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1 눈을 뜨다 / 막 8:22~26 / 노재균 목사

20170611 눈을 뜨다 / 막 8:22~26 / 노재균 목사

눈을 뜨다(막 8:22-26)

  1.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3.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4.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5.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에이란 쿠르디

2015년 전세계를 큰 슬픔과 충격에 빠뜨렸던 한장의 사진을 기억하십니까?
바로 그 사진은 터키 휴양지인 보드룸의 해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한 아이의 사진입니다. 이 아이는 시리아 북부 코바니 출신의 3살된 난민 에이란 쿠르디로 ISIS로 인해 촉발된 시리아 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터키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그리스 코스섬으로 향하다가 이 해변 인근 지역에서 배가 뒤집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아이가 타고 있던 배에 함께 했던 23명 중 쿠르디를 포함한 어린이 5명과 여성 1명 등 12명이 숨졌고 2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이며 구조된 것은 7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에 전세계의 예술가들은 이 사진을 패러디 하면서 이 아이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다음과 같은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에서는 이 쿠르디라는 아이가 UN의 회의장 가운데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에 붙어있는 제목은 “Do you see it now?” “이제 좀 보이나요?”였습니다.

사실, 이 아이의 죽음은 전쟁과 핍박을 피해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 끔찍한 시리아 난민들의 실상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현재까지 6년 가까이 지속된 시리아의 내전으로 인해서 현재까지 적어도 약 2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중에 2만명정도는 아동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을 통해서 지금까지 약 1000만명 정도가 국내외에서 난민이 되었고, 1350만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들 중 절반은 어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충격적인 사진을 보기 전까지 세계는 그들을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세계는 그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그 나라에서 발생하는 난민들에 대해서 그냥 골칫거리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들, 한사람 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년 지난 이후 현재는 상황이 어떠합니까? 여전히 시리아의 내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진행 중입니다. 쿠르디 이후에도 수많은 시리아의 어린이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들에 대한 뉴스가 뉴스 1면에 나오는 잠깐동안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만 며칠이 못되어 우리는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리아 난민들 뿐입니까? 오늘도 남미에서는 나라를 지배한 갱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도 많은 이들이 가난과 질병과 전쟁과 테러와 학살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고 또 몇명은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쿠르디 또래의 아이들,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에 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눈에 보였는지 몰라도,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씨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낙서처럼 보이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뉴스, 또는 통계 숫자일 뿐이었습니다.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을 문맹이라고 하면 그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우리는 어떤 의미로 맹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여전히 우리는 맹인 인채로 남아있습니다.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한 맹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사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합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이야기나, 맹인 바디매오의 이야기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꽤 있습니다. 이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주로 이 이야기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맹인들의 믿음입니다. 맹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예수님을 큰소리로 불러 예수님을 불러 세우거나, 예수님을 붙잡고 애원하며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나오는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다른 맹인 치료 기적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이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특이한 방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특이한 방식은 다른 어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에서도 전혀 나오지 않는 것 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이 맹인을 고쳐주실 때 맹인의 눈을 단번에 뜨게 해주시지 않았고 두 단계에 걸쳐서 눈을 뜨게 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맹인을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맹인을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많은 사람들을 피해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적을 행하시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십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맹인이나 청각 장애인을 고치실 때 하셨던 행동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종종 안수를 하셨습니다. 병자에게 그가 어떤 병을 갖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사실 이 안수가 병자를 낫게 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안수 없이도 예수님은 말씀 만으로도 병자들을 낫게 하신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는 병자를 말씀 만으로 고치신 적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병자들에 손을 대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표현하시는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병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도 병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주로 걸인이나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거의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청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가거나 아니면 그들을 만지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만지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며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을 고칠 때도 종종 행하셨던 일입니다.

