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30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 욘4:1~11 / 김소명 목사

20170830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 욘4:1~11 / 김소명 목사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욘 4:1-11)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조금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 제목은 제가 직접 생각을 해서 지었다기 보다는, 어떤 책 제목을 인용한 것인데요, 원래 이 책의 영어 제목은 Surprised by Grace(은혜의 의한 놀라움), 부제는 God’s Relentless Pursuit of Rebels(반항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끈질기 추격)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면서 제목이 “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로 바꿨습니다. 아무래도 책 제목이 너무 평범하면, 사람들이 책을 잘 쳐다보지 않으니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이런 보다 자극적인 제목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제목을 갖다 붙인 것은 아닙니다. 요나서 4장 1절를 보십시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까? 싫어했고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책 제목을 지은 것입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툴리안 차비진 목사님이 요나서를 중심으로 쓴 것인데요, 그의 목회적 여정을 보면 요나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차비진 목사님은 지금 미국 플로리다 주 코럴릿지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는 주목받는 차세대 목회자 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 영적 스승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외손자이며, 그의 이름도 주후 3세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교부인 터툴리안에서 따 온 것입니다.

1972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믿음의 가문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나, 10대 시절에는 요나처럼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며, 오랜 영적 방황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스물 한 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그를 향하여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책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를 끝까지 추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한 그는 자신이 요나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요나서를 중심으로 한 자기 고백적인 책을 저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우리도 이와 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관심하거나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닐지라도,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우리 크리스찬들이, 때로는 차비진 목사님이나 요나처럼, 하나님이 싫어 질 때, 그래서 하나님 곁에서 도망치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질 때]

한 기독교 신문에서 한 자매와 상담한 전도사님의 사연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한 자매님이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오랜 기간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온 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고, 중국에서도 꽤 알려진 대학에서 유학을 생활을 했습니다. 영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잘하고, 외모도 뛰어나고, 성격도 성실하고, 신앙도 좋으니까 취업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을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와 상담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고 아픔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든 것은, 한 해 전 미얀마 선교를 다녀온 후부터 인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취업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넣어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면접은 커녕 1차 서류 심사도 통과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럴 수도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하였지만,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이 되자 소위 “맨붕”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는 자매가 너무나도 안스러워, 찾아가 전도사님이 이런 위로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매님을 연단하고 계시나봐요. 우리 기도하면서 기다려봐요. 연단이 끝나면 하나님이 반드시 취업의 문을 열어 주실 거에요.”

그러나 그 믿음 좋고 성실하고 항상 긍정적이던 자매는 이렇게 대답 하더랍니다. “저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이 싫어요. 지금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고요. 이렇게 사는 게 지긋지긋하고 현실이 시궁창같네요. 이렇게 말하는 제 자신도 싫고요.”

이 자매의 고백이 저만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건가요? 혹시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생각과 마음이 중심에 자리잡을 때가 혹시 있지는 않으셨는지요? 바로 요나서에 담긴 요나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았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진정성]

우리는 요나서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아주 쉽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수준의 내용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참으로 동화같이 느껴집니다. 등장하는 요나의 모습도 청개구리 같고, 또 그를 달래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동화 속에 등장하는 포근하고 따뜻한 전형적인 어머니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를 실제로 있었던 내용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 주기 위해서 특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요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구약과 신약에 많은 영향을 준 책입니다. 우선 요나의 이름이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그래서 이 말씀을 기준으로, 요나 선지자의 활동을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함 2세 때로 보고 있습니다.

또 요엘서 2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그런데 이 구절이 어디에 등장합니까?

우리가 읽은 요나서 4장 2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요나서가 요엘서보다 더 먼저 존재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엘 선지자가 요나서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내용을 인용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신약으로 넘어와서 누가 요나서를 알고 계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요나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여러 번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이라는 뜻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염두해 둔 표현입니다. 만약 요나서를 꾸며 놓은 이야기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우리 주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의미가 될 수 있으니, 요나의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관계]

이렇게 동화와 같이 재미있는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를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시작합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문제는 니느웨라는 도시가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싫어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조국은 72주년 광복절을 맞이했습니다. 35년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광복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내면에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일본을 향한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일본 놈이라고 합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한국의 어느 버스 회사가 버스 안에 노녀 상을 두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버스는 일본 대사관을 지나가는 버스인데 일제시대에 강제로 끌려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위안부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시행한다는 것이 버스 회사 측의 설명이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 개봉한 군함도나 박열이라는 영화를 보면 당시에 조선인들이 얼마나 처절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박열이라는 영화를 보면 간토 대지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지진으로 인해 일본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만이 쏟아지자 그 화살을 일본 땅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돌립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학살을 당합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터질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앗수르는 쉽게 용서할 수 없는, 생각하면 10년 전 먹었던 송편이 아직도 속에 얹혀 있는 듯한, 아니면 혈압이 분기탱천하여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은 그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아주 잔인한 민족이었고, 끝임없이 북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기원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그러니 요나가, 자기 민족을 그렇게 괴롭히고 핍박하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나 보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그 다음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의 방향과는 정반대인 다시스라는 곳으로 도망가기 위해서 배에 몸을 싣습니다. 지도를 보면 다시스는 니느웨로부터 몇 배 떨어진 정 반대에 위치한, 지금으로 말하면 스페인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당시는 스페인을 땅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도망을 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한 것입니까? 불순종한 것입니다.

