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시는 분(요 20:21-23)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인사
우리 교회는 이번주 토요일 과테말라 단기선교팀으로부터 시작해서, 엘살바도르, 아이티, 텍사스 까지 모두 4개의 여름 단기선교팀을 파송합니다. 그래서 이번주 수요기도회 때에는 이를 위해서 단기선교팀 파송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여름 단기선교에 맞춰서 저는 보내시는 분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보내시는 분”이라는 제목을 설교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은 선교라는 말이 결국은 성경에서 나타나는 “보내심”으로부터 나온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선교, 영어로 “mi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mittere(미티어)”로 부터 나온 말이고 그 의미는 보내다, 파견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라는 말은 보내심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심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보내심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보내심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누가 우리를 보내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
가장 먼저, 사실 선교의 주체, 보내심의 주체는, 보내심의 시작점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아버지 하나님은 보내심의 시작점입니다. gk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땅으로 보내셨고, 모세를 바로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셨고,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교, 모든 보내심의 시작점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을 또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지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 선교지는 우리가 단기선교를 가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아이티와 텍사스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과 사업체, 우리 동네의 슈퍼마켓과 식당과 놀이터와 라이브러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보내심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우리의 선교지에서 우리가 놀라운 열정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선교를 담당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의 선교지에 있는 것은 그냥 우연히, 어쩌다보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아니면 남겨지듯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직장, 그 직장의 내 사무실, 그 사무실에서도 내가 앉아있는 그 책상과 의자에, 내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의 오른쪽, 내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의 왼쪽에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맞은 편에 내가 앉아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앉아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있는 선교지에서,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그렇게 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의 자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과테말라의 초등학교나, 엘살바도르의 무더운 교회로, 아이티의 고아원과 텍사스의 난민 아파트로, 우리의 선교지로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냥 두 손을 놓고 있을 수 없고, 그냥 흘러가는데로 가만히 수동적으로 앉아있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것이고 내가 해야할 것이 무엇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군인가를 찾아서 열정을 가지고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보낸 것도 아니고, 우리 학교 교수님이 보낸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 사장님이 보낸 것도 아니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말단 사원으로 회사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회사에 출근을 했는데 어디로 불려갑니다. 나를 부르신 분은 그 회사의 가장 높은, 평사원은 1년에 한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회장님이십니다. 그 회장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시면서 한 부서로 보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부서에 들어가서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모든 관심과 생각과 열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손으로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회장님이 시키신 그 임무를 늘 기억하면서 그 임무를 어떻게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면서 열정을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주신 임무 아닙니까? 여러분 임무가 영어로 뭐죠? 그렇죠 미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임무와 함께 지금 우리가 속한 선교지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임무입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과 우리가 속한 직장과 우리가 속한 학교와 우리가 속한 교회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가 타는 버스와 우리가 가는 식당과 우리가 가는 카페와 우리가 가는 미용실과 우리가 걷는 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손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있고, 발로는 다른 것을 위해서 뛰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임무를 늘 기억하고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임무, 미션을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놀라운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보내졌습니다. 하나님의 임무를 가지고 우리가 보내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사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대사는 무엇입니까? 대사는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서 외교를 맡아보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이 대사가 파견될 때. 이 대사는 그를 파견하는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국가 원수와 그 권위를 대표합니다. 대사가 가지고 있는 권위가 얼마나 큰 것이냐면 각 나라에 대사관이 있지요? 예를 들면 미국의 대사관이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한국 땅일까요 아니면 미국 땅일까요?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미국의 땅입니다. 미국법에 따라 통치를 받는 미국 영토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망명을 할 때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의 담을 넘는 것입니다. 그 담을 넘어 들어가면 미국 땅이고 미국의 법에 따라 중국 군인들이 그들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대사가 가지고 있는 권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은 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셨다가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이라고 비난을 받으셨 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들에게 주어졌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죄가 사함을 받게 되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떨 때 보면 우리가 세상적으로는, 사회적으로는 을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고 그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갑들이 자기 권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내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날고 뛰고 발버둥을 쳐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고 우리를 좌절시킬 수 없고 우리의 임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들은 하나님 손 안에 있고, 우리는 그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
