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2 두개의 신분 / 창 40:1~15

20171112 두개의 신분 / 창 40:1~15

창 40:1-15/두 개의 신분

171112 주일설교 요셉

맹의순 전도사

1988년 작가 정희연 씨가 발표한 ‘내잔이넘치나이다’는 맹의순 전도사의 일대기를 그린 실화소설입니다. 1926년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24세의 청년 맹의순 전도사는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중 6.25 발발로 피난길에 오르지만 공산군으로 오인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에 갇힙니다. 피난길에 오른 주민이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믿지않는 군당국의 자세에 좌절하였지만 그 곳에 갇히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고 풀려날 때까지 포로들을 돌보기로 작정합니다. 수용소의 천막병원에서 미군의사들의 통역을 하며 부상자들을 돌보고 주일에는 교회를 섬겼습니다. 일이 익숙해 진 후 그는 일과 후에 자유롭게 부상자 천막을 다니며 심방하고 전도를 할 수 있도록 병원당국의 허가를 받습니다. 심방 첫 날 저녁 외과병동천막을 들렀을 때 북한군 부상자들은 그를 보고는 진통제와 약을 달라고 웅성거립니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저는 먹거나 바르는 약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치료할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어드릴테니 그냥 누운 채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맹의순은 눈을 감고 고요하게 찬송을 시작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그러나 1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시끄러워! 집어치워!” 전투 중에 오른팔이 잘린 북한군 장교가 병상에서 몸을 돌린 채 천둥같이 소리를 지르고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멍하니 있으려니 다리가 잘린 한 소년병이 다가와 그를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일어나세요. 저 분은 외로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저도 같이 부를테니 함께 찬송해요. 지금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실 거예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그의 병동천막심방은 그 날부터 매일 계속 되었습니다. 위로와 은혜를 얻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고 비아냥대고 적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맹의순 전도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종이었습니다. 한편 세상적으로는 그저 수용소에 갇힌 포로일 뿐이요, 공산군에게는 미움과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영적 신분과 세상적 신분의 불일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의 운명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요, 영광스러운 사명자라고 부르지만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도 하고 오해를 받고 심지어 미움을 받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성도는 어느 신분을 따라 살아야할 지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데 신앙이 없는 사장님으로부터는 별 것 아닌 존재인듯 무시를 당하며 살기도 합니다. 진리를 좇아 산다고 믿는데 21세기에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느냐며 편협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조롱을 듣기도 합니다. 신앙을 지키려고 애쓰는데 네 앞가림이나 하고 가족들에게 피해나 주지 말라며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내가 잘 사는 것인가,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불안과 혼란을 겪고 있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위대한 신앙인인 요셉도 겪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분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도 24세 쯤 되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맹의순 전도사처럼 말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했듯 간수장도 요셉을 신뢰하여 감옥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감옥총무(?)를 맡깁니다. 얼마 후 바로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함께 옥에 들어오고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들을 섬기도록 임무를 줍니다.  예나지금이나 권력자들은 감옥에서도 일반인들과 달리 여러 가지 혜택을 봅니다. 이들은 단순한 주방책임자 정도가 아닙니다. 바로의 왕궁 전체의 음식을 관장하는 관리로서 고대 왕들은 늘 독살의 위협에 시달렸기에 가장 신임하는 이들에게 이런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들이 적들과 손을 잡으면 왕은 꼼짝없이 목숨을 잃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옥에 갇힌 지 약 4년이 지났을 즈음 이 두 관리가 해석할 수 없는 꿈을 꾸고 걱정하는데 요셉이 이를 해석해 줍니다. 이 때 요셉의 영적 신분과 권위가 드러납니다. 7절입니다.

(창 40: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요셉이 그저 노예일 뿐이라면 보디발이 시킨 대로 그 관리들의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신경쓸 필요도 없고 신경 써서도 안 됩니다. 어디 감히 노예 따위가 이런 고위관리들의 문제에 끼어들 수 있단 말입니까? 제까짓 것이 무엇이라고 이런 권력자들의 고민거리에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요셉은 지금 그저 노예의 하나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사명을 띄고 이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명은 그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것입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요셉은 지금 일개 노예가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사명을 품고 그들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요셉이 증조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함으로써 역시 세상을 축복하는 성도가 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과 동료와 고객을 대할 때 이런 사명과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대할 수 있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권위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그들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요구합니다. 8절입니다.