바로 이 다음부터가 흥미로운 부분 다른 기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기적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특이한, 특별한 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이 치료하신 병자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들리느냐?”라든가” 이제 열이 좀 내린 것 같냐?”라든가 “이제 안아프니?”라는 식으로 질문을 하신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고쳐 주는 이 병자가 자기의 능력을 통해서 완전히 나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맹인이 한번에 고쳐지지 않을 것을 알고 계시다는 듯이, 여전히 맹인에게 시력에 문제가 있을 것을 알고 계시다는 듯이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맹인은 예수님이 그 눈에 침을 뱉고 안수를 하셔서 눈을 뜨게 하신 후에도 여전히 보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맹인은 눈을 떠서 쳐다보았고 그가 본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그 사람들이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인은 눈을 떠서 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한번에 이 맹인을 고치지 못하셨습니까?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특별히 어려운 기적이라서 한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번 완전히 고쳐시지 못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날 따라 컨디션이 안 좋으셨던 것입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맹인이 시력이 한번에 회복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맹인을 한번에 고치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맹인을 두 단계에 걸쳐서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 기적의 의미, 이 기적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원하셨던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기적의 의미를 이 기적의 컨텍스트를, 이 기적의 앞의 말씀과 뒤의 말씀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부분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꾸짖고 계십니다. 8장 18절, 21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막 8:18)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막 8:21)

예수님 제자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분명히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기적을 보고 나서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그래서 예수이 하시는 말씀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 일로 이렇게 꾸짖으신 일이 있고 난 바로 후에 나오는 기적이 바로 예수님이 이 맹인을 고치신 기적입니다. 그리고 맹인 역시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보기는 보아도,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맹인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은 닮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뒤에 이어지는 본문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가복음 8장은 이 기적 사건 이후에 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8장 27절부터 38절까지의 말씀이 남아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그 질문에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헛 제자 중에 한명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 역시 거기까지 밖에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앞으로 겪을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심지어 예수님을 꾸짖기 까지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생각했던 그리스도 되신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그들에게는 세상이 말하는 승리와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다시 꾸짖으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베드로 역시 눈을 뜨고 있다고 했지만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 역시 맹인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두번에 걸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행하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한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제자들의 영적인 맹인된 상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마 그들은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맹인을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처럼, 제자들은 역시 그러했습니다. 눈은 있으나 눈은 떴으나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제자들의 영적인 맹인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제자들의 상태를 지적하기 원하셨고, 두번에 걸쳐 맹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이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맹인에게 두번째로 안수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두번째 안수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기적을 본 것 만으로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의 안수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이 그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예수님이 지적하신 제자들의 영적인 맹인된 상태는 우리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맹인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라고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맹인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먼저,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있다면 당연히 살아가야 할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된 삶,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 예수님이 주인되신 삶, 그래서 내 육적인 자아는 죽고 내 고집, 내 욕심, 내 우선순위, 내 자존심은 죽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싫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맹인된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적인 맹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보아야 할 것, 우리의 이웃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으로 비롯하여서 수많은 난민들이 어떻게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서 죽어가는 것을, 배고픔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것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지금까지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은 뜨고 있으나,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 눈 앞에서 걸어다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마치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그 많은 사람들이 나무와 같이, 배경처럼 보일 뿐입니다. 우리의 눈은 여전히 뜨고 있으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 후에 브로드 에비뉴를 한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브로드 에비뉴를 걸을 때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그냥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그냥 배경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특별히 그 거리에 있는 많은 히스패닉 분들, 그 분들은 더욱 더 그냥 우리에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두번째 안수가 필요합니다. 일터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카페와 버스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우리에게는 그저 배경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길에서 여러분이 보게 되는 홈리스들 역시 우리에게 그저 익숙한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눈은 뜨고 있으나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두번째 안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안수