두번째로, 이 보내심의 시작점은 분명 하나님이시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본문 가운데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 예수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죽음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또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우리를 보내시는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 우리가 보냄받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무를 주셨다고 했는데 그 임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시는 분이시며 또한 동시에 우리가 보냄받은 목적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시면서 “나의 증인”이라고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아가서 이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보내셨어. 예수님이 나를 보내셨어.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야.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끝,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라고 생각하지만 여기 그 죽음을 이기신 분이 있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야.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너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 돌아가신 죄 없으신 예수님은 그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분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세상 속에서 성공하는 법이나 부자가 되는 법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자아를 성취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가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갈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경쟁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지가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도 아니고 철학과 문학, 과학도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의 값을 지고 죽으셨고,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메시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 23-24)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로마서 1:16)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주식투자에 성공하는 비법을 알고 있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주식투자 비법은 완전히 놀라운 성공의 비법이라서 누구든 이 말을 듣고 따라하기만 하면 원금의 두배를 벌 수 있는 비법입니다 .이 비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비법을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그 비법을 알려주는 것에 상대방이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비법에 대해서 당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주식투자를 통해서 원금의 두배 정도를 버는 시시한 비법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천국을 주는 것입니다. 완전히 뱅크럽되어서, 완전히 파산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만한 어떤 능력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는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보내지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실 때 우리는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메시지는 그들을 위하는 메시지 이고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져가는 메시지 이며 그들을 살리는 메시지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우리가 평강, 샬롬 가운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제자들에 평강, 샬롬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강, 샬롬은 어원적인 의미는 원래 완전하다, 온전하다, 꽉찼다라는 뜻입니다. 샬롬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든 것이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길을 잃었고 그들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숨어 있었고 혼란스러웠고 슬픔에 쌓여 있었고 낙망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에서 부족했습니다. 자신감이 부족했고, 소망이 부족했고, 믿음이 부족했고, 기력이 부족했고,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말 그대로 샬롬을 경험했습니다. 샬롬, 완전함, 온전함, 채워짐을 경험했습니다 . 그들은 길을 찾았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살아졌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하여 졌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소망이 넘쳤고, 믿음이 넘쳤고, 힘이 넘쳤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평강, 샬롬 가운데서 보내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족한 모든 것이 채워지고, 그들의 연약했던 모든 부분들이 강하여져서, 그들의 불완전했던 것이 완전하여져서 보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을 때 우리에게는 평강, 샬롬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부족이 채워지고 우리가 강하여지고 우리가 완전하여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작년에 제가 갔던 그리고 올해도 가는 텍사스 단기선교의 경험을 잠시 나누기 원합니다. 선교 날짜가 다가오면서 계획된 선교 훈련을 다 마쳤습니다. 그 마지막 훈련을 마칠 때 느낌이 어떤 것이었냐면 아 한달정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부족한 게 많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름 한다고 열심히 준비했지만 마지막이 가까워 보이니까 부족한 것 투성이였던 것입니다. 아직 준비되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심지어는 어떤 것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우리에게 한달이 더 주어진다고 하면 온전하게 아무 문제 없이 다 준비해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주 주일에 일기예보를 보고 텍사스 날씨를 확인해보니까, 단기선교가 시작되는 첫날부터 텍사스에 비가 올 것이고 선교 기간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텍사스 선교팀은 정말 많은 프로그램을 야외에서 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했고 플랜 비가 없습니다. 플랜 비, 비올 때 플랜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 가도, 준비해 간 것이 다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선교 한주 전에 그런 날씨 예보를 보고서 선교팀원들에게 이야기하자 선교팀원들이 다들 걱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선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평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인데 그깟 비가 문제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패배를 부활이라는 완전한 승리로 바꾸신 분인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그러면 정말로 안될 것 같고 정말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실제적으로 우리가 준비한 것들을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되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실한 사역이 될지라도 그래서 그곳에 가서 5박6일동안 기도만 하고 올지라도 우리 눈에 완전히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능히 그 모든 실패를 통해서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성공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날씨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엄청났습니다. 텍사스는 우리가 사는 뉴저지보다 더 남쪽에 있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뉴저지보다 기온이 높습니다 여름에는 100도를 훌쩍 넘어가는 날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 텍사스 팀이 그곳에 가있는 선교기간동안은 흐린 날씨 그리고 아침에만 잠깐씩 내리는 비 덕분에 너무나 시원한 날씨 가운데서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화창한 날씨를 달라고 했는데 그랬다면 정말 너무 더워서 모든 사역에 참여도 적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뭐라고 기도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완전히 채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줄로 샬롬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채워지고 우리의 약함이 강함으로 변하고 우리의 불완전함이 완전하여질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사역지로 나아갈 때도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직장, 일터, 가정, 우리 동네로 나아갈 때 울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그 사역지로 보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압니다. 그곳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점투성이고 허접한지를 …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평강 가운데, 샬롬 가운데 보내십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완전함을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실 때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가신다.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정과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샬롬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만 보내놓고 니들이 알아서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나님은 예수님은 또한 성령님을 우리를 보내시면서 또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선교지로 나아갈 때, 여러분의 직장, 학교, 일터, 안 믿는 친구들의 모임에 나아갈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 인거 같고 홀로 남겨진 것 같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을지라도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보내시고 예수님이 보내시는 이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