(창 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여기서는 요셉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두 고위관리는 지금 뿌리칠 수 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의 권력과 부는 이 걱정과 근심을 해결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요셉은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언하는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영적 권위를 가집니다.

성도의 권위는 여기 있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고 성공한 것은 권위가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부자되고 성공합니다. 그러나 부와 권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의 참된 권위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 분의 복음이요,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소유한 성도는 권위를 가집니다. 그 권위는 성도의 믿음과 기도와 축복으로 드러납니다. 교만한 이들은 여전히 조롱하지만 겸손한 이들은 미음과 기도와 축복의 권위를 가진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성도의 현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관리는 요셉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모두 털어놓고 도움을 구합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줍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또 하나의 신분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세상의 신분입니다. 이것은 그리 대단하지 못 하기도 하고 심지어 세상에서 멸시받는 신분이기도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4-15절입니다.

(창 40: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창 40: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여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들을 축복하는 자로서 그들을 염려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순간 권력자들의 은혜가 필요한 노예요, 죄수일 뿐입니다. 그는 간절히 감옥에서 나가고 싶지만 몇 년 째 뜻을 이루지 못 합니다. 그는 이집트에 끌려와 노예가 된 것도 억울하고, 이 감옥에 들어와 죄수가 된 것도 억울하지만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하는 무기력한 자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남의 나라에 이민와 사는 소수민족입니다. 때로는 차별받고 무시받는 유색인종입니다. 신분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경제적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으로 늘 짓눌려 살아가기도 합니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지만 부부문제도 자녀문제도 해결 못 하고 끙끙댑니다.

 

성도의 비전

도대체 무엇이 진짜 우리의 모습입니까?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하늘의 신분입니까? 온갖 문제로 끙끙대는 보잘 것 없는 땅의 신분입니까? 답은 둘 다입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성도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후 6:8-10입니다.

(고후 6:8)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성도는 땅의 신분과 하늘의 신분으로 모두 살아간다는 말인데 이 중에서 압도적인 것은 하늘의 신분이라는 말입니다. 왜 하늘이 신분이 더욱 압도적인 것입니까? 땅의 신분은 잠시 동안의 것이지만 하늘의 신분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요셉과 이 관리들의 처지가 보여줍니다. 창 41장에 이르면 노예이자 죄수이며 이 관리들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보잘 것 없는 요셉의 신분이 어떻게 변하게 됩니까? 41:41입니다.

(창 41: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창 41:43) …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요셉 앞에 엎드린 이집트의 모든 백성 중에는 그가 수종들고 부탁했던 술관원도 있었고 그를 감옥에 넣었던 보디발도 있었고 그를 모함했던 보디발의 아내도 있었습니다. 극적인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런 역전이 일어날 것이고 그 역전은 영원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9:28입니다.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신분이요, 운명이요, 비전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섬기던 모든 이들을 반대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잘 것 없던 성도들이 세상을 축복하는 참된 부와 참된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멸시받던 성도들이 세상이 본 적 없는 영광에 둘러쌓이게 될 것입니다. 이 비전을 가진 이들은 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갑니다.

 

하늘의 신분으로 사는 성도

맹의순 전도사는 포로수용소 안에서 광야교회를 세워 중공군 포로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소식을 들은 남대문교회 배명준 목사가 이듬해인 1951년 석방수속을 밟았으나 그는 전도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석방을 거부한 채 전도와 봉사를 계속 하였습니다. 1952년 8월 11일 과로와 뇌막염으로 상한 몸으로 중공군 환자들을 씻기다가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 했습니다. 맹의순 전도사의 추도예배에 중공군 포로들이 바친 가슴 아픈 편지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별로 관심갖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

맹의순 전도사는 포로라는 땅의 신분이 아니라 천국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늘의 신분으로 살다가 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도 모두 하늘의 신분으로 살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