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4:16-17/올라가냐 내려오냐
171217 대강절 3주
설렘과 의문
오늘 저는 여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지난 주 설교를 마친 후 제 기억으로는 제가 설교한 중 가장 뜨거운 교인들의 반응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신선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설교였다, 진작에 했어야 했다, 오랜 고민이 해결되었다 등의 긍정적인 반응이 있는가 하면 왜 심판은 말하지 않았느냐, 위험한 설교였다,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느냐 등 우려 섞인 반응도 없지 않았습니다. 다 부활해서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면 좁아서 어떡하느냐, 부활의 몸은 어떤 형태가 될 것이냐 등 파생되는 질문도 쏟아졌습니다. 변명부터 한 마디 하자면, 지난 주 설교에서는 짧은 시간에 성도의 궁극적 소망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리느라 많은 설명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시리즈 설교를 준비했습니다만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지난 주 설교의 A/S 설교와 시리즈 설교를 해보려고 합니다. 의문이 생기면 주저하지 마시고 오늘 구역모임에서 토론하고 구역일꾼들을 통해 교역자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의 이메일로 바로 질문하셔도 됩니다.
바른 가르침이냐
먼저 지난 주 설교가 우리 교단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느냐? 왜 위험한 설교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는 천국, 낙원, 부활, 새하늘과새땅의 네 개의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성도 여러분들이 놀랍게 여기고 또 우려하신 부분은 새하늘과새땅이 저 하늘 어딘가가 아니라 이 땅에 임할 것이고, 이 땅이 폐기될 것이 아니라 회복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문제들을 조금 미루어 두고 오늘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는데요, 이에 대해 우리 교단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해외한인장로회를 포함한 개신교 장로교단의 교리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 것을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세 가지로 꼽습니다. 여기서 신경, 신조 그리고 신앙고백은 모두 같은 의미로 교리를 가리킵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모두 초대교회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인데 그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1643년 영국 교회 지도자들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모여 5년 여에 걸친 회의 끝에 작성한 깔뱅주의 개혁신앙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서입니다. 우리 교단은 이 중 사도신경과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을 헌법에 싣고 신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성도의 소망에 관한 표현은 다음과 같이 무척 짧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기록된 부분은 다음이 전부입니다.
‘제 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2. 마지막 날에 살아남아 있는 자는 죽지 않고 변화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전과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 부활체는 질적으로는 전과 다를 것이나, 영혼은 이 육체와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영원토록 어디서 계속되느냐?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디냐? 여기에 대해서는 이 신앙고백서에 더 이상의 묘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교단교리가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답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왜 굳이 이 문제를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쓰느냐? 천국이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미 새하늘과새땅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가 성도들의 머리 속에 들어와있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현실의 삶의 가치를 절하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이 궁극적 소망에 대해 바른 가르침을 주기를 주저하는 사이에 이단사설들이 온갖 그릇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한 번 다루고자 하는데요, 휴거와 666, 베리칩 등을 내세우는 세대주의 종말론, 자유주의의 영향인 만인구원론, 여호와증인 등의 영혼멸절설, 카톨릭이 가르치는 연옥 등 많은 비성경적 종말론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새하늘과새땅에 관한 묘사가 성경에 분명히 있고 성경이 말하는 수준까지는 마땅히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와 완성된다는 가르침은 지난 주에도 보셨지만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 의해 뒤받침되고 있고 방금 보신 우리 장로교단의 신앙고백과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단지 전통적인 천국이해와 다르기에 우려를 살 수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어느 입장이 더 성경의 뒤받침을 받느냐이지, 얼마나 더 오래 되었느냐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올라가냐 내려오냐
다음으로 새하늘과새땅은 저 하늘 어딘가가 아니라 이 땅에서 완성된다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땅에 폐기되지 않고 회복될 것이냐는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인용했던 그 많은 성경구절들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과거에 완성된 천국이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 어딘가에 있다고만 믿어왔을까요? 또 우리 중 어떤 이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이미 설명드린 것처럼 물질로 구성된 이 세상을 저급하거나 악하거나 혹은 허상이라고 보는 헬라의 이원론, 페르샤의 조로아스터교 등의 영향이 기독교 안에 오랫동안 스며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늘이란 단어가 주는 오해입니다. 성경의 하늘이란 단어를 읽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땅과 대비되는 저 위의 어느 공간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 오해에 대해 지난 주의 천국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바로 잡아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설교 말미에 다시 다루어 보겠습니다.
