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20-21/가까이 와있는 천국
171231 주일설교 천국4
일체유심조와 의미떼라피
불교경전인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조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일체, 세상만사 모든 것이 유심조,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는 신라 원효대사의 깨달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당나라에 선진불교를 배우러 유학길을 가던 중 무덤가에서 자다가 시원한 물 한바가지를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것이 해골바가지에 고인 시체썩은 물이었습니다. 심한 구역질을 하던 중 문득 시체썩은 물도 마음먹기에 따라 시원한 생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이켜서 신라에 이 일체유심조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 가르침은 동양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슈비츠수용소의 경험을 토대로 ‘죽음의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쓰고 소위 의미치료라는 분야를 개척한 정신과의사 빅터 프랑클이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면 그 고난을 견디는 것이 그리 어렵지않다는 것입니다. 환자 중 한 사람이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와 사별하고 괴로워 견딜 수 없어하였습니다. 그는 조언하기를 ‘당신이 먼저 죽었다면 이 괴로움을 당신 아내가 홀로 남아 견뎌야 했을텐데 차라리 아내가 먼저 가서 그 괴로움을 당신이 겪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자 그는 그 말이 맞다며 크게 위로를 받고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빅터 프랑클의 의미치료는 일체유심조의 서양판이라고 할 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오늘날 긍정적 마음가짐만 가지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식의 가르침으로 변형되어 전파되고 있고 사실 개신교의 설교 속에도 적잖이 발견됩니다.
일체유심조나 의미찾기는 적절히 사용되면 우리의 삶에 유익이 됩니다. 슬픔과 걱정, 두려움과 같은 다루기힘든 감정들을 다루는데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그보다 훨씬 큰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부작용이 더 많습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새총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새총으로 새를 잡아 구워먹으면 허기를 달래는데 도움이 좀 되겠습니다만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평안이 곧 천국이냐
일체유심조 혹은 의미치료에 대한 설명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 천국설교를 들은 어떤 교우들이 천국이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실패, 좌절과 낙담 중에서 죽고 싶도록 괴롭다가도 주님을 믿고 마음이 평안해지면 그것이 곧 천국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의 구절 때문입니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안에’를 ‘네 마음 안에’로 이해한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임하는 천국, 아, 그것이 곧 일체유심조나 의미찾기를 통해 괴롭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과 유사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이해는 ‘안에’라고 번역된 전치사 헬라어 엔토스를 within you 너희 안에 혹은 among you 너희 가운데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두 번역이 모두 적절치 않다는데 동의합니다. 바이블렉스 주석은 ‘엔토스가 관념적 개인주의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 나라의 세력과 권위와 효력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톰 라이트는 ‘너희 안에를 하나님과 맺은 영적이고 사적인 내면의 관계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예수님은 이 표현을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셨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달라스신학교 신약학 다렐 보크 교수는 ‘너희 안에’를 ‘너희가 잡을 수 있는 곳에 혹은 너희 손 닿는 곳 안에’로 번역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와 아주 가까운 데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첫 선포와 의미가 통합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들이 질문한 것처럼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음에 이루어지는 평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물론 천국의 열매이지만 천국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리고 특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 누리는 평안은 자칫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최면의 일부로 악용될 소지마저 있는 개념으로 천국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천국의 본질
그럼 천국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다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마 6: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마 6:10)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쉬운아가페성경)
주석가들은 이 기도에 등장하는 세 가지 간구, 이름이 거룩해짐과 나라가 임함과 뜻이 이루어짐은 모두 같은 개념이라고 동의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천국은 너희 가까이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곳에 임하는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럼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오바마는 자신의 뜻을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오바마캐어를 만들었지요. 트럼프는요? 트럼프세제개혁안을 만들었습니다. 둘 다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법을 만들어서요. 핵심은 바로 법입니다. 뜻을 이루는 방법은 그 뜻을 담은 법을 만들고 그 법이 집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 민족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며 그들에게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법을 지켜야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고 그 나라는 당신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율법)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캐나다나 러시아나 멕시코가 아니라 미국인 이유는 땅에 미국땅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법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헌법에 의해 구성된 정부가 다스리고 헌법에 의해 조직된 경찰과 군대가 치안과 국방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나라의 핵심입니다. 이 법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구인 모압 평원에 도착했을 때 시내산에서 주신 법을 다시 한 번 모세로 하여금 가르치도록 하십니다.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 바로 신명기서입니다. 다시 신, 명령할 명 즉 시내산에서 이미 주셨던 율법을 다시 가르친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법을 이 백성이 잊어버리고 지키지 못 하면 하나님 나라고 뭐고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법을 주신 과정, 레위기는 그 법의 내용 그리고 신명기는 그 법을 다시 설명하신 것이니 모세오경 중 세 권이 법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두 권은 무엇인가요? 창세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과정 즉 하나님 나라의 땅을 얻는 과정입니다. 모든 나라는 땅, 국민, 주권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주권 즉 법입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법, 율법을 안 지켜서가 아닙니까?
평안이 아니라 법이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공동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핵심방법도 바로 이 법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전한 율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 완전케 하는 설교였습니다. 형식적 준수와 자기의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율법을 사랑과 공의라는 정신으로 바르게 해석하여 다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도록 만드는 사명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법을 지키지 못 하여 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지키지 못 한 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의 법을 완성하셨고 죄인들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공의의 법을 완성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법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하나님 나라 안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나라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 이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마치 미국인에게 미국법을 지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다 법을 지키시고 완성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법을 어겨도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구원파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 안에 들어왔으니 더더욱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무너집니다. 그 법을 지키는 곳에서라야 하나님 나라가 온전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가까이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곳에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과 상관없이 마음을 고쳐먹어서 누리는 평안은 참 평안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울 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굴복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고, 잡혀가기보다 잡히지 않아서 계속 선교를 할 수 있지 않게 되었느냐고 합리화함으로써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문 밖에서는 이웃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배불리 먹고 산다고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최면이고 합리화이고 도피이고 기만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의 능력
천국을 개인의 영적, 심리적 영역에 가두어둔 이해는 교회의 권세를 약화시켰습니다. 이는 마치 대포를 끌고와서 빨래걸이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대포에다 빨래를 널면 잘 마르고 좋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대포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키는데 쓰지않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천국을 개인의 심리적 영역에 가두어둠으로써 삶을 변화시키고 가정과 사회를 회복시키는 천국의 막강한 능력을 교회는 썩혀온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마음의 평화와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실천을 통한 그 뜻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실천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진정한 평화와 정의와 복지의 나라가 서게 됩니다.
여기서 그 하나님의 법이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 뒤따를텐데요, 이 질문도 추후에 시간을 가지고 다루어 보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천국은 개인의 마음에 임하는 평안이나 만족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성도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법이 지켜지는 가정,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사회 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실현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 마음에 자기만족이나 위안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한 참된 평화가 자리잡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바로 곁에, 손 닿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을 통해 바로 우리 곁에 와있는 이 천국을 여러분의 손을 뻗어 잡으시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사시기를 축복드립니다.