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3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 고후12:5~10 / 김소명 목사

20170723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 고후12:5~10 / 김소명 목사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장 5-10절)

 

여러분은 야구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야구를 참 좋아합니다.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야구가 신앙 생활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야구는 다시 홈으로 돌아와야 점수를 얻는 경기 있습니다. 아무리 안타를 치고, 도루를 하고, 여러가지 작전을 사용한다고 해도 홈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점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독과 선수들이 가장 집중하는 일은 홈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의 득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어진 기회가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공격과 수비가 번갈아 가면서 게임이 진행되고, 그리고 똑같이 9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야구에서는 타율이 높다고 더 많은 기회를 부여 받는 것도 아니고, 방어율이 높다고 더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 주어진 기회 안에서 공평하게 진행되는 것이 야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많이 배웠던 못 배웠든, 높은 자리에 있든 그렇지 않든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하며, 모두가 주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죄인일 뿐이다.

세번째로, 야구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야구는 9명의 선수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지만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야구에서 물론 하이라이트는 만루 홈런일 것입니다. 그러나 야구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면, 홈런만큼이나 짜릿한 플레이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멋진 수비를 보이는 일이요, 그 중에서도 당연 으뜸은 병살, Double Play입니다. Double Play는 하나의 공으로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는 경우를 말합니다. 더블 플레이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특별히 유격수에서 2루수로, 그리고 다시 1루스로 이어지는 643 더블 플레이를 보면, 정말로 10년 묵은 채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동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혼자 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서 동역 하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옆에 있는 지체들과 함께 동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주님께도 믿는 지체들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 마치 더블 플레이를 보는 것과 같은 기쁨을 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구에서는 9회말 투아웃에도, 역전 기회는 언제나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인 요기 베라가 이런 유명한 남을 남깁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이는 한국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구는 아무리 9회말 투아웃까지 몰려도, 역전 만루 홈런의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에, 끝까지 집중하여 보게 되고, 실제 그렇게 역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야구를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만든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또한 어떠한 분이십니까?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다 끝난 것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기대와 소망이요, 절망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만이 갖는 유일한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요즘 메이저리그에서 주목을 끄는 한 선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마이애미 말리스 파크에서 열린 2017년도 메이저리그 홈런 더비에서 우승을 차지한 뉴욕 양키스 소속의 애런 저지라는 선수입니다. 요즘 애런 저지는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타자 베이브 루스와도 비교될 정도입니다.