셋째는 아래의 구절에 대한 오해가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아마 이 구절 때문에 땅에서 새하늘과새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갇됩니다. 20세기 초반에 부흥한 근본주의 기독교는 문자적인 성경해석을 통해 이 구절을 근거로 휴거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치는 소설과 해설집을 널리 퍼뜨리는데 크게 성공했습니다. 근본주의 계열의 선교사들이 한국선교에 앞장 섰고 그 결과 대부분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저 하늘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 때 666, 휴거 등을 다루는 책을 몇 권이나 사서 읽으며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곧 휴거될 것인데 과연 계속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이런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은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권 학자들과 교회에서 거부되고 있습니다.
끌어올려진다는 것은
먼저 성경 전체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들려올라간다는 구절은 이 곳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모든 주석가들이 이 구절은 다니엘서 7:13의 묵시언어를 인용한 비유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단 7:13) 내가 또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묵시언어라는 것은 곧 비유라는 말입니다. 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진다는 표현은 그럼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초월에 대한 비유입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주석인 Word Biblical Commentary 중 데살로니가서를 맡은 F.F.부르스 교수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특별히 묵시문학에서 두드러지는 올라가다, 내려오다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초월과 겸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독일성서공회가 발행한 해설성경에서는 살전 4장 위의 구절에 대해 이렇게 해설합니다.
‘살아 남은 자들이 공주에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간다는 것은 그들이 지상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변화가 된다는 것을 표시한다.’
즉 주님에 의해 끌어올려졌다는 것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이지, 땅에서 하늘로 공간적 이동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성경 고린도전서 15:51-52입니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데살로니가서와 고린도서는 모두 바울 사도가 썼습니다. 똑같이 마지막 나팔소리를 듣는데 데살로니가서에서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지고 고린도서에서는 변화를 받습니다. 즉 끌어올려지는 것은 그 몸이 변화받는 것에 대한 비유라는 의미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그러면 왜 하필 사도 바울은 하늘에서 오시는 주님을 땅에서 공중으로 올라가 영접하는 비유를 썼을까요? 이에 대해 주석서 Interpretation 데살로니가서편의 저자인 프린스턴 신학교 신약학 비버리 로버츠 가펜타는 이렇게 씁니다.
‘이 구절에서 영접이란 단어 아판테시스는 지도자의 공식방문이나 전쟁영웅의 귀환 시 쓰인다.’
즉 예수님을 지도자나 영웅을 영접하듯이 성도들이 영접한다는 뜻인데요, 그들을 어떻게 영접할까요? 이에 대해 ‘마침내드러난하나님의나라’에서 저자 톰 라이트는 이렇게 덧붙힙니다.
‘로마 황제가 식민지나 지방을 방문하게 되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도시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까지 나가서 그를 영접하게 된다. 백성이 영접하기를 귀찮아하면서 황제가 성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냥 있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즉 성도가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뜨겁게 영접하기 위해 구름 위로 올라가 그 분을 영접하여 땅으로 모시고 오는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4장의 이 구절을 성도가 땅을 버리고 하늘 저 어딘가에 있는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오신다는 것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더 나올 수 있습니다. 성도가 구름 위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비유라면 예수님이 이 땅으로 오신다는 표현은 비유가 아닙니까? 네, 그것 역시 비유라는 데에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무엇에 대한 비유입니까? 요일 1:28을 보십시오.
(요일 1:28) …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파루시아)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예수님이 강림하신다, 헬라어 파루시아는 현존하다, 나타나다는 뜻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내려오시기도 하시지만 그냥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즉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심은 그 분의 나타나심과 같은 사건입니다. 즉 내려오심은 나타나심의 비유라는 말이지요. 이에 대해 톰 라이트는 데살로니가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내려오신다’고 말할 때 바울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우리 위에 있다고 가정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계신 하늘은 우주 안에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바울은 단지 예수님이 ‘나타나신다’고 말한다.”
하늘은 저 위가 아니라 영의 세계라 불리는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위에서 땅으로 내려오신다는 말씀은 영의 세계에 계시다가 물리 세계에 출현, 나타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저기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물리세계와 겹쳐져있는 영의 세계에 계십니다. 물리세계와 그 영의 세계는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심으로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 우리는 영의 세계에서 물리세계로 들어오시는 부활하신 육체의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새하늘과새땅이 이 세상에 완성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모두 예수님처럼 부활의 새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품을 때 우리는 지금 이 곳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의 회복과 새하늘과새땅의 완성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 소망이 반석처럼 견고하게 여러분의 심령에 자리잡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