예수님은 다시 맹인의 눈에 안수하시고 맹인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25절을 다시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나서 무릎을 쳤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로 왜 맹인이 보고는 있으나 보지 못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 눈에는 사람들이 그냥 걸아다니는 나무처럼 보였는지, 그리고 그 눈에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였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맹인의 눈에 초점이 안맞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동 카메라를 초점을 잘못 맞추고 사진을 찍으면 화면이 뭉개지게 나오는 것처럼, 맹인의 눈에 초점이 안맞아 있을 때 사람들이 지나가는 나무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목하여 보았다” 즉,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니까 그제서야 그가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집중해야 할 것,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맹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흐릿하게 보이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난민들을 보지 못했던 이유,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을 보지 못했던 이유, 브로드 에비뉴와 뉴욕의 거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목하여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주목하여 보지 않는 이유, 우리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실은 우리의 포커스가 다른 곳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는 이유, 우리의 포커스가 그들에게서 나가 있는 이유, 그것은 우리가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주목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 나라아가 아니라 세상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우리의 초점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 우리의 눈 앞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 우리가 우리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수 많은 영혼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다.  우리가 집중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가족, 나의 자녀, 나의 건강, 나의 재정, 나의 직장, 나의 사업, 나의 인간관계, 오로지 나 자신의 문제, 이 세상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로지 그 곳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그 나 자신의 문제, 이 세상의 문제에만 집중할 때 우리의 눈은, 천국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눈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그 일조차 우리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눈은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세상의 문제는 다 해결됩니까? 아니요. 그 문제조차도 결국 해결 되지 않습니다. 해결되지도 않는 문제를 계속해서 묵상하고 그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우울해지고 그 문제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 세상, 세상, 우리, 우리, 우리 자신에게만 주목하고, 집중할 때 우리는 그것에 함몰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포커스를, 우리에게만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껏 배경으로 여겼던 그곳에 맞춰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의 변화를 줄 때 우리가 그들에게 주목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서 온전히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선의 변화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예수님께서 안수하실 때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우리에게 다시금 와닿아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랑의 손으로 우리를 안수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뜨고 집중해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껏 배경으로 여겨왔던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그들의 이름을 물어볼 때 우리의 시선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순종하여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때부터 그들이 배경이 아닌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무와 같은 풍경이 아닌 한 영혼으로 보이게 됩니다. 순종하여서 우리가 홈리스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양로원과 고아원을 방문하기 시작하고, 월드비전이나 컴패션과 같은 구호단체를 통해서 한 아이를 후원하기 시작하고, 장애인 복지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내 옆에 앉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선교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 그 시선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테말라 단기선교를 통해 일어난 변화

잠깐 단기선교를 통하여 저에게 일어났던 시선의 변화를 나누기 원합니다. 2년전 과테말라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팰팍에 있는 히스패닉 친구들 중에서 대부분은 바로 과테말라 출신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히스패닉 미니스트리에 참석하고 있는 히스패닉 성도들 중에도 상당수가 역시 과테말라에서 온 분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교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다가 선교를 준비하면서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청년부 예배와 셀모임 시간과 히스패닉 예배 시간이 겹쳐서, 오고 가면서 히스패닉 분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저는 그렇게 자주 마주치는 그 분들을 정말로 배경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히스패닉 미니스트리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과테말라 선교를 통해서 제 시선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저희 선교팀이 방문했던 마을 중에는 아주 깊은 산 속에 있는 라호야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산골 마을인데 놀라운 것은 우리교회 히스패닉 부서의 많은 성도분들이 바로 이 라호야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팀은 우리 교회 히스패닉 성도분들의 선물을 이 라호야 마을로 배달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일하면서 아끼고 모은 돈으로 산 선물, 아이들의 축구화, 가방 등의 선물을 잘 싸서 과테말라로 가져갔고 그와 함께 우리 교회 히스패닉 성도님들의 영상편지까지 찍어서 라호야 마을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짰습니다. 가는 길이 험하여서 중간에 사륜구동인 픽업트럭으로 갈아타고 마을로 들어가는데 놀라운 것은 그 픽업트럭을 운전하는 어린 친구가 팰리세이드 팍이라고 적혀 있는 후드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드티가 어디서났냐고 물었더니, 미국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팰팍에 지금 자신의 형이 가있는데 자기를 위해서 그 후드티를 보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라호야 마을에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에게서 온 소식과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교팀은 그들에게 팰팍에 있는 가족들이 준비한 선물을 나눠주고 영상편지를 보여주고 또, 그들이 다시 팰팍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영상편지가를 찍었습니다. 이 경험을 하고 나니 저는 더이상 우리 교회의 히스패닉 성도들이 그냥 배경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라 호야 마을에서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가장이고 사랑하는 아들이고 보고싶은 남편이고 그리운 아버지였습니다. 팰팍의 길거리에서 일거리를 찾고 있는 히스패닉 형제는 과테말라에서 픽업트럭을 운전하는 한 아이의 형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단기선교를 통해서 그렇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비로서 아주 조금 더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두번째 안수를 그렇게 받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좀 더 제대로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영적인 눈을 가지고 세상을, 한 영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도 함께 그렇게 보게 되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그래서 거기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눈을 뜨고도, 보고 있으면서도 못보는 맹인이 되지 않고 밝히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제대로 보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