더욱이 4장 1절에 보면 요나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4장 1절에,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해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않기로 결정하자, 하나님을 향하여 큰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요나의 모습]

그런데 요나의 모습이 그리 낯설거나 어색하기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나의 모습 속에서 누구의 모습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요나의 이름이 요나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나를 읽다 보면 누구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를 읽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까? “요 나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닌 것 아시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왜 맨날 나에게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만 하라고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은 제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계속 그렇게 지켜 보고만 계실건가요?” 이런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 때로는 요나처럼 하나님께 화를 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요나처럼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반대하고, 섭섭해 하고, 때로는 화를 내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하나님이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 안에 어떤 근본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 대답을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일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섭섭해 하고, 때로는 요나처럼 주님께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내가 감히 주님을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만, 여러분 주님이 크십니까? 내가 큽니까? 주님이 옳으십니까? 내가 옳습니까? 시편 40편 5절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가 도저히 주님의 생각과 뜻을 알 수 없고 감히 우리가 주님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장 그 길이 살 길 같은데, 주님께서 그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지, 살 것 같은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천길 낭떨어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는 그 길이 죽음의 길 같아요. 그런데 주님이 “가라!”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생각하지요. ‘주님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 내가 주님을 그렇게 믿었건만, 주님께서 믿는 도끼에 제대로 발등을 찍으시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지,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그 길 끝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에덴의 축복이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로 간 빌립 집사]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 보면 초대 교회 일곱 집사님 가운데 빌립 집사님이 복음을 증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의 사자가 빌립 집사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복음을 증거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빌립 집사님을 광야로 내모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빌립 집사님이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며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누가 있었습니까?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님은 그 고위 관료에서 복음을 전했고 결국 그 사람에 세례까지 베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일을 빌립 집사님을 통해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과감한 투자]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요나를 사용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일을 할 때, 전적으로 여러분의 의견을 따라주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마음에 안 들면 토라지고, 자꾸 딴지 놓고, 퍽하면 도망갈 생각이나 하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불만쟁이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요나의 이야기를 보면 요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먼저 누가 고생합니까?

요나서 1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자 애꿎은 배가 부서지고 또 그 배를 탄 사람들이 고생을 합니다.

또 누가 고생을 합니까? 요나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여러분! 큰 물고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요나가 불순종하니까 큰 물고기가 먹지도 못하는 것을 삼일 동안 삼키고 있다가 결국에는 토해냅니다. 어떤 성경 동화책에 보면 요나가 그 물고기 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연기가 가득하니까 참지 못하고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는 그림도 있습니다. 큰 물고기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또 4장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우리는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떤 말을 합니까? “대박나세요” 그런데 잘 자라고 있던 박넝쿨이 요나 하나 깨닫게 하자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손해입니까? 굳이 요나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요나에게 ‘너는 너 갈길 가라 너 없어도 내 일을 도와줄 사람 많으니까 너는 그냥 네 길을 가라. 나는 너에게 복을 주려고 하는 것인데 네가 그렇게까지 거부를 하면 나도 큰 손해를 보면서까지 너를 붙잡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를 위해서 배도 파손시키고, 큰 물고기도 고생시키시고, 또 박넝쿨도 시들게 하신 하나님께서 또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더 큰 손해를 감수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나를 위해 행하신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나 하나 살리시고 나 하나 돌이켜 쓰시고자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을 보십시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분의 찢기시고 상하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 죄악의 도시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으며, 그리고 못난 우리를 끝까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요나서 4장 11절이 그 해답의 힌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이사야 42장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요, 긍휼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통해, 요나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했던 것이고, 또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도 그 사랑을 깨닫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니느웨만 악한 도시입니까? 요나는 어떤가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악이 하나도 없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완전한가요? 그러나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서 누구도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까? 요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실 뿐더라 누구도? 마찬가지로 죄 많은 허물 많은 “요 나”도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무엇도 아끼지 않고 구원의 놀라운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분의 사랑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 말씀에,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요나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반항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화를 낼 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까? ‘엄마가 내 마음 알아?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꺼야!’ 그리고 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야! 너만 딸이냐? 길거리를 나가 봐라 쌔고 쌘 것이 딸이다. 내가 너 포기하고 다른 애 데려다가 딸을 삼을꺼야’라고 말하는 엄마는 없지요. 딸의 반항에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문드러져도, 그래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딸이 잘 되기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 인 것처럼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여 요나처럼 “요 나”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나 하나 살리자고, 고집스럽고 어리석고 미련하기까지 한 “요 나”를 살리자고, 이 땅에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놀라운 계획을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순종하여,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은혜, 주님이 준비하신 그 축복을 함께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