작년에 처음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그는 179의 타율 그리고 홈런 4개라는 아주 초라한 성격으로 시즌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가 모든 이들의 주목을 끄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데뷔 2년차 되는 올해는 시즌을 이제 절반을 조금 넘긴 시점에서 벌써 홈런 31개, 313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각종 기록에서 단연코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선수에 대해 주목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이런 놀라운 성적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한 설교의 시간에 이 선수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 선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애론 저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그 동안 보인 모습은 그가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 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넓은 메이저리그의 스트라이크 존에서 그의 큰 덩치는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 양키스 구단이 그를 소중한 1라운드 지명권까지 써가면서, 택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인성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양키스 구단은 드래프트에 앞서 추리고 추린 약 125명의 선수들을 대상으로 인성적은 측면을 검사하며 또 심층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만약에 이것을 거부하면 자동적으로 드래프트 후보에서 제외가 됩니다. 애론 저지는 그동안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였지만, 이 인터뷰에서 어떤 특별하고 강렬한 인상을 구단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봤더니, 그가 가진 특별한 삶의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입양된 일이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저지는 태어나자 마자 낳아 주신 부모님의 손을 떠나게 되었고, 지금의 부모인 패티와 웨인 저지 부부에게 입양 됩니다. 그리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부모에게 깊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 받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저지를 입양한 부모는 백인이었는데, 저지는 그의 외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라토라고 불리는 흑인과 백인의 혼열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저지에게는 큰 아픔이었고, 큰 상처였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 어렸을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어렵게 지내가다, 결국 미국에서 추방되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입양이라는 것이, 그리고 인종이 다른 가정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런 저지는 훌륭한 인성을 갖은 준수한 청년으로 자라게 되었고, 그것을 양키스 구단이 인정하여 그 선수를 지명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가 이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애런 저지의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앙의 힘이요, 믿음의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까? 우리가 강할 때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걱정이 없고, 염려가 없고, 그래서 기도할 제목이 없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어떤 타이어 회사의 광고가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광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도시를 질주하던 자동차가 갑자기 급제동을 합니다. 아무래도 앞에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급제동을 하였기에 자동차는 앞으로 밀리게 되었고, 그 상황 속에서 이런 광고 멘트가 들립니다. “자동차가 한계를 만날 때 비로소 타이어의 능력은 시작된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경험하게 됩니까? 우리의 능력이 한계를 만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그것을 깨닫게 됩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의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8가지의 복을 선포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흔히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선포된 자리에 가보면 팔복 교회라 불리는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팔복 중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말씀을 언뜻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가 충만한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풍성한 것입니다. 물질도 풍성하고, 주위에 사람도 많고 그래서 인간 관계도 좋고, 몸도 건강하고, 행하는 일마다 잘 되고 뭐 이런 일들을 우리는 보통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것을 복이라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뭔가 풍성하고 풍족하고 넉넉하고 풍요로워야 복일 것 같지만, 믿음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세상에서 풍요로우면, 그것 때문에 주님을 바라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풍족하면,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넉넉하며, 주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군목으로 사역할 때 일이었습니다. 선배 군목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전역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자기가 가난한 전도사 시절을 보내고, 이제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으로 군대에 와 보니, 군목도 군인이고 장교니까 나라에서 때가 되면 따박따박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 오더랍니다. 가난한 전도사 시절에는 그렇게 기도가 잘 되었는데,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가 안 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기 위해 과감하게 전역한다던 그 말이 아직도 제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어카운트에 캐쉬가 풍성하면, 어려울 때 하나님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을 경험합니까? 어카운트도 텅텅 비어 있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고, 세상에 붙잡고 의지하고 바라볼 것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주님을 향하 고개를 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5절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지금 무엇을 자랑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강점을 이야기 합니다. 요즘 자기 PR을 잘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PR은 Public Relation의 약자인데 보통은 한국말로 홍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또한 이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자기 홍보란 PR, 즉 P 피할 것은 피하고, R 알릴 것은 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점은 최대한 들어내고, 단점은 최대한 감추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약점이 자기가 자랑할 이유가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7절과 8절의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은 사례를 제시합니다. 바울에게는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안질이라고 말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이 간질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바울에게 이것은 치명적인 상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을 보면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합하여 대략 걸어서 지구를 반 바퀴 정도 도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여행을 했던 터키 지역은 험악한 산악 지역이었습니다. 아주 건강한 사람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몸에 병이 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더욱이 복음을 전할 때도 얼마나 방해가 되었겠습니까? 어느 지역에서 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의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데,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면서 땅에 뒹군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예수 너나 믿어라!’ 하고 비아냥거리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위해 8절에 보면 세 번이나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바울은 7절에 그것은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낙담이 됩니까? 얼마나 절망하게 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일로 바울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이 일로 바울이 더 주님을 의지하도록 이끄셨습니다.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 놀라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약할 때 주님을 의지하였더니, 그것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일으키는 힘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9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어려움을 당해도, 절망과 낙심과 근심의 상황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일을 통하여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오직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시고 감당하시는, 그래서 능히 이기게 하시는 예수의 능력이 나의 유일한 소망임을 그 모든 일들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주님의 은혜를 또한, 지금 고린도후서의 대상이 되고 있고 있는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 지역에 1년 반을 머물려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교회였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지역에 머물렀을 때도 고린도 교회를 걱정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그런 후에도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제자인 디모데를 보내 고린도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디도데로 부터 듣게 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은 우상숭배와 음행과 거짓 교사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바울이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고린도후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방문한 그 다음에 쓴 편지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근심하지 않겠다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그 당시에는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근심했습니까? 그 당시에 바울을 원색적으로 공격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일로 큰 상처를 받고, 어쩔 수 없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가 면전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으로 다가왔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 어려움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대하며 나가아겠습니다. 그래서 한 행동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다시 편지를 쓴 일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쓴 편지인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어떠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지는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인간적인 마음이라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비난하고 공격한 사람들을 향하여 어떻게 풍성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눈물로 편지를 썼겠습니까?

그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그 편지를 고린도 교회로 보냅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편지는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 지역인 에베소에서 쓴 편지인데, 그곳에서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본인이  직접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빌립보를 지나 고린도 근처인 데살로니까까지 갑니다. 그럴 거면 자기가 직접 들고 가지 왜 디도에게 편지를 대신 전해 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머물고 있는 바울에게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고 왔는데 고린도 교회가 바울은 진심어린 편지를 읽고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고린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는데, 자기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고린고 교회를 회개하게 하셨으니,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0절 말씀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주의 능력으로 인해) 강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께 버림을 받고, 또 여러가지 차별과 고통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고난을 겪고, 때로는 이유 없이 모함과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게 하는 유일한 힘은 무엇입니까? 이미 나와 함께 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승리한 비결이요, 우리 믿는 자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능히 그것을 견디며 이기며 그 안에서 빼앗길 수 없는 기쁨과 소망을 더는 비결입니다.

약할 때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삶 속에서 바라보시고, 의지하시고, 붙잡으심으로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