 예배 시에 김도완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 표어를 가지고 말씀을 나눠주셨습니다. Revival 다시 살아남, 거듭남이 한두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일어나는 부흥, 마른 뼈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고 말라서 전혀 희망이 없는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로 세워지는 부흥을 위해서 필요한 것 세가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말씀의 장작이 있어야 하고 두번째로 기도의 기름이 부어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성령의 불꽃이 떨어질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올 한해 부흥을 준비하는 일환으로써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에 집중하고 전념하며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함으로 기다리자는 것이 목사님의 말씀의 핵심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 말씀의 장작과 기도의 기름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올 한해동안 이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장작을 차곡 차곡 쌓았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함께 모여서 한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쓰면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함께 기도한지 몇날이 못되어, 유대인의 명절 중 하나였던 오순절에 드디어 기다리던 성령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짧은 문장, 성령이 임하셨다는 문장과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는 문장 사이에는 분명 어떠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의 말씀이 성령의 임재에 대한 이야기라면 41절과 47절의 말씀,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는 말씀이나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교회에 폭발적인 양적인 부흥이 일어났다는 말씀인데, 그 사이에는 분명 어떤 일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 두 문장 사이, 이 두 사건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장작, 기도의 기름, 성령의 불꽃이 부흥의 전제조건, 부흥을 위해 준비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바로 부흥이 일어났던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에서만 유효했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늘 반드시 부흥이 필요한 우리의 현실에서도 유효한 방법이라고 확신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아무런 소망 없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 반드시 부흥이 필요한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교회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초대교회에 부흥이 일어났던 이 방법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배우고 그리하여 함께 부흥을 경험할 수 있기를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초대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가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담대한 복음전파
첫째로, 그것은 담대한 복음전파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 초대교회가 했던 일은 복음전파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10장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3-14)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했던 일이 바로 이 복음전파 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재와 함께 나타났던 기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세계 방방곡곡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였던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방방곡곡에서 모인 수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지역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제자들을 주목하여 보았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과 베드로는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했던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 14절부터 36절까지 나와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베드로가 했던 첫번째 설교였습니다. 이 설교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전했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를 통해서 단 한가지 이야기만을 힘써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핵심, 베드로가 전했던 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흥을 위해서 초대교회가 했던 일이 담대한 복음 전파라고 할 때, 여기서 담대하다는 것은 그들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했던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내용이 대담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부활, 죽은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때 당시에도 황당한 이야기, 결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스승으로 여기고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기 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을 것이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임을 몇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을 믿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예수님의 무덤 곁에서 야영을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서 그랬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예수님에 무덤에 가서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던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그들은 왜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할 때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이야기, 터무니 없는 이야기,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말합니다. 내가 그 일에 증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비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서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세상이 결코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을 때, 그 설교를 통해서, 그 복음 전파를 통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서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묻게 되었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날 무려 3000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미련해 보이는 베드로의 담대한 선포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과학주의와 이성주의,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다는 것은 미련해보이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냥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좋은 점들, 심신의 평안함, 자녀 교육의 장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들, 삶의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들을 적당히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흥미를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인 것처럼 보입니다. 괜히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내용, 받아 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피하는 것이 나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결코 우리의 정신 수양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사상이나 좋은 생각,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줄만한 참고할만한 좋은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실되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더욱이, 성경은 이러한 담대한 복음 전파가 오히려 부흥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곳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 직장 동료, 학교 친구, 이웃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여러분들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까봐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내가 속한 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때 그 진리를 통해서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처럼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던 구체적인 방법 첫번째는 담대한 복음전파였습니다. 이 담대한 복음전파를 통해서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가 했던 또 다른 일은 무엇입니까?
아끼지 않는 나눔
둘째로, 그것은 아끼지 않고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초대교회가 했던 일은 자신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나눠줬던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자신의 것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나누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초대교회를 통해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초대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부흥은 단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모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고 한다면 교회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교회로 모여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바나바와 같이 부자인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이들을 통하여서 교회의 필요들이 채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끼지 않고 나누는 일이 교회에 부흥을 가져왔습니까? 교회는 그것을 통해서 교회의 진실성과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전파한 것이 말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아끼지 않는 나눔은 행동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낌 없는 나눔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실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받은 은혜가 진실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실이라는 것을, 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눔을 통해서 풍성해지는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고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서로를 위해서 자신 것을 포기하되 아까워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초대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보았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싶어서 주님 앞에 나오게 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29-3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집이나 아내나 형제난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는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런 것들을 버리면 엄청난 경제적 풍요를 얻어서 이런 것들을 여러배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런 것들을 버린 자는 바로 교회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어려배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되는 모습이 바로 사도행전 4장 34-5절 말씀에 나와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 4:34-35)
자신의 집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포기 했을 때 교회 안에서 다른 모든 성도들의 집이 우리의 집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포기했을 때 교회 안에서 다른 모든 성도들이 나의 가족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현세에서 여러배로 돌려받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들의 아낌없는 나눔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들의 아낌없는 나눔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을 때, 교회는 온백성의 칭송을 받았고,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더하여져 갔던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없을 때 세상은 교회를 찾을 이유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법칙, 세상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일 때 교회는 세상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교회가 오늘 세상 가운데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도 복음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를 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가? 서로를 위하여 나누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나의 것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까? 우리가 입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고 있을 때 교회에서는 정말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와서 우리 교회를 보았을 때, 그래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있는 것이구나, 여기서 이미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 곧 완전히 이 땅 가운데 임하겠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전도, 선교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것은 입으로 말로 언어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동안 사영리를 나누고, 성경공부를 하고, 그래서 그것을 듣고 읽고 배우는 사람이 지식적으로 동의하고 함께 영접하는 기도에 동참하는 것을 전도와 선교의 전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도와 선교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입을 열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사랑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선행을 베풀고 은혜 받은 사람의 삶을 살아나가면서 삶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눔으로써 전도와 선교를 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말 뿐 마니라 행동과 삶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진정한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만족과 나의 편함과 나의 안락과 안전함을 내려놓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이 일을 하게 될 때 우리에게 놀라운 부흥이 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제자들처럼 초대교회처럼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흥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첫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우리는 이 땅의 황무함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는 오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마치 물 속으로 잠겨가고 있는 뱃 속에 갇혀있는 것과 같은 수많은 영혼들이 오늘도 구원의 소망을 찾지 못하고 한시간 한시간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 가까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죽어가는 영혼들을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흥을 사모합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부흥을 사모하고 바라야 합니다. 부흥을 위해서 말씀의 장작을 쌓고 기도의 기름을 부으며 성령의 불꽃을 기대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을 통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아끼지 않고 나누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아끼지 않고 나눔으로써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참된 부흥을 경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